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모두 백기하의 탓으로 돌리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러면 신영께 그리 꾸지람을 듣지 않으셔도 되셨을 텐데요.”
호위인 천령이 침통한 표정을 하고 조언했다.
주경현도 본래는 백기하에게 모두 뒤집어씌울 생각이긴 했다. 없는 일 몇 개 만들어 내어 책임을 회피하는 게 뭐 그리 어렵겠는가.
하지만 한 가지 새롭게 알게 된 일이 너무나 신경 쓰여 아버지께 물어볼까 말까를 고민하느라 시기를 놓쳐 버렸다.
‘아버지께서 정말 세화 그 아이와 백가주의 혼인 동맹을 추진하시는 걸까?’
“소가주님?”
“응? 아, 되었다. 내가 세화 그 아이의 탈피를 돕지 못한 것은 사실인 것을. 뭐 하러 다른 이의 이름을 들먹이겠느냐.”
그래.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이야 언제라도 할 수 있는데.
한 번은 참았다가 뒤에 시도한다면 오히려 허물을 덮어 주려 했던 거라 칭송받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게 어찌 소가주님의 잘못이란 말씀입니까.”
“그건 그렇긴 하지. 내가 일부러 그 아이의 탈피를 외면했느냐. 빨리 백기하를 먼저 만나야만 했으니, 갈 길이 너무 바빠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것을.”
“맞습니다. 그렇지요.”
“내가 탈피를 돕다 신영께서 시키신 일이 늦어지기라도 하면, 세화 그 아이 역시 신영께 크게 꾸지람을 들었을 것 아니냐.”
주경현이 허공을 향해 한숨을 쉬고 덧붙였다.
“그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피해 주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외면한 것을.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천령이 너밖에 없구나.”
“저야 소가주님의 훌륭한 성품에 늘 감탄하며 주인으로 모시기로 결심했으니까요.”
“그래. 고맙구나. ……그나저나 천령아. 신영께서, 아버지께서 정말로 세화 그 아이와 백가주를 혼인시키려 하셨느냐?”
“제 목을 걸고 사실입니다.”
“헌데 갑자기 백가주를 왜 그 아이에게?”
“짧은 제 생각으로, 세화 아가씨는 명윤 원로의 말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잘 따르시지 않습니까. 명윤 원로는 절대 신영의 권위에 도전할 자는 되지 못하고요.”
“…….”
“세화 아가씨는 신영의 핏줄이기도 하여 백가주도 함부로 하진 못할 테니, 일단 혼인으로 엮어 백가주의 우위에 서려 하신 것 아니겠습…….”
“뭐라고?! 그게 무슨 망발이냐!”
주경현이 거세게 소리쳤다.
“감히 환계의 지배자, 주가의 신영께서 그런 일이 아니라면 백가주의 위에 서지 못하신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네놈이 신영의 존엄을 훼손하려는 것이냐!”
그제야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깨닫고 안색이 변한 천령이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부복했다.
“실언하였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다음에 또 그따위 망발을 입에 담는다면 혀를 뽑고 목을 잘라 본보기를 보일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몇 번이고 고두한 천령이 창백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찬 주경현이 냉랭하게 몸을 돌려 걸어갔다.
“내가 관대하여 그런 망발을 용서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넌 이미 살아 있지 못할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송구합니다.”
“그래. 입조심을 더욱 단단히 하도록 하고. 그리고 그 아이가 그것을 무른 것은 확실한 것이지?”
“네?”
“세화와 백가주의 혼인 동맹 말이다.”
“아, 네. 제가 삼보관을 통해 들은 것입니다. 감히 신영의 말씀에 불복한 것은 괘씸하지만 이유가 납득이 가는 것이어서 신영께서 허락하셨다 합니다.”
주경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백기하가 그 아이의 탈피를 도우러 간 것도 확실히 이상하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이를 위해 말이야.’
그의 표정은 조금 찌푸려진 정도였으나 가슴 안쪽에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렇게 치면 뜬금없이 이곳에 온 것이 제일 이상해. 혹 아버지와 혼인 동맹에 대해 모종의 거래를 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닐까?’
수많은 의심과 추측들이 보이지 않는 낙엽처럼 켜켜이 휘몰아치며 쌓이고 있었다.
‘나도 처음엔 날 끌고 가기 위해 온 것인가 했지만. 그랬다면 저토록 세화에게만 붙어 모습을 보이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그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세화 그 아이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것도, 투기 때문이 아니라 백기하와 혼약하게 된다 하여 날 밀어내려는 것이었나? 아니면 원하지 않는 이와 강제로 혼인해야 하는 것에서 온 충격 때문에?’
한데 그 많은 생각들은 항상 이상한 방향으로 결론이 나고 있었다.
‘그 아이 말고, 다른 누구를 보낼 수는 없는 걸까?’
생각해 보면 누군가 대체할 만한 인물이 있을 것 같은데.
‘굳이 어린 종족들이 갈 필요 있나? 주명윤 역시 신영의 피를 이었는데. 오히려 실종 사건의 책임자라 하면 그가 더 믿음직스럽지.’
주경현의 시선이 탈피한 그녀와 마주쳤던 그 시간을 더듬었다.
창호 문 바깥으로 비쳐 보이던 그림자마저 어찌나 아름답던지.
천천히 걸어온 그림자가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놀람과 충격을 그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반을 늘어뜨린 풍성한 머리카락과 대비되던 희고 가느다란 목.
부드러운 어깨선 아래로 보이는 굴곡이 완벽한 쇄골과 하얀 피부.
진한 검은색이어야 할 눈동자가 마치 잘 익은 포도알처럼 싱그러운 검자줏빛을 띄고 있었지.
햇빛에 비친 그 눈동자가 반짝이던 모습을 생각하면 목이 바짝 타는 것 같았다.
투명하고 청초한 외면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적룡의 기질을 그대로 받은 듯한 불꽃 같은 뜨거움과 화려한 아름다움이 그대로 녹아 있던…….
“……주님. 소가주님.”
“뭐냐.”
“아니면 혹시 세화 아가씨께 선물을 보내 보시면 어떠십니까.”
“선물?”
“네. 탈피를 축하한다는 의미에서요.”
그 말에 주경현도 제 실수를 알아차렸다.
그랬지. 탈피 축하 선물을 보내야 하는데 그것을 깜빡하였다.
“넉넉하게 보내시면 소가주님께서 이렇게 마음을 써 주신다는 데 세화 아가씨도 분명 감격할 것입니다. 다른 이들 역시도 소가주께서 세화 아가씨의 탈피를 돕지 않고 돌아섰다는 이야기가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할 거고요.”
주경현의 안색이 모처럼 밝아졌다.
“그래. 그게 좋겠다.”
호위의 어깨를 두드린 주경현이 어딘가로 빠르게 걸어갔다.
* * *
그날 주명윤은 주가 영지 내에서 활동하는 상단의 행수들을 불러 모았다.
탈피 이후, 키와 체형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예전에 입던 옷들은 미묘하게 품이 맞지 않았다.
주가 권역에서 가장 존경받는 원로 어른을 위해 상단 행수들이 서신을 받자마자 두말 않고 달려왔다.
긴 수레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세화가 머무는 내당으로 들이닥쳤다.
다른 가문들에 비해 씀씀이가 월등히 큰 주가 일원들은 행수들에게 늘 귀중한 거래 상대였다.
지금처럼 전쟁 배상금을 어마어마하게 지불하게 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연회를 위한 예복 주문은 끊이지 않았고 새롭고 귀한 장신구들을 찾는 손길들도 여전했다.
탈피하지 못한 어린 환족들은 아예 인간계로 넘어가 전쟁과는 상관없이 연회를 즐겼고 말이다.
그런 와중에도 명윤 원로의 여식은 꽁꽁 숨겨 놓은 듯 모습을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다.
반편이니, 쭉정이니, 온갖 소문이 난무한 속에서도 조용하더니 이젠 탈피를 했다고?
지금껏 감춰져 있던 소문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에, 엇비슷하게 도착한 세 행수들은 옥신각신하면서도 서둘러 내당에 발을 디뎠다.
그 순간이었다.
“어서들 오게.”
그들이 인사도 하기 전에 누군가 먼저 말을 건네 왔다.
내당의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던 이들의 발걸음이 그대로 멎었다.
“……어.”
그 짤막한 신음이 다였다.
그들은 더 이상 발을 내딛지도 못한 채 문간에 서서 숨을 삼켰다.
‘뭐, 뭐지, 이분은.’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방 안은 온통 밝고 화사했으나, 그 안에 옥빛 의복을 입고 앉아 있는 사람은 더 하얗고 화사했다.
유려한 얼굴선은 신이 공들여 빚어낸 듯 비율이 완벽했고, 그 안에 오밀조밀 담긴 이목구비는 보는 이를 홀려 내듯 아름다우면서도 기묘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장신구라고는 머리에 꽂은 가느다란 옥비녀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투명한 피부와 매끄러운 목선, 색이 분명한 입술만으로도 이 방 안의 무엇보다 화려하고 반짝였다.
창을 타고 들어온 햇빛이 비친 눈은, 마치 오래도록 묵힌 귀한 포도주만큼이나 아름답고 탐스러운 빛깔로 빛나고 있었다.
손을 들어 올리는 동작 하나부터, 머리를 살짝 기울이는 모습까지.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우아하고 고혹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