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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온화하게 스며들어 오는 식당 내부에는 코를 자극하는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커다란 식탁 가득 맛깔스러운 요리들이 종류별로 푸짐했다.
형형색색의 재료가 어우러져 마치 장식처럼 아름답게 꾸며진 음식들은 눈 역시도 즐겁게 했고 말이다.
하지만 막상 커다란 식탁을 두고 둘러앉은 세 사람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어색했다.
“제 딸을 구해 주시어 정말 감사합니다. 많이 드십시오.”
“별말씀을요. 잘 먹겠습니다. 탕약을 아니 먹으니 입맛이 확 돌 것 같습니다.”
“탕약이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제 정성이었는데 말입니다.”
“아뇨, 그 무슨 오해이십니까. 제가 실언했습니다. 미장 어르신의 정성이 진하게 녹아든 덕분에 건강이 아주 좋아진 것을요.”
“오. 그러면 더 드셔야지요. 야박하지 않게 넉넉히 달여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몸이 좋아졌으니 이제 어르신께서 드시면 될 것 같습니다. 효과가 아주 좋던걸요. 그리 좋은 것을 저만 주시지 마시고 미장 어른께서도 꼭 드십시오.”
“배려심이 지극하시군요. 안 그러셔도 되시는 걸 굳이 그러십니다.”
세화가 식사를 하다 말고 두 남자 사이의 기류를 가만히 살폈다.
‘아무리 그래도 백기하는 한 가문의 가주인데, 어째서 그가 아버지께 한 수 접어 주고 들어가는 듯한 기색인 거지.’
세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게다가 내 탈피까지 도와주었다면 은인 아닌가.’
하지만 그런 태도를 지적하려 해도 백기하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꼼짝없이 음식만 먹었으나, 신경이 다른 곳으로 가 있으니 이것저것 골고루 먹게 될 리가 없었다.
제 앞에 놓인 것만 한결같이 집어 드는 그녀의 앞으로 어떤 손이 음식이 담긴 접시들을 스르륵 밀어주었다.
백기하였다.
그는 조금의 여유도 두지 않고 곧장 주명윤을 보며 변명하듯 덧붙였다.
“따님께서 저것들을 좋아하시는 것 같길래 가까이 밀어 드렸을 뿐입니다.”
“크흠.”
주명윤은 무언가가 몹시 불편한 사람처럼 나직이 헛기침했다.
곧 명윤의 큰 손이 다른 접시를 세화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세화야. 어째서 네 앞에는 네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들만 두었느냐. 이걸 먹어 보아라. 너는 이 고기를 좋아하지 않니.”
“하하, 미장 어르신도 참. 언제 적 말씀을 하시는지. 따님께서는 이런 허여멀건 양념보다는 이런 붉은 양념을…….”
말하다가 말고 주명윤의 시선을 받은 백기하가 입을 다물었다.
“……제 딸과 식사도 같이 하신 적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그런 적이 있을 리가요.”
“…….”
“하지만 저 아가씨께선 이 붉은 양념의 고기를 더 좋아하실 것 같긴 하군요. 여기, 이걸 조금 더 드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 딸은 이런 매운 양념을 먹고 나면 힘들어합니다. 이상한 참견을 하시는군요.”
“그럼 맵지 않은 이건 어떻습니까. 이건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계속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군요. 일단 손님께서 어찌 이리 신경을 써 주신 답니까. 제 딸의 식사는 제가 챙기겠으니 백가주께서도 어서 식사를 마저 하시지요. 누가 보면 제가 손님 대접도 제대로 하지 않는 형편없는 이인 줄 알 것입니다.”
“미장 어른께서도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이런 행동조차도 다 미장 어른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나오는 것을요.”
“저야말로 환계 유일의 신수께 그런 말을 듣고 있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만하시지요.”
둘의 사이에서 세화만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가만히 대화를 들어 보자니 아버지께서도 내가 백기하와 아는 사이라는 것은 알게 되신 듯하지?’
그럼 그에 대한 것을 아버지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는 걸까.
털어놓아도 되는 일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 제법 골치를 아프게 했다.
그렇게 그녀가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젓가락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시녀 하나가 조용히 들어와 그들에게 무언가를 보고했다.
세화가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방금, 누구라고?”
“소가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서로를 추켜세워 주는 듯하면서 옥신각신하던 두 남자의 시선과 세화의 시선이 동시에 시녀에게로 향했다.
* * *
소가주 주경현의 심기는 매우 편치 않았다.
‘분명 내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귀에 들어갔을 텐데도 누구도 마중 나오는 이가 없다 이거지.’
게다가 그가 응접실에 들어온 지 일각이 넘어갔음에도 여전히 아무도 모습을 보이지 않다니.
주경현을 저택의 응접실까지 안내한 시녀는 그의 표정이 점차 험악해지자 상황을 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음산한 표정의 소가주가 호위인 천령에게 다시 물었다.
“식사 중이라고 하지 않았나?”
“네, 분명 내부에 심어 놓은 시녀가 셋이 모여 식사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 저들끼리 뭘 처먹는 일이 너무나 바쁘고도 중요해 감히 날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다 이거지?”
“소가주. 백가주가 이곳으로 오다 듣기라도 한다면…….”
“들을 테면 들으라지! 내가 그를 겁내야 하느냐?!”
“허나 목적이 있어 오신 것 아니셨습니까.”
그 말에 주경현의 수려한 얼굴이 피곤하게 일그러졌다.
주세화가 백가로 가기로 한 것을 백기하가 이미 들었는지 떠보고, 아직 듣지 못했다면 세화를 포함한 명윤 원로 일가 전체를 입단속 시키려 찾아온 것인데.
‘둘 다 태도가 벌써 이따위인 걸 보면 이미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의 길고 다부진 손가락이 팔걸이를 툭툭, 일정한 속도로 두드렸다.
‘만약 백기하가 먼저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까? 육가에서 먼저 백가행의 대상을 나로 특정 짓는 협의서를 다시 보내오기라도 한다면?’
그 생각을 하니 부쩍 초조해졌다.
감히 주가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만큼 역도 무리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상태인데.
‘내가 가면 대체 무슨 꼴을 당할지 어찌 알아.’
하지만 주세화는 아니지 않나.
물론 그 아이가 가게 되더라도 정상적인 생활은 못 하겠지만. 막 탈피한 계집애를 괴롭혀 봤자 얼마나 괴롭히겠는가.
‘고작해야 뼈나 몇 번 부러뜨리겠지.’
혹 알고 있는 것을 털어놓으라며 고문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또한 오래가진 않을 것이다. 곧 그 아이가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닫게 될 테니.
‘내가 가는 것과는 상황이 이토록 다르니, 세화 그 아이가 가는 게 최선이긴 한데.’
팔걸이를 두드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며 그의 심란한 속내를 드러냈다.
‘여하튼 백가주는 아직 내가 백가로 가는 거라 생각하고 있어야 하니 세화 그 아이가 쓸데없이 입을 놀리진 않았길 바라는 수밖에.’
한데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다시 한번 소식을 전하고 오겠다며 시녀가 자리를 뜬 지가 언제인데 이각이 넘어가도록 여전히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앞에 놓인 차는 다 식어 버렸고 다시 준비할 시녀조차 없었다.
“하!”
‘이제 보니 세화 그 아이만 미친 것이 아니었구나.’
이를 악문 주경현의 커다란 손이 팔걸이를 틀어쥐었다.
‘주명윤이 딴마음을 품은 것이 분명해.’
끝까지 그건 아닐 거라 생각했건만.
아니라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상적이던 그들의 태도가 어찌 이리도 한순간에 달라질 수 있겠는가.
의심이 열매를 맺듯 피어올랐다.
“당장 그들을 불러. 오지 않겠다고 하면 강제로 끌고 오도록 해.”
턱을 단단히 굳힌 주경현이 이를 악문 채 천령에게 명령했다.
“더 이상 이따위 행동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경고하고.”
하지만 호위가 발을 떼기도 전이었다.
“그러실 필요 없으세요. 벌써 왔으니까.”
차분한 목소리가 호위 대신 대답했다.
가벼운 발소리가 복도를 지나쳐 주경현의 앞에 나타났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감히 네가 위아래를 잊고 날 이따위로 기다리게 하느냐고.
잔뜩 호통을 칠 준비를 하고 있던 주경현이 멈칫했다.
“…….”
말을 잊고 잠시 그 누군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세화…… 냐?”
질문의 의미를 알 수 없어, 세화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무슨 멍청한 말을 하는 건지.
‘그럼 내가 누구란 말이야?’
하지만 주경현의 울대는 그 순간에도 크게 움직였다.
‘뭐, 뭐지?’
크게 뜨인 눈 역시도 잔뜩 흔들렸다.
‘……저 아이가 세화라고? 정말?’
도무지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탈피를 마쳤다 하니 무언가가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하긴 했다.
보통 탈피를 끝내게 되면 환족들은 젖살이 빠지며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했으니까.
얼굴과 신체의 골격 또한 급격히 변모하며 예전과는 다른 인상을 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 하지만 이건.’
햇살을 등지고 섰음에도, 투명할 정도로 깨끗한 유백색 피부는 마치 진주 가루를 덧입혀 놓은 듯했다.
방 안으로 날아든 햇살이 비칠 때마다 그녀의 눈동자가 포도주처럼 짙은 검자줏빛으로 반짝였다.
주경현은 저도 모르는 사이 앞에 있는 이의 모습을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며 제 눈 안에 담았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곡선으로 흐르는 턱선과 그 안에 자리한 붉디붉은 입술은 또 어떤지.
장인이 섬세하게 빚어낸 듯한 이목구비와 가녀린 흰 목. 관능적인 곡선으로 흐르는 어깨선까지.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보석처럼 눈을 홀렸다.
불경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도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울컥하던 마음마저 사라지고, 화를 내려다 못한 그의 얼굴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이, 이건.’
단정히 다물어진 옷깃 사이로 슬쩍 엿보이는 쇄골은 발밑이 아찔하게 느껴질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마치 주위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색을 잃은 듯한 느낌.
‘이건 너무 말이 안 되잖아. 어떻게. ……어떻게 고작 탈피 따위에 이렇게까지 인상이 바뀌는 거지?’
이건 완전히 다른 존재가 아닌가.
그런 주경현을 냉소조차 띄지 않고 바라보고 있던 세화가 다그쳤다.
“하실 말씀이 있어 오신 것 아니신가요?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