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254)

멈춰선 행수들의 코끝으로 달큼하면서도 청량한 향이 밀어닥쳤다.

창밖을 가득 메운 불두화의 향은 분명 아닌데 대체 이 진한 향기는 무엇일까.

목이 마른 것도 아닌데 연신 마른침이 넘어갔다.

영력의 차이에서 오는 압박감을 느낀 것이었으나 행수들은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뭐죠? 어찌 원로 가문의 아가씨를 보고 인사도 하지 않는 거죠?”

“아, 송구합니다. 아가씨께서 너무 아름다우셔서 그만. 실례를 범했습니다.”

“맞습니다. 이토록 눈이 부시는 모습으로 탈피를 마치셨을 줄이야. 정말 경하드립니다.”

“감축드립니다. 빛보다 밝은 행복만이 아가씨의 앞날에 가득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세화의 뒤에 서 있던 영무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행수들이 그제야 혼이 돌아온 것처럼 앞다투어 축하의 말과 기원들을 쏟아냈다.

자기들끼리 마주치는 눈빛 안에서 경탄과 의문이 분주했다.

환족은 몸 안의 영력이 많을수록 아름다운 외형을 가지니.

혼을 쏙 빼놓듯 눈이 부신 저 아가씨의 미모라면 신수에 범접할 만한 영력을 가진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명윤 원로님께서도, 장부인께서도 아름답긴 하셨으나 이 정도는 아니셨는데. 저 아가씨는 대체.’

섣부른 추측을 내보일 수 없는 행수들은 얼굴을 밝게 풀어 둔 채 자신들이 가져온 최고급 원단과 장신구들을 꺼내 놓았다.

“달콤한 매화색이나 화려한 석류 빛깔도 그렇고, 투명한 옥빛이나 화사한 노랑도 어찌 이리 다 잘 어울리실까요.”

세 자매가 천들을 집어 들고 제 아가씨의 얼굴 가까이에 대보며 바쁘게 움직였다.

그때였다.

“나도 여기 있어도 돼?”

누군가가 내당 문간에 나타났다.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던 행수들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맙소사. 이분은 또 누구신가.’

새롭게 나타난 사내를 본 이들이 입을 떡 벌렸다.

사내는 빛 한 점 들어갈 곳 없이 새까만 머리카락을 묶지 않고 풀어 놓은 상태였다.

느슨하게 허리를 묶은 단출한 차림이나 편안히 서 있는 자세에선 그의 느긋한 성격을 읽어 낼 수 있었으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장포로도 가려지지 않는 다부진 근육이 선명한 몸.

전신에서 느껴지는 위용.

그 모든 것들에서 그가 대단한 장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한데도 옥과 같은 얼굴에는 조금의 흠도 없었다.

사내 치고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빛이 비치면 마치 깊은 심해처럼 조금 푸르러 지는 눈동자로 응시할 때면 사내와 여인을 가리지 않고 저절로 한숨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어, 어쩌면 이렇게도 잘난 사내가 있을 수 있지?’

그는 대답도 떨어지지 않았건만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당연한 듯 의자를 가져와 세화의 옆에 앉았다.

“나 아직 괜찮다고 안 했는데요.”

“허락해 줘.”

그렇게 말하는 백기하의 얼굴에서 약간의 초조함이 엿보이는 듯해 세화가 나직이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응?”

“표정이 안 좋아요.”

“…….”

“뭔데요.”

“그게.”

그의 대답보다 먼저 한 시종이 나타나 그녀에게 뭔가를 고했다.

“아가씨. 소가주님께서 탈피 축하 선물을 보내오셨는데 이쪽으로 가져올까요?”

* * *

어마어마한 함과 궤짝들이 마당을 가득 메우며 쌓여 갔다.

질 좋은 비단과 면포, 영롱한 색의 장신구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최상급의 것이었다.

소가주의 선물이란 말에 슬쩍 따라 나왔던 행수들도 연신 감탄을 쏟아 냈다.

“세상에. 소가주님께서 아가씨를 아끼신다는 걸 소문으로 전해 듣긴 했지만, 그 이상이었네요.”

“아가씨께선 정말 좋으시겠습니다. 차대 신영께서 이리 귀히 여겨 주시다니요.”

“맞습니다. 이런 대접을 받으시는 건 전 환계를 통틀어 아가씨밖에 없으실 겁니다.”

“그렇습니까?”

주세화가 쓸쓸히 대답하자 행수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그러십니까. 이 선물들이 혹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

“…….”

침묵을 지키는 그녀에게 선물들을 가져온 시종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소가주님께서 함께 보내신 서신입니다. 읽어 보시고 그분의 마음에 대한 전언을 내어 주시면-.”

세화가 시종의 말을 막으며 대답했다.

“서신은 됐고, 가서 소가주님께 전하거라. 내가 그분께 이 정도밖에는 안 되는 존재였는지. 이 선물로 증명된 그분의 마음 안쪽, 나의 존재감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고 속이 상해 잠도 제대로 오지 않을 것 같다고.”

“……예?”

이게 무슨 말이지?

시종이 잠시 굳어졌다. 행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응? 아니, 최고급 물품들을 이토록 산더미처럼 보내오셨는데. 이 아가씨께선 이것으로도 만족이 안 되신단 말이야?’

‘남들은 몇 가지 가져 보기도 힘들 정도로 귀한 것들이건만. 욕심이 너무 과하신 것 아닌가.’

‘아무리 성품 좋기로 유명하고 자상하신 그 소가주님이라 하셔도 저런 말엔 화가 나시지 않을까?’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돌아선 세화가 행수들과 시종을 향해 애석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들 모두 한번 들어 보게. 모두가 육가 연합에서 실종 사건의 책임자로 소가주님을 지목해 백가로 초청한 것은 익히 알고 있을 걸세.”

“그, 그렇지요.”

“헌데 어찌 그런 자리에 우리 귀하신 소가주님을 가시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말이 되나?”

백가행에 대한 소식이야 워낙 일파만파 퍼져 나간 상태이니 환계에서 그 일을 모르는 이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렇지만 뜬금없이 이 얘기가 왜 나오지?

갑작스레 전환된 화제를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행수들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육가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그래서 신영께 내가 대신 가겠다고 청을 올린 상태네. 신영께서도 허락하셨고.”

“예?!”

“헉. 아가씨께서 가신단 말씀입니까? 그 자리에?”

“아가씨, 육가의 폭도들이 지금 흉흉한 눈을 하고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어리신 아가씨께서 어찌 그런 곳에 자원해서 가신단 말씀입니까?”

“맞습니다. 재고해 보십시오!”

세화가 처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내 한목숨보다 소가주님이 더 중요하네. 그랬기에 내가 백가행에 오르겠다고 말씀드린 것이고.”

“세상에.”

행수들을 위시해, 주변에 모여 있던 환족 시종들의 눈에 경탄이 서렸다.

저리 어린 아가씨가, 저런 기백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아가씨. 정말 대단하십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큰 결심을 하셨습니다.”

세화가 쓸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나라고 어찌 백가행이 두렵지 않겠는가. 아무리 소가주님을 위해, 소가주님 대신 떠나는 것이라 하여도 두려운 것은 두려운 것이지.”

그녀의 아스라한 목소리에 세화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동정으로 짠하게 흐려졌다.

“소가주님을 위한 백가행이고, 나 자신이 그분을 위해 결정한 일인 만큼 두려움을 보이지 말고 당당히 다녀오자, 스스로를 얼마나 다그쳤는지. 허나 그게 어찌 마음대로 되는 것이겠는가. 나도 아직 어린것을.”

“그렇지요. 맞습니다.”

“하여 소가주님을 위한 백가행이 결정된 이후로 나는 물 한 모금 넘기기가 힘들고, 입맛이 없어 식사도 제대로 한 적이 없네. 기껏해야 약탕이나 몇 번 삼켰을 뿐.”

“……세상에.”

“저런…….”

짧은 시간, 이미 ‘소가주 대신 가는 백가행’이라는 이야기를 열 번도 더 들은 행수들이 안타까움에 두 손을 맞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소가주님 대신 떠날 백가행이 어찌나 나를 힘들게 하였는지, 오죽하면 전조도 없이 길에서 탈피를 시작하지 않았겠는가. 얼마나 위험했던지 탈피가 끝나고도 일주일이나 깨어나지 못했었고 말이야.”

그 말에 행수들도, 시종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환계의 어중이떠중이들도 그런 식으로 탈피를 하진 않을 것이다.

“……맙소사.”

“어찌 원로 가문의 아가씨께서 그런 일을 겪으셨는지.”

참 다행이라고. 무사히 깨어나셔서 너무 다행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행수들에게 세화는 그게 끝이 아니라며 덧붙였다.

“헌데 그때 마침 소가주님께서 지나가시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내 시녀가 그분께 나의 탈피를 도와주십사 간곡히 부탁드렸지.”

주변의 이들은 이제 이 이야기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몹시 흥미진진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세상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이 아가씨의 탈피에 그런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을 몰랐었으니까.

게다가 탈피 때, 마침 소가주님께서 지나가셨다니.

‘그렇게 극적인 일이 다 있나!’

‘그래서 거기서 서로에 대한 연심이 더욱 단단히 굳어지신 건가?’

“그분이 위험한 나를 그냥 지나치실 줄도 모르고 말이야. 그분 대신 백가행을 자원한 나를.”

“네?”

“헉. 소가주님께서 탈피하시는 아가씨를 두고 그냥 지나쳐 가셨다고요?!”

“그래. 헌데 그분은 그때 그러실 수밖에 없었어. 신영께서 명하신 중요한 일을 처리하시고 계셨거든.”

“아.”

‘그래도 그건 좀…….’ 하는 마음이 포함된 신음이 듣는 이들의 입에서 조금씩 흘러나왔다.

“어쨌거나 그분은 그렇게 그분 대신 백가행에 자원한 나를 돕지 못하시는 대신 그분을 대신해 나의 탈피를 도와주는 이에게 큰 선물을 내리시기로 하셨지. 나에게도 따로 꼭, 서운하지 않을 만큼 마음을 보여 주겠다 하셨고.”

“그, 그러셨군요.”

“다행히 나는 지나가던 환족 중 한 분이 도와주시어 목숨만은 건졌지. 그래서 물어보는 거지만 자네들은 소가주님께서 보내 주신 이 선물들이 내게 과분해 보이는가?”

“…….”

“…….”

모든 이들이 이 질문에 침묵을 지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