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한 곡이 끝나고 금 소리도 사라졌으나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열면 이 품 안에서 나와야 하니까.
환상 같은 이 시간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가야 하니까.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주 대고 있는 아주 좁은 공간 사이로 두 심장이 똑같은 속도로 쿵쿵 뛰었다.
세화가 손을 들어 여전히 금 위에 놓인 그의 큰 손을 덮어 보았다.
흉터를 조심히 눌러 보고, 굳은살이 있는 손끝을 더듬어 볼 때였다.
“아가씨! 아가씨, 여기 계세요?”
“!”
화들짝 놀란 그녀가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 허둥대자 백기하는 진정하라는 듯 그녀의 양어깨를 부드럽게 누르고 먼저 일어섰다.
떠나려는 그 모습에 세화는 그제야 제가 차고 왔던 향낭을 기억해 냈다.
잠시만요.
소리 죽여 그를 부르자 백기하가 잠시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서둘러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그 위에 향낭을 올려놓았다.
“소가주가 보낸 선물들을 모두 영단으로 바꿨어요. 당신이 가져요.”
“…….”
“알아요, 나도. 이런 거 몇 개 줘 봤자 내가 챙긴 푸른 거북이의 영단엔 비하지 못할 거라는 걸. 그래도, 내가 지금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이거라도 가지고 있어요. 다음에…….”
세화가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다음엔 더, 더 좋은 걸 줄 수 있을 거예요. 그게 뭐든.”
“…….”
아가씨를 외쳐 부르는 영무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건만 백기하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의아함에 내리깐 시선을 들어 올렸던 세화가 잠시 굳어졌다.
그는 꽃처럼 웃고 있었다.
달빛이 그의 까만 머리카락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긴 눈꼬리는 초승달처럼 완연히 접혀 있었다.
물안개 핀 정원의 모습과 그윽한 연꽃의 향기도 아름다웠지만, 눈앞의 신수보다 아름답진 못했다.
그녀의 손을 잡아 올린 그가 그 위에 향낭을 도로 올려놓았다.
“아니, 이건 당신이-.”
그리고.
쪽!
그녀의 새하얀 볼 위로 뜨거운 무언가가 닿았다 사라졌다.
깜짝 놀란 세화가 제 볼을 부여잡았다.
여전히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눈가가 미미하게 붉어졌다.
그 상태로 그는 빠르게 물안개 저편으로 사라졌다.
“아가씨!”
그와 동시에 영무가 그녀를 발견했다.
“늦은 밤에 여기서 뭘 하셔요. 금을 연주하셨어요?”
자다가 깨 보니 아가씨께서 보이지 않아 찾으러 나왔다고. 저희를 깨울까 봐 여기서 연주하셨냐고. 다음에는 그냥 방에서 하셔도 된다고.
종알종알 말을 이으며 영무가 금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세화는 여전히 한 손으로 볼을 감싼 채 굳어져 있었다.
“아가씨 얼굴이 너무 빨간데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
아니라고. 고개만 젓는 세화의 다른 한 손에는 향낭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 * *
돈을 잔뜩 얹어 주었더니,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완성된 연회복들이 다음 날 오전부터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 하루는 내일 연회를 위한 준비에 쓰였다.
식사를 간단히 한 뒤 세화는 도착한 예복들을 모두 입어보고, 장신구 역시 최상의 것들만 골라 신중하게 선택했다.
오후에는 꽃잎을 잔뜩 뿌린 욕탕에 머리카락과 몸을 오래 담갔다.
그동안 세 자매는 세심한 손놀림으로 세화의 손톱을 손질하고 온몸에 향유를 발랐다.
긴 머리는 촘촘한 빗으로 여러 번 빗어 광택을 살렸고, 내일 하고 갈 머리 모양을 오랜 의논 끝에 선택했다.
그리고 마침내 연회 날 아침이었다.
세화는 새벽부터 일어나 세안을 마치자마자 다시금 꼼꼼히 향유를 발랐다.
어제 미리 골라 둔 의복과 장신구를 걸치고 머리를 올리는 동안 영선이 세심하게 그녀의 눈썹을 다듬고 화장을 도왔다.
“와.”
세 자매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동안에도 연신 감탄을 흘렸다.
“오늘은 분명 우리 아가씨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실 거예요.”
밑도 끝도 없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목소리들을 들으며 세화가 낮게 웃었다.
“헌데 소가주님께 답신을 보내지 않으셔도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영선의 걱정스러운 말에 붉은 연지를 바른 입술 양 끝이 살짝 솟았다.
“신경 쓰지 마.”
어제 세화는 주경현에게서 서신을 한 통 받았다.
이른 아침에 마차를 보낼 터이니 연회에 함께 입장하기 위해 준비되는 대로 건너오라는 내용이었다.
상대할 가치가 없어 그대로 어딘가에 던져두었는데, 차대 신영이자 소가주인 주경현에 대해 이리 날카롭게 구는 것이 세 자매는 제법 불안한 듯싶었다.
그때였다.
“……허.”
긴 그림자가 그녀의 방 안으로 드리워졌다.
“정말, 아름다운데.”
그렇게 말하는 백기하는 짙은 남색 장포를 입은 채 문가에 서 있었다.
반만 틀어 올려 묶은 긴 검은 머리가 그의 수려한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빛이 비칠 때마다 자수 실이 은은하게 반짝이는 장포는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제법 두터웠음에도 그의 단단한 근육과 무인으로서의 위용을 전혀 가리지 못했다.
허리에 백색 수실을 매달고 예장을 완벽히 갖춰 입은 그는, 한 가문의 가주답게 위엄이 넘쳤다.
차분한 발소리가 그녀에게로 저벅저벅 가까워졌다.
어쩐지 열이 오르는 그녀의 귓가로 백기하의 낮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대에게.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뭔, 데요?”
오늘은 혹시 그도 향유를 바른 걸까? 가까이 다가온 남자에게서 청량한 수목의 향이 가득 풍겨 왔다. 긴장한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듯한 시원한 향내였다.
“미장 어른께서는.”
이 방 안엔 세화와 세 자매밖에 없건만 그는 마치 듣는 이가 있는 것처럼 조심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체구가 크시잖아.”
“? 그렇죠.”
“그러니 나와 한 마차를 타고 가시면 참 불편하시지 않을까?”
“혼자 가겠단 말이에요?”
“아니지. 마차가 한 대 더 있잖아.”
그의 표정은 이틀 전 달밤,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고 달아나던 그때와 닮아 있었다.
“마차는 두 대니까. 하나는 미장 어른께서 편안하게 홀로 타시고, 나는 그대만 괜찮다면 그대의 마차에 신세를 졌으면 하는데.”
“…….”
“응? 어때?”
“우리가…….”
목이 잠긴 듯해 그녀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우리가 한 마차를 타고 가면 지켜보는 이들이 무언가 있다고 오해할 거예요.”
“……그게 싫은 거라면.”
“하지만 타는 이는 셋밖에 되지 않는데 마차를 셋이나 가져가는 것도 낭비 같고 좋은 생각은 아니니 당신 말대로 하죠.”
그 대답에 세 자매의 의미심장한 시선들이 서로 오갔다.
하지만 주명윤은 주명윤이었다.
준비를 마친 세화와 그녀를 기다린 백기하가 저택의 정문으로 이동했을 때였다.
“늦으셨군요.”
그곳엔 분명 준비한다던 마차 두 대는 어디 가고, 작은 창고 같은 거대한 마차 하나만이 서 있었다.
크기가 어찌나 크던지, 보통의 마차를 두 마리나 네 마리 정도의 말이 끄는 것과는 달리 여덟 마리가, 그것도 일반 말이 아닌 전마가 마차에 매여 있었다.
“미장 어, 아니, 원로 어르신.”
“네. 말씀하십시오.”
“이, 이게 무엇입니까?”
주명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보고도 모르냐는 말을 시선으로 던진 주명윤이 이어지는 말은 부드럽게 흘렸다.
“마차지요.”
“이걸 타고 갑니까? 어제 분명 마차를 두 대 준비하신다고.”
“아아. 네. 분명 그러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왜인지 마차 한 대에는 저 혼자 타고 갈 것만 같은 기묘한 예감이 들지 않겠습니까.”
“……아.”
“그래서 아무래도 불길하길래 커다란 마차로 준비했습니다. 무게감 있는 마차라 다른 마차들보다 더 편하실 겁니다.”
“아, 네.”
“세화야, 너도 어서 타거라.”
고개를 끄덕인 세화가 먼저 마차에 오르자 곧 실망한 얼굴의 백기하도 뒤를 따랐다.
여덟 마리의 전마 덕분인지 엄청난 크기에도 마차의 속도는 전혀 느리지 않았다.
가는 동안 마차 안에서는 한마디의 말도 오가지 않았다.
세화만 중간에 창문을 열어 보고선 “참석하는 이가 많나 봐요.” 하고 말했다.
신영을 향한 주가 혈족들의 자부심은 남달랐으나, 주가 권역 내에서는 워낙 연회가 잦았기에 신영께서 친히 주관하시는 연회라 해도 꼭 모든 이들이 참석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백가주의 환영연이라 하니 다들 궁금해 모여드는 듯했다.
그 추측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가에서 가장 위용 넘치고 거대한 신영의 저택 근처에 이르러서는 길이 막혀 제대로 나아가지도 못할 정도였다.
“오늘 무슨 일이 있으면.”
백기하가 마차에 탄 뒤 처음으로 세화에게 말을 걸었다.
“내 옆으로 와. 핑계야 뭐든 상관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