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254)

한참 만에야 행수 중 하나가 “소가주님께서 그런…….” 하고 말을 흐렸다.

아무리 그래도 소가주님을 위해 그 무서운 육가 연합에 자원해서 떠나기로 한 분인데.

그런 분이 얼마나 두려움이 심하셨으면 전조도 없이 노상에서 탈피를 시작하셨을 것이며.

탈피가 끝나고도 일주일이나 깨어나지 못했다 하면 정말 목숨이 경각에 달렸었다는 건데.

아무리 신영의 명을 이행하는 일이 바쁘고 중요했다고는 하나 자기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은 아가씨를 그리 팽개치고 간 건 좀…….

……이라는 의미의 “소가주님께서 그런…….”인 것을 그곳에 있는 모두가 알아들었다.

“소가주님께는 방금의 말씀을 꼭. 그대로 전달 드릴 것입니다.”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진 시종이 서신을 도로 품에 안고는 홱 돌아섰다.

그들이 떠난 이후에도 세화의 표정이 여전히 좋지 않자 행수들이 마음을 달래 주려 상냥하게 권했다.

“저희가 가져온 물품들도 최상급의 것들뿐이니 그것들도 한번 보시지요.”

행수들이 저들끼리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내당으로 향했다.

세화가 그런 그들을 따라가며 눈짓하자, 영선이 사람들을 시켜 산더미처럼 쌓인 선물들을 내당으로 옮겼다.

“저걸 받게?”

“!”

그때 목소리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예기치 않은 이의 등장에 깜짝 놀란 세화가 그를 돌아봤다.

“계속 보고 있었어요?”

“……응.”

“그런데 받을 거냐니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왜? 그냥 돌려주는 게 낫지 않아?”

“아니, 뭐라고요?”

세화가 황당하게 보는 것을 알았으나 제법 가라앉은 백기하의 시선은 풀릴 줄을 몰랐다.

전각 기둥에 기대 그녀가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대체 그놈의 소가주님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나오는 것인지.

‘설마. 아직도 주경현을 신경 쓰고 있는 건가?’

물어보고 싶었으나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가 않았다.

만약 다시 끌린다 해도 절대 그렇게 대답하진 않겠지.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으니. 그 소가주와의 관계 역시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때였다.

찰싹!

“!”

“돌려주긴 뭘 돌려줘요? 뜯어낼 수 있는 건 다 뜯어낼 궁리를 하느라 머리가 아플 정도인데.”

파르르 화를 내며 반응하는 세화의 눈이 반짝반짝해서, 백기하는 상황도 잊고 잠시 그걸 멍하니 응시했다.

“나한테 그런 얘기할 생각 말아요. 저건 정당한 대가예요. 내 십칠 년에 대한. 알았어요?!”

“아, 알았어.”

“알았으면 어떻게 해야 뭐 하나라도 더 가져올 수 있을지 의견이라도 줘요. 그 소가주를 거지꼴로 만들어서 내가 들어갔던 밀실 감옥에 집어넣는 것이 내 목표니까.”

“밀실에 집어넣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똑같이, 아니 그 이상으로 갚아 줄 거예요. 그 고통을 내가 하나라도 잊을 줄 아냐고요.”

“…….”

“뭐예요?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워요? 내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요?”

“아니.”

그가 세화의 분홍빛 손끝을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금 매만졌다.

그녀가 어떤 고문을 당했을지 조금 짐작할 수 있던 그가 다시금 조용히 덧붙였다.

“잘 버텼다고.”

“…….”

“그 시간. 잘 버텼어.”

들을 때마다 눈꼬리주위가 일렁일렁해지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걸 알면 돌려주라는 말 같은 건 앞으로 하지 말아요.”

일부러 차가운 얼굴로 정면을 바라본 세화가 그보다 한발 앞서 걸었다.

* * *

“그 아이가 정말 그리 말했단 말이냐.”

“예, 소가주님.”

서신조차 받지 않으셨다고 시종이 제 품 안에 있던 것을 도로 내밀었다.

“허.”

그 많은 사람 앞에서 그 일을 다 까발렸다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와중에도 탈피를 도와준 이의 사례까지 요구하는 것이 제법 흡족해서 문제였다.

그것은 보통 탈피 전에 혼약한 이들의 의무였기 때문이었다.

‘내게 원망을 토해 내면서도 사실은 다시 혼약자가 되길 원하는 건가?’

이런 행동을 발칙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래도 여지를 보이는 것에 마음을 풀고 더 다가가야 하는지.

그때였다.

“소가주님.”

조용히 방안으로 들어온 누군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왔느냐.”

“네. 왜 이렇게 안색이 좋지 않으시어요? 무슨 염려할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다. 너 신경 쓸 것 없어.”

“그래도요. 소가주님의 건강은 경현 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계시지요? 이리 피곤한 얼굴을 하시면 서월은 너무 걱정됩니다.”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그래도 걱정을 해 주니 고맙구나.”

“전에 그 세화 언니의 사촌 동생이 안마를 잘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아이를 불러다 시중을 들게 시키면 어떨까요?”

“그렇지 않아도 이미 그 아이를 데려오라 호위를 보냈다.”

그 말에 서월의 표정이 잠깐 변했다가 돌아왔다.

“그럼 아무도 없을 때는 서월이 잠시 소가주님을 안마해 드릴게요. 누가 오면 그러지 못하겠지만요.”

“되었다. 발소리만 나도 파드득 놀라 도망칠 거면서. 뭘 하겠단 거냐.”

“그렇지만 소가주님께서는 세화 언니와 혼약하실 것 아닙니까. 서월을 혼약자로 삼아 주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괜한 오해를 받아 서월이 평생 혼자 살게 되면 어떻게 책임져 주시려고요.”

“내 그러니 그만두라 하지 않았더냐.”

주경현의 말에 서월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소가주님이 걱정되는걸요. 서월이 고민 상담이라도 해 드릴까요? 어찌 그리 안색이 어두우신지. 서월이 듣고 나면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

“저도 들었어요. 세화 언니가 백가에 대신 가기로 했다지요? 소가주님께서는 그게 걱정되시는 거고요.”

“너 그건 어디서 들었느냐.”

“네?”

“어디서 들었느냐 묻고 있지 않아!”

“소, 소가주님.”

“어서 대답해 보래도!”

“……모, 모두가 그렇게 떠듭니다! 벌써 며칠 되었습니다.”

“뭐라고?”

“벌써 한참 된 것을요. 다들 똑같은 말로 떠드니 어디서 들었느냐 물으셔도 대답해 드릴 수가…….”

청초하고 순한 인상의 눈꼬리가 삽시간에 맑은 눈물을 방울방울 뿌려 댔다.

“서월이 무얼 잘못한 것입니까? 서월은 그저 소가주님의 염려를 살펴 드리려고.”

“벌써 한참이나, 그 말들을 모두가 떠들고 있다 하였느냐.”

“네. 서월도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길래-.”

주경현이 나직이 턱짓하자 호위인 천령이 나타나 부복했다.

“대체 저 백가행 얘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아 와. 어디까지 퍼졌는지도.”

“예.”

“신영께 얘기가 들어가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 알겠느냐!”

결연한 얼굴을 한 천령이 방을 나가자마자 주경현은 여전히 제 앞에 부복하고 있던 시종마저 손을 내저어 내보냈다.

눈물을 닦은 소녀가 천천히 주경현에게로 다가왔다.

“세화 언니를 너무 탓하지 마세요. 언니도 너무 놀라다 보니 누군가에게라도 상담하고 싶어서 얘기한 것이겠지요.”

가늘고 긴 손가락이 주경현의 뒤로 돌아와 비단으로 싸인 두터운 어깨를 주물렀다.

“그래도 그렇게 일찍부터 사람들에게 얘기한 건 언니가 잘못하긴 했지만요. 소가주님께서도 머리가 아프시겠어요.”

“아니다. 그리 예전에 퍼졌다면 세화가 한 게 아닐 거야.”

“네?”

“그 아이는 그때 인계에 있었거든. 세화가 만났던 탈피 못 한 어린 일족들 또한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고 말이야.”

“그래도, 세화 언니가 돌아오신 지도 좀 되셨잖아요. 벌써 한 주는 되었으니.”

“그렇지 않아. 그 아이는 탈피 후유증으로 일주일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다.”

“…….”

“분명 어떤 간악한 것들이 일찌감치 인계에서 환계로 넘어와 퍼뜨린 것일 터다. 그것들을 모두 잡아야지.”

“……아, 그렇군요. 허면 모레 있을 연회에서는 세화 언니와 함께 입장하시는 것입니까?”

“뭐 괜한 소문들을 잠재우려면 그래야겠지.”

“…….”

“그 전에 일단 그 아이의 마음을 풀어 주어야겠군. 여봐라. 거기 누구 있느냐.”

“네, 소가주님.”

경현의 부름에 문 앞을 지키던 시종이 곧장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보낸 것과 같은 귀물들을 그 아이에게 적당히 더 보내 주거라. 오늘 안으로 진행하여야 한다.”

경현의 목 뒤를 타고 올라가 관자놀이를 부드럽게 매만지던 손가락이 깜짝 놀라며 멈춰 섰다.

“어찌 한 번 보내셨는데 또 보내신 답니까?”

질문이 귀찮아지기 시작한 주경현이 손을 내젓자 청초한 얼굴의 소녀가 아쉬운 얼굴로 멀어졌다.

“이따 저녁 드실 때 또 찾아와도 되지요?”

“귀찮다. 혼자 먹거라.”

“늘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같이 먹게 해 주시면서.”

방긋방긋 귀엽게도 웃은 소녀가 이따 다시 오겠다며 방을 나갔다.

인상을 쓰고 있던 주경현도 그 귀여운 모습에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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