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
“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한 분이셨으니까요. 태도가 변하신 것은 신영의 부르심 이후인데, 그때 문제가 되는 사항은 백가행, 또, 소가주와의 혼약 취소밖에 없으니…….”
말의 흐름을 이해할 수 없던 주경현이 되물었다.
“그건 그렇다만, 어째서 그게 투기와 연결되느냐?”
“소가주께서 말씀하시기로 뜬금없이 세화 아가씨께서 사촌 동생을 언급하더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잘 어울린다느니 하는 말을 꺼내셨다고.”
“그랬지.”
“그 사촌 동생이라 하면 사실 세화 아가씨의 백가행 조건을 가장 먼저 다른 주가 혈족들에게 언급하기도 했고.”
호위가 눈치를 보는 듯 흘끔거리자 주경현이 “계속해 보거라.” 하고 재촉했다.
“거기다 세화 아가씨를 기다리며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시기도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러면?”
“혹 세화 아가씨께서는 소가주님께서 자신의 사촌 동생에게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네 말은 세화가 자신은 백가에 보내면서 내가 그 사가 계집은 아끼는 듯 보여 화가 났다는 말이렷다?”
“비슷하면서 좀 다릅니다. 사촌 동생과 혼인하기 위해 세화 아가씨를 백가로 보내 버리려 하신 거라고 생각하셨을지도요.”
주경현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코웃음 쳤다.
“그게 무슨 말이냐. 세상에 종년과 성혼하는 주인도 있다더냐? 그 사가 계집이 영력이라도 뛰어났다면 혹시 모를까 그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군요. 실언했습니다.”
“…….”
“소가주님?”
“……아니다. 네 말도 일리는 있어.”
호위의 추측에 주경현의 시선이 깊게 가라앉았다.
“뜬금없이 그 사가 계집을 내 옆에 가져다 붙이는 것도 그렇고. 영 관계가 없을 거라 보기는 어렵지. 그렇지 않으냐?”
“예. 제 생각도 그러합니다.”
“그럼 어찌하는 게 좋겠느냐. 세화 저 아이를 이대로 둘 순 없으니 말이다.”
“음…….”
어려운 문제에 당면해 숙고를 거듭하던 천령이 다시 한번 조심스레 간언했다.
“갑작스레 태도가 저리 바뀌실 정도면, 소가주께서 아니라고 부정하신다 해서 믿으실 것 같지가 않습니다. 차라리 직접 그 사촌을 불러들이시면 어떠십니까?”
주경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불러들이라니. 내가 그 계집애를 친히 불러 데려온다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아니냐.”
“그러니 차라리 불러들이셔서, 그 사촌 앞에서 세화 아가씨께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다. 언사 말고 행동으로 보여 주시는 거지요.”
“행동?”
“네. 세화 아가씨 앞에서 사촌을 지위에 맞게 대하시면 아가씨도 그걸 보고 깨닫는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종은, 종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이걸 보여 주란 말이지?”
“네.”
“……하.”
주경현의 자존심이 끊임없이 무게를 쟀다.
굳이 그딴 연극까지.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것인가.
‘이 주경현이. 내가. 이 주가의 소가주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까 본 그 아이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그러다 보면 호위의 의견이 썩 나쁘지 않은 듯 여겨지기도 하고.
‘그렇다고 또 그리 마음을 풀어 주려 한다는 티를 내고 싶지는 않은데.’
주경현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매끈하고 긴 손가락이 빠르게 팔걸이를 두드렸다.
‘주명윤마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여기서 기다려 백가주를 본다 해도 내 체면만 상할 수 있겠어. 신영의 명도 명이지만 일단 돌아가야겠지.’
잠시 고민했으나 사실 결과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태도는 괘씸하지만 강하게 나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법하니.’
일단 백가행 전에 그 아이를 달래 놓으려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한 주경현이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차게 손을 내저었다.
“그래서 그 사가 계집은 아직 인계에 있는 거냐? 한번 데려와 보아라.”
* * *
“아가씨!”
“아가씨!”
“영채야! 영무야!”
그날 오후, 심부름을 보냈던 두 자매가 돌아왔다.
저택으로 서둘러 달려 들어오던 두 자매는 마중 나온 세화의 모습을 보고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한참 만에 영무의 입이 먼저 열렸다.
“아가씨. 설마, 탈피하신 건가요?”
영채가 그런 영무를 향해 통박을 놨다.
“영무 넌 눈이 없니? 물구나무서서 봐도 탈피하셨는데 그런 건 여쭙길 왜 여쭙니?”
“이 기집애가. 내가 눈이 없어서 여쭤본 거니? 보고도 믿기지 않으니까 여쭤본 거지.”
“그건 그래.”
그 중요한 순간에 자기가 옆에 없었다니 너무 죄송하고 아쉽다며.
영채가 삽시간에 그렁그렁해진 눈을 소매로 닦아 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사히 탈피하신 걸 정말 감축드리고요!”
“아, 뭐야. 내가 먼저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아가씨, 정말 감축드려요!”
“아, 그러고 보니 저도 그 말씀을 안 드렸었네요. 아가씨, 저도 감축드려요!”
그제야 영선까지, 오랜만에 재회한 세 자매가 세화를 보며 함께 웃었다.
“아휴. 여기 계신 걸 모르고 인계로 넘어갔다 왔지 뭐예요.”
세화의 방으로 돌아와 물 한 잔을 먼저 마신 영채가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주가로 가셨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오는 중이었거든요. 중간에 영무와 마주쳤는데 인계로 가고 있길래 잡아서 같이 왔어요.”
세화가 그 말에 영무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 말한 대로 방계 원로들에게 전달했어?”
“네. 여기 원로들께서 사촌 아가씨, 아니 사연주에게 보내는 서신입니다.”
영무의 손에서 서신을 받아든 세화가 빠르게 그것을 펼쳐 읽었다.
“하. 기대를 벗어나지 않네.”
그녀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위로 솟았다.
그 서신을 구겨 소매 안으로 밀어 넣은 세화가 영채를 보며 물었다.
“환석은. 얼마나 구했어?”
“원로 가문 아가씨의 신분패가 잘 먹혔어요. 양이 꽤 됩니다.”
아가씨가 찾으신다는 말에 모두 깜짝 놀라 환석을 내어 주었다며 영채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가 영지 안에 있는 것은 일단 모두 실어 어르신의 비밀 저택에 두었어요. 행수가 다른 가문의 영지에 남아 있는 것들까지 필요하냐 묻길래 그러라고 했고요. 그믐까지 구해 오기로 약속했으니 삭일(朔日)에 가져오면 됩니다.”
한데, 하고 영채가 엿듣는 이를 염려하듯 주위를 둘러보다 작게 말했다.
“저희가 떠날 때는 사연주가 붙인 인간 사내 몇만 뒤를 따랐는데, 환계에 들어오고 나서는 환족 무사가 붙었었습니다. 누가 붙인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럼 환석은? 혹시 환석을 저택으로 옮기는 걸 보였어?”
“그건 아닙니다. 제가 아가씨께 보고하러 인간계로 가는 길에 붙었으니까요. 하지만 후에 받을 환석은 숨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괜찮아. 어차피 신분패를 사용해 기록을 남긴 건 드러내기 위함이었으니까. 시간을 좀 버는 것으로 됐어.”
그 말에 영채가 홀가분한 얼굴로 다행이라며 웃었다.
“좋아. 그럼 일단 지금 상황을 알려 줄게.”
세화가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사연주를 주가의 어린 환족들 사이에서 외면당하게 해 두었다는 것.
주경현에게 지위를 신경 쓰지 않고 막 대하고 있다는 것.
백가주가 저택에 머물고 있고, 당장 사흘 후에 그를 환영하는 연회가 열린다는 것.
그리고 아마도 그 환영회에서 그녀의 백가행에 대한 말이 나올 것이라는 점까지.
영채와 영무뿐 아니라 영선까지도 입을 떡 벌렸다.
“사흘이요? 백가주가 계신 곳에서 발표라니. 그러고 나면 바로 떠나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맞아요. 분명 육가에서 항의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곧장 출발하라 명이 내려올 것 같은데요.”
“뭐, 그렇기야 하겠지.”
“세상에. 짐도 하나도 꾸리지 못했는데.”
영선이 울 듯한 얼굴로 얘기했다.
“아, 아가씨. 사흘 후라니요. 그 말씀은 제게도 해 주지 않으셨잖아요.”
“나도 오늘 깨어났잖아. 들은 지 얼마 안 됐어.”
영무가 조심스레 물었다.
“헌데 소가주께 그렇게 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당장은 백가행을 인질 삼아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셨다고 해도, 아가씨께서 떠나시고 나면 남아 있는 가족들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영채도 낮은 목소리로 동조했다.
“네. 게다가 사흘 후에 떠나셔야 한다면 지금껏 준비한 일들을 실행할 시간이 부족하시지 않을까요?”
“괜찮아. 신영의 지금 계획은 그럴지 모르지만 내가 사흘 후에 바로 떠나진 않을 테니까.”
“네?”
“아가씨. 설마 신영의 명에 거역하시겠다는 건 아니시지요?”
“그건 아니야. 사흘 후, 연회 날이 되면 신영이 마음을 바꿀 거라는 말이야.”
“??”
세화의 말에 세 자매가 영문을 몰라 서로 마주 봤다.
‘갑자기 신영께서 그날 마음을 왜 바꾸실 거란 거지?’
* * *
보름도 아닌데 달이 무척 밝았다.
일주일이나 푹 자고 일어나서일까. 밤이 늦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창 너머, 부드럽게 퍼지는 달빛을 바라보던 세화는 아무도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며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저 달은 백가에서도 보았던 것인데 왜 이렇게 달라 보이는 걸까?’
오랜만에 돌아온 제집이기 때문일까.
정원을 푸르스름하게 빛내는 달빛은 이상하게도 백가를 비추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풀벌레가 우는 소리마저 정겨웠다.
이렇듯 느긋하게 걷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이더라.
이렇듯 그리운 풍경들을 다시 보는 것 역시 대체 몇 년 만인지.
오랜 백가 생활에 더불어, 감옥에서도 제법 긴 시간을 보내고서 곧장 처형당했으니 이 저택의 풍경도 약 십칠 년. 근 이십 년만이었다.
염려해야 할 것도 많고, 생각해야 할 것도 많았지만 오늘 밤만은 평화를 누려도 괜찮지 않을까.
세화는 제가 기억하는 것과는 많이 다른 정원에 낯설고도 신기한 기분을 느끼며 잠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