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254)

신영의 피를 이었다며 주경현 대신 온 여자를 보고는 당했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뒤늦은 분노가 이 여자를 향했다.

아마도 혈족들 대부분이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백기하 역시 이 여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방관했다. 주경현이 아닌 이상에야 신경 쓸 가치가 없다고 느꼈으니까.

당시 세화가 백가에서 얼마나 모욕적인 취급을 당했는지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 여자의 잘못이 아닌데도, 모두가 마치 이 여자가 아이들을 납치해 간 범인이기라도 한 것처럼 몰아세웠다.

그리고 어느 아침이었다.

회랑을 걷다가 먼 곳이 소란스러워 보니 또 이 여자를 두고 혈족들이 과한 모욕을 던지고 있었다.

이 여자는 항상 오만해 보였고 말로는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백가 일원들의 공격적인 태도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는 듯 턱을 치켜들었던 것이다.

‘저 꼴로는 괴롭힘이 더 심해지기만 할 텐데.’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그러든 말든.

백기하가 차갑게 돌아서던 순간이었다.

뭔가를 본 것 같아 서둘러 다시 시선을 돌렸다.

늘 뻣뻣하던 이 여자가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것도 죄인처럼 꿇어앉아서.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신수의 감각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몇 문장을 끌고 왔다.

“범인이 주가의 영지로 숨어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주가가 범인인 양 단정 짓는 당신들의 말엔 공감할 수 없습니다.”

새까만 눈동자가 한 치의 반박도 허용하지 않는 듯한 의지를 담아 눈앞을 응시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 눈은 온통 붉어져 있었다.

온갖 모욕적인 말들에도 한 번도 그랬던 적 없던 여자가 대체 무슨 말을 듣고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하지만 우리 쪽에는 피해가 없었다는 이유로 주가의 일이 아니라며 육가의 고통을 외면해 온 것은 사실이니. 그 부분은 환계 칠가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 아픔을 지금껏 제대로 알아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탈피도 못 한, 아직은 가문의 충분한 비호를 받아야 하는 어린것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것도 저를 쥐 잡듯 잡을 준비를 하고 있는 타 가문에 끌려 와 할 말은 더더욱 아니었고.

순순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익히 알아보았다.

누군가 시켰더라도 마음에 없다면 때려죽여도 억지로 사과할 성정은 아닌 듯 보였으니, 아마도 저건 진심이겠지.

그 이후, 그녀는 전각의 기둥 사이를 지나며 그가 있는 곳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그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한 것처럼 무시하며.

자랑은 아니지만 백기하는 제 생김엔 자신이 있었다. 그는 신수였으니까.

환족들은 몸 안의 영력이 많을수록 아름다워지는 특성이 있었기에 당연한 이야기였다.

환계 유일의 신수인 그가 환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다 해도 틀리지 않는 것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늘 제 얼굴을 보고 굳어지던 이들만을 보아서일까.

그를 무시하며 아침 안개 속을 홀연히 지나치는 여자는 마치 환영 같았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가서 백가 혈족들에게 물어보았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말을 했는지.

혼이 날 거라 생각했는지 여전히 울고 있던 누군가가 주춤거리며 대답했다.

별말 안 했다고.

내 아이를 돌려 달라고. 주가가 책임만 다했다면 자신은 아이를 잃지 않았을 거라고. 그 정도밖에 얘기하지 않았다고.

‘수많은 말에도 꼼짝을 안 하더니, 그 말에는 그리 쉽게 무릎을 꿇고 고두하며 사죄했다고?’

자기 잘못도 아닌 일로?

그 일로 제법 궁금해졌었다.

그가 익히 들어오던, 향락을 즐기는 일밖에 관심 없다는 주가 대부분의 혈족들과는 반응이 좀 달랐으니까.

분명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었겠지. 자존심을 챙기면서도 괴롭힘에서 벗어날 방도를 찾은 거야.

가면이라면 벗겨 버리고 싶다고. 그 당시의 그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네? 왜 잘해 줬냐니까요?”

다시금 그녀가 그렇게 물어서 백기하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저를 올려다보는 약간 날카로운 눈꼬리와 비율이 아름다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계기는 계기일 뿐 그것이 다가 아니다.

그 이후로 많은 일들을 겪으며 처음의 그 결심은 어디 가고 그녀가 뭘 하든 자꾸 신경이 쓰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 조금 더 바라보게 되고.

장미 가시 같은 성격을 하고서 측근 시녀들은 또 얼마나 챙기던지.

그 모습이 흥미로워 지켜보다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고.

싫은 일을 어떻게 견뎌 내는지.

그 사이에서도 제 사람들을 어떻게 챙기는지.

아주 많은 것들을 보며 천천히 마음을 빼앗기게 된 것이니까.

“말해도 그대는 잘 모를 거야.”

“알기 쉽게 말해 주면 될 것을, 괜히 어려운 척하는 건 아니고요?”

하하. 백기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 봐. 저렇게 한 번도 지지를 않지.

백기하가 기둥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천천히 다가와 우아하게 뻗은 그녀의 턱선을 망설이다 조금 만져 보았다.

이전 생에선 이 얼굴을 얼마나 만져 보고 싶던지.

“특이하다고 생각했었어.”

그녀가 싫어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의 엄지손가락이 입가로 내려가 붉은 입술을 쓰다듬었다.

“할 말이 많아 보이면서도 입은 잘 열지 않고. 하지만 한번 열리면 또 나오는 말은 얼마나 신랄한지. 몸 안에 화도 많고. 그러면서도 정도 많고. 심지가 굳고.”

“…….”

“강하고.”

“…….”

“약해도 지지 않고.”

“…….”

“예쁘고.”

알고 있는 것보다 그는 그녀를 더 자세하게 많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놔뒀다간 끝도 없이 나올 것 같은 수식어의 향연에 세화의 얼굴이 붉어졌다.

시선을 피한 세화가 그의 손을 밀어냈다.

“됐어요. 그만해요. 당신이 우리 오라버니들도 아니고.”

“아니지. 난 오라버니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

다시 주세화의 턱을 손끝으로 끌어온 백기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뭐가 되고 싶은지는 이미 알고 있잖아.”

손안에 잡힌 긴장한 근육을 다시 엄지로 부드럽게 훑었다.

새하얀 턱선 위로 붉은 입술이 선명했다.

선이 유려한 입가를 흐르듯 부드러운 손길로 매만지는 동안 달콤한 입술을 빨고 싶은 그의 울대가 요동쳤다.

손끝에 조금 더 힘을 주며 여전히 다른 곳을 향한 시선을 자신에게로 가져왔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해요.”

“그대의 머릿속에.”

“…….”

“여기 안쪽, 이 가슴 안에. 내가 조금은 있나?”

“…….”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 나는 그것만으로도 오랜 시간을 기다릴 수 있으니.”

“…….”

기다랗게 음영을 드리운 세화의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그의 시선이 너무나 진중하고 무거워 마주치고 있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다시 옆으로 기울였지만 그런 세화의 시선을 따라가며 백기하가 다시 눈을 맞췄다.

따스한 눈동자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내 마음엔 이미 그대가 들어와 있어. 알고 있지?”

“…….”

“그대만 담고 있어.”

참 이상하다고. 마음이 서로 연결된 것도 아닌데, 그대가 이 안에 들어온 이후로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러며 그는 세화의 손을 끌어 제 단단한 가슴에 가져다 댔다. 부드럽게 울리는 그 고동을 느끼게 한 다음 조금 웃었다.

“그러니 언젠가 그대도 그런 마음이 들면, 날 돌아봐 줘.”

세화는 달빛에 비친 그 유려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바보 같은 남자는 제가 말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그녀의 감정을 모를 것 같았다.

이미 그의 얼굴은 제게 누구보다 무엇보다 가장 아름다워졌는데.

당신이 이 가슴 안에 담긴 이후부터.

하지만 그런 말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녀에겐 해야 할 일이 있고, 그 길에 그를 끌어들이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까.

그렇다고 가슴이 떨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의 말 면면이 한숨처럼 부드럽게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제 볼을 만지는 손길을 느끼면서도 치우지 않은 그녀가 언젠가를 떠올렸다.

언젠가, 미래에.

모든 일을 해결하고. 그러고도 당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그때는.

‘그때는 나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