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254)

마차에서 내리기 전, 세화는 망설이다가 소매 안에서 얇고 하얀 가면 하나를 꺼내 들었다.

“혹시 이거 써 줄 수 있어요?”

주명윤과 백기하의 시선이 동시에 세화가 내민 가면 위로 떨어졌다.

“이건 왜?”

“당신 말대로라면 오늘 내 백가행 이야기가 나올 텐데, 아직은 갈 수 없거든요.”

“…….”

“그러니 오늘 신영의 주목은 내가 받아야 해요.”

주목?

두 남자의 표정이 단번에 바뀌었다.

주명윤의 얼굴은 ‘이게 무슨 말이지?’ 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고 백기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고 하는 말이야?”

드물게 화를 냈다.

“그건 당신이 그 아이들과 똑같은 위험 속에 놓일 수 있다는 말이야.”

단번에 낮아진 목소리가 마치 위협하듯 흘러나와 주명윤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응. 알아요.”

“주세화.”

“알아요. 괜찮아요.”

“…….”

“연회가 끝날 때쯤엔 가면을 벗어도 상관없어요. 처음 신영의 시선을 끌 때까지면 되니까.”

백기하는 뭐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뭐라 해도 그대로 실행할 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위험한 일이야. 부디 조심해야 해.”

고개를 끄덕이는 세화를 보며, 백기하가 그녀가 내민 가면을 뒤집어썼다.

주명윤의 시선이 그런 둘의 대화를 제법 이채롭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 * *

그리고 다시 여기, 거대한 연회장에 모인 이들의 시선은 일제히 열린 문을 향해 있었다.

하루하루 연회 날만을 손꼽으며, 오로지 백기하를 직접 보게 되는 이 순간만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이런 연회에 자리를 얻고자 애를 쓸 이유가 있었을까. 더욱 방탕하게 즐길 수 있는 연회가 많은 터라 굳이 신영께서 참석해 딱딱하게 예법을 지켜야 하는 곳엔 오고 싶진 않았을 테니까.

한시라도 빨리 목적을 이루고픈 누군가의 울대가 거세게 요동칠무렵.

드디어 나직한 발소리가 먼저 연회장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거대한 영력의 기운이 그보다 한발 늦게 밀려들었다.

“!”

“헉!”

영력이 약한 이들은 기운에 짓눌려 혼절하기 전에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연회장 한쪽에 앉아 있던 악사들은 손이 떨리기 시작해 연주를 멈춰야 할 정도였다.

환족들에게 영력이란 힘이자 곧 권력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영지에서라면 모를까. 적진 한복판에서 밑천을 모두 드러내 보이진 않을 테니, 이 놀랍도록 커다란 기운마저 적당히 감출 것은 감춘 상태일 텐데.

‘그런데도 이 정도라고?’

과연 신수의 기운이라고.

감탄에 감탄이 모여, 지켜보는 이들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던 순간이었다.

드디어 작은 발소리와 함께 영력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

“…….”

호흡이 일시에 멎었다.

연주마저 멈춘 연회장 안에는 마치 아무도 존재치 않는 것처럼 완벽한 고요가 흩뿌려졌다.

입장한 이는 그들이 기대하던 백가주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화가가 혼신의 힘을 쏟아 그린 듯한 미형의 얼굴을 목격한 연회장 모두의 머릿속은 그저 텅 비어 버렸다.

말을 잊은 사람들의 멍하게 풀린 동공이 들어온 이를 따라 저절로 움직였다.

‘……뭐지?’

……대체 저이는 누구인가.

그들의 눈앞을 지나치는 이는 주가의 연회에선 볼 수 없던 새하얀 예복을 입고 있었다.

흰 비단 예복 위를 수놓은 금사가 연회장의 불꽃에 비쳐 화려하게 반짝였고, 그 아래로 보이는 짙은 적보라색 치마는 입은 이의 존재를 신비롭게 부각시켰다.

반만 틀어 올리고 나머지를 그대로 늘어뜨린 흑단 같은 머리카락은 땅에 끌릴 정도로 길었는데 그것이 마치 예복의 한 부분이기라도 한 양 그녀를 한층 더 우아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영력의 기운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 그녀가 앞을 지나칠 때마다 찌릿찌릿한 압박감이 흘러나왔다.

주가의 연회에 저리 하얀 옷을 입고 참석하다니.

‘혹시…… 저분이 백가주신가.’

그들도 이미 백가주가 남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환계 유일의 신수에 대한 이야기는 환족 모두의 관심사였으니까.

하지만 어떤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도, 어떤 아름다운 장면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과 비교하면 모두 빛을 잃는 느낌이었다.

저런 외모를 가지고, 이리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영력을 드러낼 수 있는 이라면 신수밖에는 없지 않을까.

허면 저분이 백가주신가, 그런 추측을 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앞에 있는 이에게 지나치게 집중해 곧장 눈치채진 못했으나 저 뒤의 헌헌장부는 또 누구인가.

가면으로 얼굴을 다 가린 채, 앞선 이와 발을 맞춰 걷고 있는 남자 또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긴 마찬가지였다.

더없이 아름다운 여인은 우아하며 당당했고. 그 뒤를 따르는 호위인 듯한 이 또한 위풍당당하고 지체 높아 보였으니, 사람들은 사실 백가주가 여자였는데 남자로 잘못 알려졌던 건 아닐까 의심할 만도 했다.

한데 그때였다.

그런 여인을 다른 이들과 똑같이 경탄 섞인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주경현이 벌떡 일어났다.

“세화야!”

하고 이름까지 부르면서.

보는 이들의 눈이 영문을 몰라 동그랗게 뜨여졌다.

‘세화? 백가주의 이름은 ‘기하’일 텐데?’

‘게다가 소가주께서 어찌 저 여인의 이름을 저리도 친근히 부르시지?’

자리에서 내려온 소가주가 그들에게 가까워짐에 따라 지켜보는 이들의 놀라움도 커져만 갔다.

그 놀라움은 소가주가 호위인 듯한 남자에게 묵례하며 인사하자 경악이 되었다.

“백가주십니까.”

“!!”

뭐라고? 저 남자가 백가주였다고?

그럼 저 여자는? 저 여자는 누군데?

그때 여인의 붉은 입술이 열리며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 제 자리로 가 볼게요.”

소가주가 아니라 뒤에 있는 백가주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여인은 곧 주가의 연회장을 아주 잘 아는 이처럼 어디론가 향했다.

주가 원로들의 자리였다.

그중 가장 신영과 가까운 곳까지 다가간 그녀가 한 자리에 착석했다.

그런 후 제 자리임을 의심치 않는 듯 술을 조금 따라 마시기까지 하자, 모두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눈으로 그 여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긴 명윤 원로의…….”

“그럼 저 아가씨가…….”

“저 아가씨가 명윤 원로의 딸이라고?”

“그 반편이라던?”

“……대체 어디가 반편이라는 건데?”

그 놀라움이 소가주에겐 득이었다.

아무도 그녀가 주경현에겐 인사도 하지 않고 백가주에게만 허락을 구했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나서야 소가주가 백기하를 향해 권했다.

“자리로 가시지요.”

둘 역시도 연회장 가운데를 가로질러 올라 신영의 자리 바로 아랫단에 착석했다.

한발 늦게 연회장 안으로 들어온 주명윤이 세화의 옆자리에 앉자 참석자들은 정말로 그녀가 명윤의 딸이라는 걸 확신하고 탄식했다.

‘왜 명윤 원로가 지금껏 딸의 존재를 숨겨 왔는지 알 것 같네요.’

‘그러게요. 저런 따님이 있었다니. 배상을 위해 모두가 영력을 토해 놓는 실정이었으니, 딸에게까지 책임을 지우기 싫었겠지요.’

‘그래도 정말 대단한 아가씨네요. 며칠 전에 탈피를 했다고 하던데. 이제 막 탈피를 마친 어린 아가씨가 벌써 이 정도의 영력이라니.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지금 보이는 영력의 기세가 전부일까요? 아니겠죠?’

‘이건 고작 탈피 후 첫 연회일 뿐이잖아요? 당연히 숨겨진 힘이 더 있겠지요.’

사람들의 시선에서 처음의 충격은 많이 가신 상태였으나 그들은 여전히 세화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허리를 펴고 앉은 그녀는 목이 마른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손을 뻗는 순간 긴 소매 아래에서 가느다란 손가락이 애잔한 자태를 드러냈다.

섬섬옥수라는 말을 깨닫게 하는 하얀 손은 제 앞의 자기 병을 우아하게 들어 올려 술을 잔에 따랐다.

그 잔을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댈 때면, 하얀 잔과 대비되는 붉은 입술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꿀꺽.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 중 누구의 목에서 울린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저 여인에게서 난 소리는 절대 아니라는 것이었다.

술을 삼키느라 가느다란 흰 목이 움직이는 모습도.

술잔을 내려놓으며 상 위의 것들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소매를 걷어 올리는 조심스러운 손길도.

그러면서 드러난 희고 가는 팔목도 보는 이들의 목을 타게 만들기 충분했다.

‘……어쩜, 어린 아가씨답지 않게 저리 기품 있을까요.’

‘연회에 참석하지 않던 아가씨인 만큼 시선이 이 정도로 쏠리면 겁을 집어먹을 만도 한데 그런 기색이 전혀 없네요.’

그러던 중 누군가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떠올렸다.

‘헌데 저 아가씨가 어찌 백가주와 함께 입장한 것이지요?’

그랬다. 미혼의 아가씨라면 절대 혼약자도 아닌 이와 입장할 리가 없는 것이다.

보통은 부친과 함께 입장하는 것이 맞을 터인데 명윤 원로가 그들과 떨어져 따로 입장한 것도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게다가 지금껏 저 아가씨는 소가주의 혼약자가 될 거라 기대받아 오지 않았던가.

‘소가주님께선 저 아가씨의 사촌인 사씨와 입장하고, 저 아가씨는 오히려 백가주와 입장하다니.’

‘혹시 신영께 무슨 언질이라도 받은 것은 아닐까요?’

‘맞아요. 전에 혼인 동맹 얘기도 있었고. 무슨 얘기가 있지 않고서야.’

‘설마요. 저 아가씨가 아니고서야 소가주님의 혼약자가 될 만한 이가 없는데, 설마 신영께서 자기 아들의 정혼자를 혼인 동맹에 사용하시려고요.’

‘그렇겠지요?’

한데 그렇게 생각하고 넘기기엔 또 걸리는 것이…….

‘소가주님의 저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번 보세요.’

‘마치 백가주에게 혼약자를 빼앗긴 것만 같은 분위기인데요.’

소가주와 백가주, 원로 여식 사이의 묘한 기류를 느낀 이들이 영문을 몰라 주춤하고 있을 때였다.

두 번째로 거대한 영력의 기운이 그들을 덮쳐 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금 문 쪽으로 향했다.

신영께서 오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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