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254)

‘이곳도 십여 년 후에는 주가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황폐해졌었겠지?’

백가로 떠난 이후 한 번도 돌아오지 못했으니 알 방법이 없긴 하다.

바삭바삭.

신 아래로 밟히는 풀이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그런 그녀의 발치로 달빛이 안개처럼 떠돌았다.

‘여길 지나면, 아마도 연못이…….’

세화가 잘 정리된 정원수 사이를 기억을 더듬으며 걸었다.

곧 아주 오래전 종종 곁을 거닐었던 커다란 연못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

시기를 잘 맞춰 돌아왔는지 활짝 핀 연꽃들이 수면 위에 가득했다.

‘이 광경을 다시 보는구나.’

코끝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다시 돌아와서…… 돌아올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 광경을 다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백기하에겐 평생 다 갚지 못할 빚을 졌다.

잠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추스른 그녀가 천천히 발을 옮겼다.

연못 옆에 호젓하게 서 있는 정자로 들어서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푸른 달빛이 신비롭게 흩뿌려지는 풍경이 못내 아름다웠다.

난간에 걸터앉자 길게 뻗은 꽃 한 송이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였다.

잠시 그 꽃잎을 만져 보려 허리를 숙였을 때였다.

“세화!”

“!!”

급하게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고요한 공간에 요란하게 나타났다.

깜짝 놀라 난간에서 떨어질 뻔한 것을 커다란 손이 붙잡았다.

“무슨 짓이야!”

‘아니, 지금 누가 할 말을!’

급격히 빨라진 심장을 진정시키며 그녀가 화를 내듯 소리쳤다.

“뭐가요!”

그 반응에 백기하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우물댔다.

“지금, 지금 뛰어들려고 한…….”

‘뭐라고?’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예요? 내가 이 밤중에 뜬금없이 호수에 뛰어들긴 왜 뛰어들어요.”

백기하의 시선이 당황한 듯 잔뜩 흔들렸다.

“……아니, 난.”

“…….”

“어, 그럼. 왜…….”

뜬금없는 말들이 어이가 없었으나 커다란 사내가 쪼그라든 모습이 우습기도 해 세화가 화를 내던 것도 잊고 피식 웃었다.

제 시선 안에 있던 작은 연꽃의 줄기를 꺾어 그에게 내밀었다.

“자, 선물이에요.”

“이걸 꺾으려던 거야?”

“네. 요 옆까지 올라와 있더라고요.”

“나, 주는 거야?”

“그럼 누구에게 줄까요. 다른 이를 줄까요?”

“안 돼! 내 거야.”

그가 주세화의 손에서 서둘러 연꽃을 가로챘다.

“방에, 방에 둘 거야.”

연꽃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텐데 그는 소담한 꽃송이 하나를 소중히 품에 안고서는 연신 신기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다.

“고마워.”

“…….”

자기는 내게 더 좋은 것들만 줘 놓고. 고작 저런 연꽃 한 송이에 저리 기뻐하다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던 세화가 손끝이 간질간질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물었다.

“이 밤에 여긴 왜 왔어요?”

“…….”

위로 잔뜩 솟아 있던 그의 입꼬리가 순간 굳어졌다.

이내 조용히 원래 있던 자리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으나 모르는 척하고 다시 물었다.

“날 따라왔어요? 어디서부터. 방에서부터?”

“무슨 소리야. 절대 아니야.”

미장 어른께서 들으시면 큰일 날 말을 한다고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뭔데요? 여긴 내원이라 손님방에선 여기까지 이어지지 않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그것도 이 밤에.”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뭐라 말할지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게…….”

“…….”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 그래. 금.”

“?”

“금을 연주해 주면 안 될까. 하여.”

“금이요? 갑자기? 이 밤에요?”

세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을 보면서도 백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정답은 그녀도 알고 그도 아는 그것이 맞긴 했다.

하지만 뒤를 따라왔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어 아무렇게나 꺼낸 변명이었는데.

‘꺼내 놓고 보니 좋은 생각 같은데?’

“그대의 금 소리가 천계의 소리라며 칭찬이 자자하던데.”

“오라버니들이죠? 그걸 믿어요? 미천한 재주예요.”

“그래도 한번 듣고 싶기는 한데.”

“뭐, 언젠가 기회가 있다면요.”

대답을 얼버무리는 세화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금을 연주했던 것이 백가에 가기 전이었는데. 그럼 십칠 년 전이 아닌가.

‘그때 배운 것이 생각이나 나겠냐고.’

하지만 왜인지. 그가 기대한다 생각하니 못한다는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뭐 그래도 한 번 배웠던 거니까 다시 배우면 금방 기억이 나겠……. 나겠지? 나야 할 텐데.’

일단 길어져서 좋을 화제가 아니었다.

말을 돌릴 만한 무언가를 찾던 그녀는 그제야 그의 옷차림이 야밤에 어울리지 않는 행색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헌데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았네요. 어디 다녀오는 길이었어요?”

“……아.”

“?”

“경, 치가 참 예쁜데. 원래 연꽃은 이렇게 연못 가득 피는 것인가? 백가의 영지에도 온갖 빼어난 절경이 가득하고 만화가 사시사철 피어 있지만, 연꽃은 없거든.”

“알죠. 그거. 나도.”

‘뭐지? 어딜 다녀왔길래 갑자기 말을 돌리고.’

세화가 애써 화제를 돌리는 그의 노력을 모른 척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도 말을 돌렸으니 할 말은 없지만.

‘주가 권역에서 딱히 저 사람이 아는 곳이 없을 텐데.’

하지만 지금 캐묻지 않아도 나중에 말해 줄 것 같다는 기묘한 믿음이 있었다.

“나도 여기 아주 오랜만에 와 봤어요. 아닌가. 시간이 돌아왔으니 기분만 오래됐을지도요.”

때문에 더 캐묻지 않은 그녀는 그와 함께 붉은 꽃잎을 벌린 연꽃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런데 오라버니들과 얘길 많이 했나 봐요. 금을 손에서 놓은 지가 언제인데 그 얘기까지 하는 걸 보면요.”

“그럼. 우리 아주 친해졌어.”

“……친해졌다고요?”

“정말이야. 날 아주 좋아하던데.”

“…….”

‘서로의 혈족을 죽이는 전쟁을 십 년이나 벌여 놓고 친해질 수가 있나? 남자들의 세계는 원래 그런가?’

“그럼 다음번엔 내가 먼저 그대에게 금을 연주해 주는 건 어때?”

“악기도 다룰 줄 알아요?”

“응.”

“그런데 금이 없잖아요.”

“그대가 빌려주면 되잖아. 배웠다는 걸 보면 가지고 있을 것 아냐.”

“…….”

“왜. 싫어?”

“다음에요. 이곳, 주가 권역에선 말고 다른 곳에서.”

“…….”

“인간계도 괜찮고요.”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계속 이런 대답만 하고 있으니 수상하긴 한가 보다.

찔리는 것이 많은 세화가 어색하게 웃음 짓다가 시선을 돌렸다.

바람이 못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부드럽고 커다란 분홍 연꽃잎들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지금이니까 물어보는 거지만.”

연꽃이 가득한 못 저 너머를 조용히 응시하던 그녀가 물었다.

“그때 말이에요. 백가에서.”

“응.”

“갑자기 나한테 왜 잘해 줬어요? 처음엔 안 그랬잖아요.”

생각해 보면 그도 처음에는 분명 다른 백가의 일원들과 다르지 않게 그녀를 무시하고 모른 척했었다.

처음부터가 아니라 어느 날부터 친절해졌던 것을 보면 분명 무슨 계기가 있었을 텐데.

“그때는 그대를 몰랐으니까.”

질문을 듣고 당황한 백기하는 죄책감 가득한 얼굴을 감추지도 못하며 대답했다.

“처음엔 그대를 몰랐으니까. 알았다면 결코 그 많은 일들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야.”

많은 일들.

그랬다. 백가로 넘어가 있는 십이 년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돌아오면 더 많은 일이 생길 줄은 모르고.

“탓하는 거 아니에요. 갑자기 활쏘기를 가르쳐 주지 않나. 사냥 대회에서도 많이 도와주고. 그냥 어느 날부터 내게 잘해 줬잖아요. 왜 그랬나 해서요.”

“…….”

잠시 고민하던 백기하의 시선이 과거를 날다 어느 기억에 안착했다.

그래. 계기는 있었지.

아마도 관심을 갖게된 건 그날이었을 것이다.

그녀와 회랑에서 부딪혔던 그 날.

당시 백기하도 주가가 실종 사건을 나 몰라라 하는 것에 적지 않게 화가 나 있었다.

이미 수차례 주가에 실종 사건의 조사를 요청했으나 묻혀 버리지 않았던가.

뻔뻔스러운 작태에 울화가 치밀어 주가 신영의 후계자를 끌고 오려고 했건만.

“주가 원로 주명윤의 여식, 주세화입니다.”

엉뚱한 여자가 온 걸 보았을 때는 어찌나 황당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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