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찌르는 듯 날카로운 시선마저 매우 아름다워 주경현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게.”
“…….”
“그게, 그러니까.”
평소라면 주경현의 심복 호위가 그런 그의 상태를 깨우쳐 주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호위인 천령 역시도 넋을 놓고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이가 있을 수 있지.’
가까스로 탄성을 참아 낸 천령이 한참 만에 먼저 정신을 차렸다.
말을 더듬고 있는 제 주인의 모습을 본 호위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이런 모습의 그를 그냥 두었다가는 평판에 민감한 주인이 자신을 분명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소가주님.”
“나는 그러니까…… 뭐?”
“소가주님. 백가주를 보러 오셨습니다.”
그제야 주경현도 정신이 들었다.
‘그래, 백가주!’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선이 눈앞의 여성에게 향하자 또 머릿속이 흐려지는 듯했다.
‘백가주. 백가주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지만 입 밖으로 나간 것은 엉뚱한 내용이었다.
“삼 일 후에 신영께서 친히 백가주를 환영하는 연회를 여실 예정이다. 알고 있느냐.”
“…….”
세화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를 무시하는 듯한 그 행동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지극히 신경에 거슬렸건만.
‘뭐. 그럴 수도 있지. 대답 좀 하지 않는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바싹 타들어 가는 목을 다듬은 그가 다시 말했다.
“그날 내 상대가 되어 함께 입장하라는 말을 하러 온 것이다. 숙지하고 있어라. 그날 마중을, 아니, 내 일단 내일 다시. 아니지. 너 식사를 하고 있었다 했느냐. 나도 식사를 하지 않았으니 함께 들자꾸나.”
횡설수설한 주인의 말에 호위가 입을 떡 벌렸다.
‘소, 소가주님?’
“무얼 하느냐. 천령이 넌 어서 탁자를 정리하고 음식을 내오라 하거라. 세화 너는 음식이 올 동안 잠시 이리와 앉고.”
주경현이 세화를 향해 손짓했다.
“이리, 잠시, 와 보거라. 어서.”
세화는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녀가 격양된 감정을 누르며 차갑게 대답했다.
“아무리 소가주님이라 하셔도 원로의 저택 내에서 그 집 여식을 이리 종 부리듯 하실 순 없으실 텐데요.”
“뭐라? 종?”
주경현이 길고 유려한 눈을 위로 치떴다.
“내가 지금 너를 종으로 부렸다, 그 말이냐?”
“아닙니까? 아니면 짐승을 부르신 것입니까? 하실 말씀이 있으면 시종을 시켜 서신으로 전하시면 되실 텐데, 초대도 하지 않은 남의 저택에 오전부터 불쑥 들이닥치셔서는 주인을 오라 가라 하니. 이건 무슨 경우입니까?”
그 말 자체가 주경현은 황당하기만 했다.
제가 이리 불쑥 왔던 게 한두 번인가. 수십 번이다.
그때마다 아무 말도 없이 기쁘게 맞았던 것이 누군데 이제 와서.
“게다가 이제 다시 얼굴을 뵙고 싶지 않다던 제 말은 들어주실 생각이 조금도 없으신가 보군요. 더 이상은 인사조차 할 필요 없다던 본인의 말조차 아랑곳하지 않으시다니. 이리 스스로 뱉은 말조차 지키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걸 몰랐네요.”
“너!”
“치시려고요?”
“뭐야?”
입꼬리를 끌어올린 그녀가 분개한 주경현에게로 바짝 다가서며 웃었다.
옥같이 곱고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자 주경현의 심장이 상황도 모르고 쿵쿵 뛰었다.
“치시지요. 소가주님께서는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 하실 수 있잖아요.”
“너.”
“…….”
“이…….”
화가 나면서도 도무지 이 얼굴을 보면서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시기도 좋지 않았다.
필요하면 정말 손찌검을 해서라도 상황을 바로잡을 마음은 있었으나 그랬다가 전에 말한 대로 이 아이가 자해라도 한다면.
그래서 백가행이 미뤄진다면.
‘……그건 절대 안 되지.’
그가 그렇게 몸을 물리자 웃음기를 지운 세화 역시도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러니 그만 찾아오세요. 가기 전까지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세화야.”
주경현이 목을 고른 후 부드럽게 그녀를 불렀다.
“네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백가에 가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거다.”
“…….”
“신영께서 그깟 범인 하나 잡아내지 못하실 것 같으냐.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야.”
“…….”
“그러니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어. 공사다망하신 신영께서 미처 신경을 못 쓰신다면 내가 앞장서서-.”
“소가주님.”
“응?”
“백가주께선 제 탈피를 도와주시느라 피로하시어 쉬시는 중입니다. 전 그분을 간호하는 중이고요. 아버지께서도 제 여정을 준비해 주시느라 정신이 없으시니, 따로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돌아가시지요.”
“세화야.”
“이제부턴 정말 찾아오지 마세요. 신영께는 절대 소가주님과 혼인하지 않겠다 이미 말씀드렸고, 더 이상 얼굴 볼 사이 아니니까.”
“세…….”
제 손목을 잡아 오는 커다란 손을 냉정하게 뿌리친 세화가 싸늘하게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한번 돌아보지조차 않았다.
표정을 굳힌 그녀가 긴 복도를 걸어 백가주와 아버지가 있던 방으로 돌아갈 때였다.
복도의 모퉁이를 도는데 누가 그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백기하였다.
깜짝 놀란 세화가 눈을 깜빡거리다가 물었다.
“당신 왜 여기 있어요?”
“그대야말로.”
“네?”
“혼인, 하지 않겠다고 이미 말한 거였어? 신영에게? 그럼 소가주와 혼약은 없는 거야?”
그런 백기하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그녀가 되물었다.
“내가 미쳤어요? 저딴 빌어먹을 새끼랑 그걸 또 하게?”
“…….”
“왜 웃어요?”
“아냐. ……아냐.”
“걱정돼서 따라왔던 거면 이리 와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세화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고개를 들고 걷기 시작했으나 백기하는 뭐가 신경 쓰이는지 두어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소가주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해도 괜찮겠어?”
“뭐가요?”
“어떻게 하려고. 괜히 당신과 가족을 미리부터 경계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
“그렇진 않아요. 신영에게만 조심하면 돼요.”
세화가 냉랭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머릿속은 지금 어떻게든 자기 대신 나를 백가에 보내는 것만 생각하고 있을 테니, 그것에 영향을 줄 만한 일은 어떤 것도 하지 못하죠.”
그러니 나도 이때 하는 거라며 웃던 그녀가 덧붙였다.
“게다가 두고 봐요. 이게 아주 재미있는 일로 이어질 테니까.”
“재미있는 일이라니. 그게 뭔데?”
“저 소가주가 머리가 조금이라도 있거나, 주변 호위들이 머리가 있다면 아마 내 사촌 동생이 고초를 겪겠죠.”
“사촌 동생?”
“네. 내 사촌 동생은 내가 아무리 험한 말을 해 봐야 전혀 상처받지 않을 테지만, 저 소가주가 한다면 전혀 다를걸요.”
가만히 앉아서 그걸 구경하게 될 거라고.
앞으로의 일을 상기하는 세화의 눈동자가 검자줏빛으로 즐겁게 반짝였다.
* * *
세화가 사라진 문을 한참이나 응시하던 주경현은 털썩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다.
“소가주님.”
“넌 대체 저 아이가 무슨 생각인 것 같으냐.”
“예?”
“대체 저 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내게 이리하는 것 같으냔 말이다. 백가행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고 해도 너무 심하지 않느냐.”
늘 웃는 얼굴만 보아왔기에 그런 표정밖에는 없는 줄 알았다.
한데 이렇게 다양한 표정이 저 피부 아래에 숨겨져 있었단 말인가?
‘얼마 되지 않아 돌아올 터인데. 그것이 저리도 무서워서 내게 이따위로 군다고? 그게 말이 되나?’
“분명 뭔가 다른 이유가 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뭔지 짐작이 가는 것이 없는데 너는 어떠하냐. 혹시 감이 잡히는 일은 없느냐?”
“…….”
“아니면 너도 정말 백가행이 저 아이를 변하게 한 이유 같으냐?”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있던 천령이 한참 만에 조용히 말을 보탰다.
“한 가지 제가 생각한 것이 있긴 한데.”
“오. 그게 무엇이냐.”
“혹시…….”
“혹시?”
“혹시, 투기는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