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254)

* * *

이튿날엔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건 또다시 주명윤과 주세화, 백기하 셋이 함께 아침 식사를 하던 중의 일이었다.

“참 그렇지. 세화 네 옷들을 다시 맞춰야겠구나.”

주명윤이 미리 준비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덧붙였다.

“하지만 오히려 탈피 이후에 맞추는 게 더 잘된 일일 수도 있을 게다. 아니었다면 분명 적룡의 색으로만 옷을 지었을 테니.”

탈피를 마친 주가의 혈족들이 가장 선호하는 색상은 시조, 적룡의 색인 붉은색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화의 모습은 붉은색도 물론 잘 어울릴 테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부드럽고 청량한 느낌의 색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흰색은 어떠십니까.”

백기하가 그렇게 끼어든 탓에 잠시 또 약간의 말다툼이 있었지만.

“흰색도 뭐, 백가의 색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나쁘지는 않지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주명윤이 전날보다 백기하에게 유한 모습을 보이던 그때였다.

“……뭐라고?”

“경계선 초소에 백가 기마단이 방문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고 있다 합니다.”

‘기마단? 갑자기?’

무사 하나가 급히 알려 온 소식에 세화와 명윤의 시선이 백기하에게 향했다.

백기하가 무사에게 물었다.

“기마단이라니. 대체 몇 명이나 온 거냐.”

무사가 주명윤의 눈을 한 번 보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대답했다.

“숨은 호위가 더 있을 수도 있지만 일단 알려 온 것으로는 쉰세 명입니다.”

“쉰, 셋? 호위 대여섯이 아니고 쉰셋?!”

“네.”

“그 기마단을 이끄는 자가 누구라더냐.”

“백가 재상 백만용입니다.”

“……우리 만용이가 또.”

잠시 눈을 감고 허탈하게 뭔가를 중얼거린 백기하가 주명윤을 보며 조언했다.

“통과시키지 마시지요.”

“…….”

“이런 때에 기마단 전체를 이끌고 오다니. 분란만 만들거나 주가 영지 전체를 번잡스럽게 할 것입니다. 엉덩이를 걷어차 내쫓으셔야 합니다.”

“…….”

‘……뭐지.’

아무리 봐도 홀로 적진에 들어와 있는 이 가주를 걱정해 달려온 충정스러운 수하 같은데.

‘뭐 이런 성의 없는 반응이 다 있지. 가주란 제 수하에게 다 이런가.’

어쩐지 백가 재상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 것이다.

주명윤의 짜게 식은 눈빛이 백기하를 향했다.

하지만 백기하는 진심이었다.

“호위라고요? 호송이 아니라요?”

“가주! 어찌 원수 같은 주가의 후계자를 친히 마중하려 하십니까!”

‘안 돼. 만용이가 오면 일이 더 복잡해진다.’

백기하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날 탐탁지 않아 하시는데. 여기서 만용이가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못하고 떠들다가 정말 미장 어른께서 날 내치시게 되면 어떡하라고.’

“어서, 어서 가서 전해라. 영지 경계선을 한 발자국도 통과시키지 말고 모두 백가 영지로 다시 쫓아 버리라고.”

백기하의 목소리에 무사의 당혹스러운 시선이 주명윤에게로 향했다.

주명윤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신영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주가의 영지 안에서 백가의 기마단이 마음대로 활보하고 다니는 것을 지금 같은 상황에 누가 환영하겠습니까.”

“…….”

“그러니 미장 어른께서 먼저…… 하하. 뚫어지겠습니다. 호칭 바꾸겠습니다. 원로 어르신께서 먼저 백가 기마단을 천 리 밖으로 내쫓으시고 신영께 보고하시지요. 신영께서도 대단히 잘했다고 칭찬을 마지않으실 것입니다.”

“뭐 찔리는 것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네?”

“백가 재상이라 하면 백가주를 보필하는 최측근 아닙니까. 그런 이를 이토록 결사적으로 쫓아내시려고 하는 것을 보아 말입니다.”

노장의 날카로운 시선이 백가주의 면면을 주시했다.

“혹,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들이 퍼질까 봐 경계하시는 건 아닙니까.”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처럼 투명한 사내가 또 없습니다.”

예리한 질문에 백기하의 평온한 표정 아래로 시선이 흔들렸다.

그건 너무 당연한 말 아닌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당연히 주가에 대해 좋은 말이 오갈 시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만용이의 입에서 그들이 나눴던 대화가 새어 나오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태산이었다.

주명윤은 이렇듯 가까이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에 대해 제법 좋은 인상을 받았었던 듯하지만, 백기하는 주가 전체에 손톱만큼도 좋은 인상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여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이맘때. 그의 최측근인 백가 재상 백만용과 입이 아플 정도로 주가 일원들에 대해 욕을 퍼부어 대곤 했으니.

한 번 화가 나면 불보다 무섭게 분노를 터뜨리는 백기하는 자신의 과거들을 생각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쨌거나 지금 재상이 와 봐야 좋을 것이 없다.

“어쨌거나 그러면 제가 직접 신영을 뵙고, 그들의 엉덩이를 걷어차시라고 간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백기하가 생략된 ‘제발’이란 단어를 입안으로 삼키며 요청했다.

* * *

“이런 멍청한 놈!”

인계에서 환계의 주가 권역으로 돌아온 노인의 마른 주먹이 의자의 팔걸이를 쾅 내리쳤다.

주경현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그 호통을 견뎌 냈다.

“탈피를 도와 달라 청하는 걸 들었으면 가서 살펴보기라도 했어야지! 어찌 백기하 같은 놈에게 기회를 줘! 주기는!”

“……송구합니다.”

“일부러 주명윤에게 백기하를 맡긴 이유가 뭔데! 이제 그들이 가까운 모습을 보여도 그것이 딸의 탈피를 도와준 은인이기 때문이라고 변명해 대면 뭐라 할 것이냐!”

“…….”

“명윤을 따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서 그 아이를 외면했느냐?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곳에서야 그 계집아이 따위가 죽든 살든 알 바더냐. 하지만 누가 있는 곳에서는 그러지 말았어야지!”

신영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너 대신 백가로 가기로 결정 난 계집인데, 그런 아이가 탈피하고 있는 것을 외면하고서 길바닥에 버리고 떠났다는 말이 돈다면 대체 어떻게 변명할 거냔 말이다!”

“제가 버린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아이가 그곳에서 탈피를-.”

“주경현!”

“……송구합니다. 아버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노인이 피곤한 듯 머리를 받쳤다.

그때 일보관이 조용히 다가와 노인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뭐라. 백가 기마단?”

“네. 어떻게 할까요.”

“백기하가 불러들인 것이냐?”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명윤 원로에게 기마단 전체를 천 리 바깥으로 쫓아내 달라 간청했다고 합니다.”

“……뭐?”

“대화의 흐름에서 명윤 원로가 말하기를, 기마단을 이끄는 자가 백가 재상 백만용이라 하니 혹 어떤 기밀들이 그의 입에서 퍼져 나갈까 봐 몸을 사리는 것 아니냐고 했다 합니다만.”

“백기하는? 그 말에 뭐라 대답했는데?”

“그저 신영께 간청드려서라도 제발 그들을 백가의 영지로 쫓아 달라고 했답니다.”

“…….”

노인이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신수라 한들 주가 영지에 홀로 쳐들어온 것도 이상했건만.

이제는 아마도 호위인 듯한 이들을 쫓아내 달라고 했다니?

‘대체 왜?’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노인이 주경현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넌 이만 나가 보아라.”

“……예.”

그렇게 주경현이 알현실을 비운 이후로 노인이 일보관에게 다시 물었다.

“넌 그 백가주가 왜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야. 소가주님께서 백가로 향하실 거라 생각해서 아니겠습니까. 달아나시지 못하게 확실히 백가까지 함께하려는 거지요.”

“헌데 왜 호위를 물려 달라고 해.”

“자신감의 발로 아니겠습니까. 그는 신수이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이번 백가주의 주가행엔 여러모로 이상한 점이 많았다.

‘소가주를 백가로 데려가려 한 것치고는 경현이 저 아이가 명윤의 저택에 갔을 때 얼굴도 보지 않았다고 하고.’

“탈피를 도와준 정도로 몸이 좋지 않으니 어쩌니 하면서 내도록 명윤의 집에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이유라니. 대체 그게 뭘까.”

눈을 가늘게 뜬 노인이 손잡이를 일정한 속도로 치며 생각을 거듭했다.

“뭔가 있어. 뭔가가 더 있는데, 도무지 그게 뭔지를 모르겠군.”

그렇기에 노인에게는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었다.

“……인원수도 많지 않다고 하니. 그 백가 기마단, 일단 모두 데려와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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