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254)

대답보다 먼저 세화의 시선이 흘끗 제 아버지를 담았다.

또 그가 ‘왜 백가주께 갑니까. 제 딸이니 제 옆으로 와야지요.’라는 식으로 받아치며 티격태격할까 봐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허나 주명윤은 팔짱을 끼고 시선을 내린 채로, 백기하의 말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주명윤의 시선이 세화를 향했다.

“뭘 말이냐.”

“뭐든요.”

“녀석, 싱겁기는.”

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어진 명윤이 세화를 보며 웃었다.

“오늘 예쁘구나. 환계에서 내 딸이 제일 예쁠 거다.”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백기하가 끼어들자 이번에야말로 짜게 식은 시선이 그를 향했다.

“백가주의 생각이 없어도 제 딸은 예쁩니다.”

“이왕 예쁜 거 제 생각도 곁들여지면 좋지 않습니까?”

“그게 대체 왜 좋습니까?”

또 티격태격하기 시작한 두 사람을 그대로 두고 세화의 시선은 잠시 창밖을 향했다.

어마어마한 행렬이 신영의 저택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 * *

어제 분명 서신을 보내 놓았고, 오늘은 이른 시간부터 마차를 보냈건만, 마차는 태운 이 없이 그대로 돌아와 버렸다.

주경현은 이제 화조차 나지 않아 그런 보고를 꺼내 놓는 시종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소가주님. 세화 아가씨는-.”

“되었다. 일단 오늘 연회가 더 중요하니. 천령이 넌 어제 시킨 것은 좀 조사해 보았느냐.”

“네. 헌데.”

주경현의 얼굴을 힐끔 바라본 천령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헌데 이틀 전 세화 아가씨께서 ‘소가주님 대신 가는 백가행’이라는 말씀을 수없이 반복하시는 바람에……, 이미 모두가 그 이야기를 알고 있어 큰 진척이 없었습니다.”

“…….”

소가주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지자 호위가 서둘러 덧붙였다.

“그래도 소가주님께서 산더미 같은 선물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일을 영민하게 처리하셔서 다들 소가주님께서 세화 아가씨께 얼마나 마음을 써 주고 계신지에 대해서만 말들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게 아닐 거라는 걸 알면서도 주경현은 호위의 말에 일언반구도 답하지 않았다.

이 호위가 이렇게까지 말할 때는 이미 더 이상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때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소가주님, 서월이에요.”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 주경현이 성의 없이 대답했다. 들어오너라.

“짜잔. 소가주님. 서월의 솜씨가 꽤 괜찮지요?”

주경현의 시선이 흘끔 서월과 그 옆에 따라 들어오는 이에게로 향했다.

세화의 사촌 동생 사연주였다.

오늘 연회에 데리고 갈 계획이라 서월에게 치장을 맡겼는데 말마따나 솜씨가 꽤 좋았다.

“괜찮구나.”

그 대답에 사연주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머. 연주 언니 얼굴 붉어지는 것 좀 봐.”

“놀리지 말아, 서월 동생.”

부끄러워하는 사연주를 보며 서월이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이내 서월은 주경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소가주님께서 특별히 부탁하신 일이라 제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데, 어찌 말로만 선물을 주십니까?”

그 말에 주경현의 입술 사이로 피식 웃음이 샜다.

“괜찮다는 말도 선물이 된 거냐?”

“그럼요. 다른 누구도 아닌 소가주님의 칭찬인데요. 그보다 더한 선물이 어디 있단 말인가요.”

“그러면서 손은 왜 여태 내밀고 있어.”

“헤헤. 그건 그거고 좋은 거는 좋은 거니까요.”

한결 기분이 나아진 주경현에 의해 작은 상자 하나가 서월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제 나도 가야겠군.”

이미 예복을 입고 세화를 기다리고 있던 주경현이 몸을 일으켰다.

시선이 사연주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 번 훑고 지나갔다.

“헌데 이건 너무 화려하지 않나?”

“네? 무슨 그런 말씀을. 여성들의 의복과 장신구는 무조건 화려할수록 좋은 거랍니다.”

“……그래?”

“그럼요. 그래야 대동하시는 분께서 야박한 분이 아니라는 증명도 될 수 있고요.”

자기만 좋은 예복과 장신구를 걸치고 부인이나 혼약자에겐 인색하게 구는 일족들도 있거든요, 하고 덧붙이는 말에 사연주의 볼이 다시 한번 더 붉어졌다.

부인이나 혼약자라니.

“연주 언니는 어때요. 오늘 착장이 마음에 들지요?”

“마음에 들다마다. 소가주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입니다. 감사합니다.”

“알았다. 가자.”

크게 관심이 있어 물어본 것은 아니라는 듯, 주경현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내저으며 연회장을 향해 먼저 걷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사연주가 종종걸음으로 뒤따라가려는 것을 서월이 빠르게 다가와 잡으며 당부했다.

“오라버니는 무심한 분이시니까요. 언니가 먼저 말씀드리세요.”

서월의 동그란 눈이 가늘게 휘었다.

“동행한 상대와 연회장에 입장할 때 발걸음을 맞춰 주신다든가. 가깝게는 손을 잡아 주신다든가 하는 것들이요. 꼭 언니가 먼저 언급하셔서 챙김 받으세요.”

“고마워. 하지만 그건 일단 내가 알아서 할게.”

다녀와서 또 얘기하자고, 사연주가 서둘러 서월을 다독이고는 주경현을 따라갔다.

가녀린 체구의 소녀는 그 뒤에 남아 그런 사연주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 * *

웬만한 혈족의 저택 크기와도 비견될 거대한 연회장 안엔 영력으로 피운 불꽃들이 허공에서 이글거렸다.

악사들은 연회장 한쪽에 빙 둘러앉아 듣기 좋은 합주를 반복하고 있었다.

잘 정돈된 정원에선 팥배나무의 진한 향기가 바람이 불 때마다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연회장은 더없이 넓었으나 초대된 주가 일원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한 탓에 남은 자리가 많지 않았다.

그들은 신영이 앉으실 상석 옆에 놓인 커다란 좌탁을 보며 연신 기대를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환족들은 가지고 있는 영력이 많을수록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이 환계에서 백가 가주 백기하보다 영력이 높은 이가 있던가.

게다가 전장을 다녀온 이들에게선 백가주의 두려운 무용에 관한 이야기 말고는 얻어 낸 것이 없어, 환계 유일의 신수가 어떤 자인지 다들 궁금했던 것이었다.

주가 일족들의 속물적인 호기심이 연신 연회장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지금쯤이면 도착할 때가 되었을 텐데.

아직인가.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게 웃음기로 초조함을 가린 시선들이 허공을 날아다닐 때였다.

복도와 연결된, 닫혀 있던 연회장의 문이 시종에 의해 조용히 열렸다.

‘헉. 드디어 백가주가 온 걸까요?’

‘그러게요. 백가주가 오신 건가요?’

먼 곳에 있는 이들은 채신머리없어 보일까 봐 차마 일어나지 못하고 목만 길게 빼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곧 “……아.” 하는 실망의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이어졌다.

주경현이 먼저 입장한 것이다.

‘하. 그래도 우리 소가주님께서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시는 분은 아니시지.’

소가주 역시 연회에 참석하는 횟수가 많지 않아 오늘을 기회로 그를 보게 된 이들이 연신 탄복의 신음을 흘렸다.

‘검을 어찌나 열심히 수련하셨는지 체형만 보고도 알겠네.’

‘맞아. 저 다부진 몸에 저런 수려한 얼굴이라니. 성품은 또 얼마나 다정하고 자애로우신지.’

‘헌데…… 저 사가 계집은 왜 대동하신 거지?’

한바탕 주경현을 훑은 일족들의 시선이 이번엔 그 옆에서 마치 그의 혼약자인 양 걷고 있는 여성에게 향했다.

그녀는 금사가 더없이 화려하게 수 놓인 붉은 비단 예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입은 이를 한 송이 모란처럼 보이게 하는 아름다운 옷이었다.

턱을 들고 당당히 주경현의 옆을 걸어가는 이는 자신만만해 보였다.

혈족들의 시선이 사나워졌다.

붉은색은 주가의 연회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색상이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가 일원일 때의 일 아닌가.

어찌 사씨 따위가 저런 화려한 붉은 예복을 걸치고 감히 신영께서 주최하시는 연회에서 소가주의 옆을 걸어?

기가 막힌 혈족들이 이를 사리물었을 때였다.

소가주의 자리로 마련된 높은 단상으로 올라가려던 주경현이 여전히 제 옆을 걷는 사연주를 보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넌 대체 어디까지 따라오는 것이냐. 그만 벽에 가서 서 있거라.”

“……네?”

사연주의 동그란 눈이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껌뻑거렸다.

“뭐가 ‘네?’라는 것이냐. 네 자리는 저 벽이 아니더냐.”

그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주가 저택의 시종들이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진심이었다. 뒤늦게 그것을 파악한 사연주의 안색에서 핏기가 빠져나가 새하얘졌다.

“그, 그게 무슨. 경현 님. 저는, 제 자리는…….”

주경현이 사연주의 말을 끊으며 의아하게 물었다.

“뭐냐. 왜 놀라는 거지? 혹 너, 지금 감히 주가 소가주의 혼약자가 앉는 자리에 앉으려고 한 것이냐?”

그 대화가 주가 일원들의 마음을 풀어 주었다.

당황한 사연주가 무어라 더 말을 붙이려 하였으나 주경현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사연주를 그곳에 남겨 둔 채 홀로 단상에 올랐다.

이 연회장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게 화려하게 치장한 사연주는 차마 벽으로 가지도 못하고 허둥거렸다.

저 벽에 기대선 시종들은 모두 시종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예복을 입은 이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분명 소가주님이 연회장에 함께 들어가려 저를 불러들였다고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 치장도 맡겼다고 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모두가 앉아 있는 연회장에서, 지금 서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연회장 여기저기에서 사연주만 알아들을 수 있는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결국 턱을 단단히 굳힌 그녀는 주경현이 말한 대로 벽 쪽으로 다가가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치욕을 참아 내는 그녀의 손톱이 소매 아래에서 손바닥을 강하게 파고들었다.

어떤 것도 이 순간보다 모욕적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연회장의 문이 열리고, 거대한 영력의 바람이 주인보다 먼저 연회장 안으로 밀려들었다.

강한 힘의 파동에 앉아 있던 이들의 피부에 옅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세상에. 이 거대한 영력이라니.’

하여 아직 발끝조차 보이지 않았건만 그곳에 있는 이들은 지금 들어오는 자가 누구인지 곧장 알아차렸다.

백가 가주.

환계 유일의 신수.

백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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