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걸 다 파시겠다고요?”
“맞아.”
“하, 하지만-.”
행수의 눈빛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이건 소가주님께서 보내신 선물이잖습니까. 그런 걸 파시면-.”
세화가 착잡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라고 어찌 소가주님께서 보내신 물품을 돈으로 바꾸는 일이 기꺼울까. 그럴 수밖에 없어 하는 일이니 이해하게.”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요?”
“내 아까 내 탈피 때 있었던 일들을 다 말해 주지 않았는가.”
“그러셨지요.”
“그때 어떤 분께서 우연히 길을 지나다 탈피하는 날 보고 도와주셨다고 말하기도 했고.”
“네.”
“그분이 바로 백가주시네.”
“……네?”
“지금 뭐라고……. 백가주, 그 신수 백기하 님 말씀입니까?”
“그래.”
“헉!”
“에구머니나!”
“어떻게 그런 일이!”
“신영과의 중대한 회담을 위해 이곳에 오고 계신 중이셨다더군.”
“세상에. 어찌 그런 우연이 다 있답니까.”
“그분도 대단하시군요. 십 년 동안 그리 치열하게 맞부딪쳤었는데도 탈피를 도와주시고 말입니다.”
“그러니 물어보는 거지만. 소가주님께서 내 은인을 위해 이 선물들을 보내 주신 것인데, 내가 가져서야 되겠나. 빠짐없이 백가주께 선물로 드려야지.”
세화가 그들의 감탄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헌데 그분은 신영과의 회담이 끝나면 돌아가셔야 하지 않나. 그런 분이 홀로 이 많은 것들을 어찌 가져가시겠는가. 그러니 이동이 간편한 현물로 바꿔 드리려는 것이네.”
일리 있는 말이었다.
표정이 편안해진 행수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이것을 전부 가져가 내일까지 돈으로 바꿔오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영단을 구할 수도 있나?”
“네?! 영, 영단은 신영의 허가가 없으면 취급할 수 없습니다.”
“그건 주가 내부에서나 그렇지. 백가주께선 곧 백가로 돌아가실 몸인데 뭐가 어때서 그래.”
“…….”
“돈으로 드린다 한들 그 많은 것을 어찌 들고 가시겠어. 하여 가볍게 소지하실 수 있는 것을 고민하다 보니 영단에 생각이 미친 것이네.”
“하지만…….”
“자네는 주가에서만 장사를 하는 게 아니라 환계 전역을 돌며 장사를 하는 이가 아닌가. 육가 연합의 장에게 잘 보여 나쁠 것은 없잖아.”
입을 다물기 시작한 행수를 보며 세화가 한 번 더 재촉했다.
“그러니 영단으로 가져와 보게. 우리도 주가의 체면이 있지. 이왕이면 백가주께서도 흡족해하실 만한 그런 선물을 해야 하지 않겠나. 내가 드리면서 자네 얘기를 그분께 꼭 하겠네.”
“아, 알겠습니다. 사실 영단이라면 가진 것이 몇 개 있습니다. 바로 가져올 수 있으니 차라리 오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지.”
“그래도 제가 영단으로 드렸다는 말씀은 꼭 비밀로 해 주셔야 합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행수의 대답에 눈을 빛낸 세화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리하여 늦은 밤이 되기 전, 세화의 앞에는 동글동글한 작은 자갈 모양의 반짝반짝한 영단이 네 개나 놓였다. 강가의 영력을 담은 영단이었다.
조그마한 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향낭에 잘 담아 허리에 찬 세화가 분주한 방 안을 돌아보았다.
모레 있을 연회 준비만으로도 바쁠 텐데 자매들은 백가행의 짐까지 꾸리느라 정신이 없는 듯했다.
신영이 마음을 바꿀 것이라 말을 해 두었음에도, 혹 급히 떠나게 될 때를 대비해 최소한의 것이라도 준비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채야. 내 금은 어디 있어?”
“금이요? 상관에 두셨어요. 가져올까요?”
“응. 그것도 짐에 챙겨 줘.”
고개를 끄덕이고 오래지 않아 금이 든 궤가 들어왔다.
이 금을 다시 보는 것도 십칠 년 만이건만.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은 그녀만이라는 걸 증명하듯, 금은 며칠 전에도 꺼냈던 것처럼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오래도록 켜지 않았는데 잘 될까?’
현 위에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올린 그녀가 외우고 있던 가장 쉬운 곡을 시작해 보았다.
처음 몇 번은 정신없이 바쁜 세 자매가 의아해하며 돌아볼 정도로 엉망이었으나 곧 제법 기억이 났다.
물론 예전에 연주하던 것만큼 아름다운 소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들려줘도 되지 않을까.’
잘하는 모습만 보여 주고 싶지만, 아무리 엉망이라 한들 그는 웃지 않을 것 같았다.
밤이 깊어지자 세화는 향낭을 찬 채 금이 들어 있는 궤를 끌어안고 방을 나섰다.
오늘 종일 바빴던 세 자매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발소리를 죽인 채였다.
방에서 조금 멀어지자마자 차분하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때와 똑같이 정원수들을 지나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곧 연꽃이 가득한 커다란 연못과 정자가 시야에 담겼다. 아스라한 물안개가 정자까지 가는 길을 뒤덮고 있었다.
조심조심 걸어 정자 안에 앉은 세화가 긴장한 채로 잠시 시간을 보냈다.
분명 또 불쑥 나타날 누군가를 기다리며.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나직이 “백기하.” 하고 불러 봐도 마찬가지였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낮은 바람 소리나 풀벌레의 울음소리뿐이었다.
‘나도 참. 약속도 하지 않아 놓고는 너무 당연한 듯 나를 또 만나러 쫓아올 거라 생각한 건가.’
그제야 그가 밤늦게까지 자신을 보고 싶어 쫓아올 거라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보였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오늘 오면 들려주려고 했는데.’
조금 아쉽긴 했으나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상자에서 금을 꺼낸 세화가 잘 조율된 현을 다시 한번 튕겨 보았다. 한참 헤매던 아까와는 달리 이번엔 첫 음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안개로 불투명해진 고즈넉한 달빛이 세화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 상태로 그녀의 기다란 손가락이 세심하게 아홉 현을 오갔다.
디링-. 딩-.
처음엔 손이 가는 대로 움직였지만 그다음부턴 오랫동안 연습했던 곡들이 기억이 났다.
‘맞아. 난 이렇게 연주하는 걸 참 좋아했었는데.’
전쟁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그랬다.
그녀가 부모님과 오라비들 앞에서 그날 배운 곡의 연주를 마치고 나면 그들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연주를 듣기라도 한 듯 박수 치고 환호를 보내 주었다.
이젠 기억조차 아스라해진 그 날의 추억들이 금 소리와 함께 먼 곳으로 떠내려갔다.
애처로운 소리가 물안개 가득한 정원의 정경과 제법 잘 어울렸다.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본 적 없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녀의 감정이 동요될수록 금 소리가 더 깊어졌다.
현들이 떨리며 높은음과 낮은음을 번갈아 뱉어 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진한 연꽃 향기가 정자 안에 가득 찼다.
어느 순간 작은 꽃잎이 날아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기분 좋게 현을 튕기던 그녀가 반사적으로 꽃잎이 날아간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
정자의 기둥에 기댄 채 그녀를 보고 있던 백기하와 눈이 마주쳤다.
금 소리가 멈췄다.
백기하의 깊고 검은 눈이 집요하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동안, 시선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듯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윽고 기둥에서 등을 뗀 그가 한 발 가까워졌다.
최면이 풀리듯 갑자기 부끄러워진 그녀가 깜짝 놀라 시선을 내렸다.
‘뭐야. 왔으면 왔다고 기별을 할 것이지.’
그래도 원하는 대로 금 연주를 들려줬으니 뭐라도 한마디 해 줄 법한데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에게 바짝 다가온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백기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등 뒤로 돌아가 그녀를 안았다.
아니, 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손이 닿는 곳은 그녀의 앞에 놓인 금이었다.
디링-.
그녀의 가느다란 손과 대비되는 커다란 손이 그녀가 한 것보다 조금 더 힘차게 현 위를 누볐다.
그녀의 손끝에서는 애절했던 현들이 이번엔 조금 더 강하고 단단한 음들을 쏟아 냈다.
넓은 가슴 안에 갇힌 채, 그녀는 금 위를 오가는 커다란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끝에는 활을 오래 잡은 이답게 상처와 굳은살의 흔적이 완연했다.
오랜 세월 전장을 오간 장수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가 연주하는 음에도 풍류 대신 기개와 위엄이 넘치는 듯했다.
등 뒤로 닿는 그의 가슴이 따뜻했다.
그의 호흡이 조금 빠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자각해 보니 자신의 것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족들을 구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을 거라 다짐했건만 자꾸 마음이 욕심을 낸다.
돌아서야 하는데.
돌아설 건데.
뜨거운 팔이 자신을 감싸 안을 때면 그냥 마주 끌어안고 싶어진다.
아마도 백가에서 버텼던 십이 년과 지하 감옥에서의 오 년 동안 너무 외로웠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렇게 스스로를 타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