새롭게 찾아온 기운에 화들짝 놀란 악사들이 떨리는 손을 들어 황급히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신영은 자비로운 지배자가 아니었다.
제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신영께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의 그런 필사적인 노력에 멈추었던 음률이 다시금 너른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악사들의 심정이야 어쨌건 간에, 사람들은 한시라도 빨리 신영이 들어와 이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길 바랄 뿐이었다.
아가씨는 하나인데 걸려 있는 남성은 둘이니.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보다 더한 호기심이 용암처럼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신영이 연회장 안으로 서자, 자리에서 일어난 모두가 일제히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노인의 메마른 눈동자가 제 자리 아래에 앉은 백가주를 훑고 나아가다가.
멈칫!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빠르게 움직인 노인의 시선이 거대한 영력의 기운을 정확히 잡아냈다.
“!!”
모두가 허리를 숙이고 있어, 그의 눈동자가 격동하는 것을 발견한 것은 짧은 묵례로 인사를 끝낸 백가주뿐이었다.
노인의 울대가 격하게 진동했으나 이내 그런 자신을 자각한 듯, 표정을 확실히 지웠다.
신영의 몸이 다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적동색 장포 위의 금빛 수실이 마치 영력을 머금은 듯 불빛에 화려하게 일렁였다.
하지만 그런 노인도 세화의 앞을 지나칠 때만은 제 감정을 완전히 숨기지 못했다.
이글거리는 뜨거운 눈이 잠시 옆으로 돌아 허리를 숙인 세화의 머리와 발치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백가주와도 짧은 시선 교환을 마친 노인이 모두에게 착석을 명하자, 소가주가 일어나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한순간에 곡이 한층 더 흥겨운 것으로 바뀌었고, 무희들이 연회장 한중간으로 올랐다.
같은 옷을 입은 무희들은 일제히 제일 자신 있는 춤을 선보이기 시작했지만 모인 이들의 관심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그래서, 백가주는 여기까지 어인 일로 오신 것인가.”
노인의 목소리가 백가주에게 향하자, 모두가 상좌를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낮으면서도 부드럽고, 성격을 알려 주듯 침착한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이미 신영께서 알고 계실 그 일입니다.”
“아하. 내 아들을 백가로 데려가려고.”
낮게 목을 울린 노인이 제 앞에 준비된 상에서 술병을 직접 집어 들었다.
“그대도 한잔하지.”
백가주가 술잔을 내밀어 신영에게서 술을 받았다.
“모두가 내게서 술을 받으면 황송하다고 말하곤 하지. 백가주는 그런 것이 없나?”
“황송합니다.”
“농담인데 재미없는 친구로군.”
가면 때문에 술을 마시지 못한 그는 잔을 상위에 그대로 내려놓았다.
“그 가면은 왜 쓰고 온 건가?”
“사정이 있어 그러합니다.”
“그 사정이 무엇인지, 내가 알고 싶은데.”
“신영. 제가 신영을 존중해 드리는 것은 이곳이 주가의 권역이기 때문입니다.”
“뭐야?”
“신영께서 제 주인은 아니시니, 그 점을 명확히 인식하시라는 말입니다.”
탕!
거센 손길이 들고 있던 술잔을 내리찍듯 상 위에 올려놓았다.
연회장에 있던 이들이 바짝 얼어붙었다.
노인이 이를 갈듯 덧붙였다.
“건방진 소리를 하는군, 백가주. 신영이 왜 신영인 줄 아나? 이 환계 전체의 주인이 나이기 때문이야. 한 번의 승전으로 태초부터 이어진 환계의 규율을 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환계는 지금껏 개인의 역사가 가문의 역사가 되고, 그것이 다시 환계 전체의 역사로 이어져오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저는 이미 이전과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고, 이 발걸음이 태초부터 이어져 온 환계의 규율을 뒤바꾸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뭐라?!”
“물론. 이것은 제 개인적인 소견일 뿐이니 신영께선 노여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육가 연합의 맹주 자리를 맡아 신영께 대적하고 있는 만큼 예전과 같은 지위로 신영을 대할 수 없음은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를 이어낸 백기하가 신영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실종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유효한 직위입니다. 그 문제만 해결된다면 저희 백가를 비롯한 다섯 가문은 다시금 신영의 휘하에서 환계의 번영을 위해 애쓸 것입니다.”
“…….”
백기하의 침착한 눈은 가면에 가려져 음영이 생긴 탓에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노인의 흉흉하고 핏발선 눈만큼은 모두가 볼 수 있었다.
저 백가주를 노인이 얼마나 찢어 죽이고 싶어 하는지를, 확인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노인의 표정은 이내 씻은 듯이 지워졌다.
하하. 낮은 웃음을 흘린 노인은 언제 그런 눈을 했었냐는 듯 백가주를 향해 술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래. 내 그 부분은 너무 무심했었음을 인정하지. 당연히 빠르게 해결해 주어야지. 그걸 위해 내 아들을 그곳에 보내는데.”
그는 백기하가 술잔을 마주 들어 올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단번에 술을 삼켰다.
“그리고 명윤 원로의 여식은 앞으로 나오라.”
그 말에 주세화가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앞으로 나와 신영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탈피를 했구나.”
“네. 신영의 보호와 자비 덕분입니다.”
“영력은, 어디까지 낼 수 있느냐. 이곳에서 한번 보여 보아라.”
세화가 머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제가 이제 막 탈피를 마쳐 아직 영력의 조절이 서툽니다. 자칫하면 신영께서 주관하시는 연회를 엉망으로 만들까 염려스럽습니다.”
“조절이 서툴다고? 제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냐.”
“예. 하여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신영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영력을 다루는 법을 빠르게 익혀, 이번 연회가 아닌 다음 연회에서 주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을 모습으로 나서 보려 합니다.”
“…….”
“이번 한 번만 신영께서 커다란 자비로 소녀의 불충을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노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보이는 만큼 영력이 강하다면 근원이 깊다는 말이니 제어력도 따라올 터인데.’
차가운 시선이 세화의 몸 주위로 너울대는 영력의 크기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혹시 근원이 작아 숨겨지지 않고 표출되는 힘이 많을 뿐인데, 그것을 내가 지금 영력이 대단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가?’
그때였다.
한 시종이 성급히 들어와 신영의 귓가에 몸을 숙였다.
“……환석이, ……수레, ……거래…….”
“…….”
“…….”
다른 이들은 저 귓속말을 엿듣지 못했을 터이나 이미 영력을 내보이고 있던 세화와 백기하는 달랐다.
그들은 시종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몇몇 단어나마 들을 수 있었다.
백기하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세화에게로 향해질 때, 세화는 숙여진 고개 아래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시간에 잘 맞췄는걸.’
영채가 얘기한 ‘따라다니는 자들’의 존재를 알고부터 그녀는 계획을 조금 수정했다.
그녀도 제 외모가 주는 파급력을 알고 있었다.
하여 노인의 모든 의심과 집중을 독차지하기 위해 백기하에게 가면을 씌웠다.
신영이 연회장에 들어온 다음 환석의 소식이 그의 귀에 흘러 들어가도록 일을 꾸미기도 했고.
‘조금 전까진 내가 가진 영력에 대해 완벽히 확신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만한 환석을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얘기가 달라지겠지.’
저 의심 많은 노인은 분명 그녀가 신수가 되기 위해 또 한 번의 탈피를 준비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될 터였다.
그리고 신수가 될 가능성을 가진 이가 옆에 있다는 걸 알고 나면, 신영은 절대 그녀를 백가로 보낼 수 없게 된다.
분명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힘을 강제로 빼앗아 흡수할 시간을 벌고 싶어질 테니까.
‘하지만 이미 내 백가행 소식이 퍼져 있는 데다가 백기하까지 와 있으니 신중히 저울질해 볼 시간은 없겠지. 자칫 잘못하다가는 아들을 보내게 될 테니까.’
결정을 위해 그녀가 보이는 그대로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당장 알아보려 할 게 분명했다.
제어가 힘들다고 말을 해 두었으니 분명 그걸 돕는 무언가를 빌려주어서라도.
그리고 그 무언가가 오늘 그녀의 목적이었다.
‘빨리. 빨리 날 시험해. 시험하라고.’
그사이에도 노인의 형형한 시선은 주세화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못 했다.
이내 노인이 명령했다.
“나도 그렇고 백가주께서도 여기 계시니, 너는 그런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여기서 영력을 드러내 보거라.”
“…….”
“어서.”
그 말에 일어서긴 했으나, 여전히 주세화가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노인이 방법을 바꿨다.
그의 손안에서 불꽃이 들끓었다. 이글거리는 주황색 영력은 이내 거대한 한 자루의 아름다운 검으로 바뀌었다.
“이것을 잡아 보아라.”
노인이 칼자루를 세화에게로 돌려 내밀었다.
반드시 여기서 그녀의 영력을 확인하고야 말겠다는 집착이 눈 안에 선명했다.
“어려울 것 없다. 칼자루를 잡아 영력을 드러내 보이면 돼. 신검이 네 영력의 운용을 도울 것이다.”
“제가 어찌 감히 신영께서 사용하시는 신검을…….”
“내가 허락하지 않았더냐. 어서 잡아 보아라.”
당연히 잡아야지. 이 순간만을 기다렸는데.
그러면서도 긴장한 그녀의 심장이 쿵쾅쿵쾅 제멋대로 질주했다.
갖가지 힘이 합쳐져, 그녀의 몸 안에 있는 영력은 이미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신영의 검을 다루는 것에 완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
하여 그녀는 연회장에 오기 전 푸른 거북이의 영단을 제가 원하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녹지 않도록 영력으로 감싼 채 되는대로 삼켰다.
그것으로도 불안해 소매 안에는 백기하가 두고 간 황금 소의 영단까지 챙겨 왔다.
‘통해야 할 텐데.’
천천히 신검으로 다가간 그녀가 그것을 움켜 쥐었다.
‘아니, 무슨 소리람. 반드시 통하게 만들어야지.’
이를 악물고, 제 몸속에서 영력으로 보호하던 영단들을 모두 풀어 놓았다.
영단들이 빠른 속도로 몸에 흡수되며 거대한 힘을 내뿜었다.
이미 그녀의 몸에 퍼져 있던 본신의 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풀어 놓자 거대한 충격파가 연회장을 가로로 베어 내며 퍼져 나갔다.
펑!!
콰앙―!!
그 이후 눈을 뜰 수 없게 만드는 찬란한 빛이 연회장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