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세화야! 눈을 떴구나!”
깨어난 세화를 발견하자마자 주명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뛰어들어 왔다.
“이 딱한 것.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 몸은 괜찮은 것이야? 불편한 곳은?”
세화도 저를 살피는 아버지를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아픈 곳도 없고, 불편한 곳도 없어요. 잘 마쳤어요.”
“그럼 다행이지만 어찌 일주일이나 깨지 않아 아비 속을 이렇게 아프게 했느냐.”
“사실 조금 위험할 뻔했던 순간도 있었거든요. 그래도 중간에 영력을 많이 넣어 주셔서 괜찮았어요. 감사해요, 아버지.”
“그랬구나. 그건 백가주시다. 네가 탈피할 때 도와준 이가 자신이라 자신이 힘을 써야 한다며 밤낮으로 네 곁에서 영력을 넣어 주시기도 했고.”
사실 주명윤은 그간 백기하와 신영의 물밑 협상을 의심하고 있었다.
제 딸이 백가에 가기로 결정된 지 며칠이나 되었는가.
어떻게 해도 백기하가 그걸 전해 듣고 주가의 영지까지 올 시간이 되진 않았으니.
‘설마 처음부터 백기하는 내 딸을 지목했고, 신영은 알면서도 반발을 피해 신영의 핏줄이면 된다고 공표하고 혼인 동맹 이야기를 꺼내었던가?’
한번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탈피를 도와준 일에까지 의심이 들었다.
아이가 깨어나지 않기까지 하니, 혹 이번 일도 신영이 혼인 동맹을 성사시키기 위해 꾸민 것이 아닐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가 신영의 눈으로서 제 집에 들어앉아 있는 것일까 봐.
탈피의 후폭풍을 돕겠다며 딸의 방에 들어앉은 백기하를 대놓고 쫓아낼 수도 없고, 속이 얼마나 뒤집혔는지.
하여 먹기 힘든 약탕을 억지로 전하며 알아서 딸의 앞에서도 저택에서도 좀 사라지길 바랐건만 정말 딸을 도와준 것일 줄이야.
백기하가 하는 꼴은 밉지만 그래도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 아니겠는가.
결국 딸을 깨운 것이 백기하라고 생각하니 몹쓸 놈으로만 여기던 마음도 조금 흐려졌다.
“어디, 탈피가 잘되었는지 한번 보자. 영력을 한번 올려 보아라.”
“…….”
“응? 어서.”
“아버지, 제가 막 깨어나서 그런지 지금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요. 식사를 먼저 하고 좀 쉬었다가 해도 될까요?”
“아, 그렇지.”
주명윤이 제 조급함을 깨닫고 미안함에 미소 지었다.
“이제 막 깨어난 네게 너무 무리하게 다그쳤구나. 그래. 잠시만 기다려라. 아비가 식사를 준비시켜 가지고 오마.”
주명윤이 방 밖으로 사라지고 나자 세화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여전히 제 옆에 앉아 있는 백기하에게 물었다.
“헌데, 여기서 다른 누구 못 보았어요? 영선이라고. 의식도 없는 날 두고 어디 갈 아이가 아닌데 그 애가 어디 갔지?”
“…….”
백기하는 조금의 고민 끝에 입을 다무는 게 능사가 아닌 것을 깨닫고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게,…… 내가.”
“……?”
“내가, 잠깐 내보냈다.”
“왜요?”
“…….”
‘그야 그 아이는 미장의 눈이니까.’
그 아이를 옆에 두고 그대 손이나 한번 제대로 잡아 볼 수 있었겠냐고.
영력이 어느 정도로 혼잡하게 섞여 있는지를 알기 위해선 손도 잡아 보고 때로는 목 근처나 귀 뒤 같은 곳도 만져 봐야 했다.
한데 시종일관 영선이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은 급하고 눈치는 보이고.
그 와중에 눈앞의 이가 잠들어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걱정으로 참을 수 없어졌던 것이다.
하여 근본이 다른 영력을 전해 줄 때는 세심하게 해야 한다고. 그래야 네 아가씨가 위험하지 않다는 말로 방에서 먼 곳으로 쫓아낸 참이었으나, 그 말을 할 수 없는 백기하는 그저 애써 웃었다.
생전, 누구의 눈치도 본 적 없던 그에게는, 제가 이렇듯 시녀의 눈치까지 보아 가며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낯설긴 했다.
지금까지는 안하무인으로 “못 들었느냐? 그럼 말거라. 당해 보면 저절로 기억이 나기 마련이지.”라는 생각 아래 살아왔던 것이다.
“헌데 영력은 왜 보여 드리지 않은 거야?”
세화가 했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아챈 백기하가 물었다.
영력을 전해 주기 위해 피를 많이 먹였으니 기력이 없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게, 내 영력이요…….”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고 힘을 끌어올렸다.
신비로운 보라색 불꽃이 손바닥 위에서 이글이글 끓어올랐다.
“이런 색이 됐는데 어쩌죠?”
“…….”
그가 잠시 헛기침을 했다.
“음, 미장 어른께서 많이 놀라시겠는데. 일단 그럼 푸른 거북이의 영력이 내게 섞여 있었다고 하면 어떨까? 내가 그대에게 영력을 전해 준 것은 맞으니. 그러면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
“당신 영력은 하얗잖아요.”
“뭐. 선선선선선선선선대 가주께서 푸른 거북이, 장가와 혼인을 하셨었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주가가 백가의 기록까지 모두 뒤져 보진 않을 테니 말이야.”
“……일단 나도 뭔가 생각해 보긴 할게요.”
그 이후 주명윤에게 이야기를 전달받았는지 영선이 곧장 찾아왔다.
깨어나셨냐고 엉엉 눈물을 보이고 갈아입을 옷을 드리겠다, 목욕물을 준비하겠다 부산하게 굴자 백기하는 잠시 방을 나갔다.
세화는 영선이 서둘러 준비해 준 목욕통에 몸을 담가 땀을 씻어 내고 향유에 산기름을 섞어 온몸에 발랐다.
“머리가 엄청 기셨어요. 말리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아래를 조금 다듬을까요?”
“아니야, 괜찮아. 비켜서 봐.”
영선의 말에 세화가 제 몸에 영력을 돌렸다.
투명한 보라색 영력이 일렁이며 그녀의 몸에서 한순간에 물기를 날려 버렸다.
“와, 벌써 자유자재로 운용하시네요.”
세화는 그런 영선의 감탄에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씰룩였다.
“그런데 영력이 왜 보라색이죠?”
그 질문에 서둘러 입꼬리를 다시 내렸다.
“……어, 그게.”
“색이 너무 생뚱맞은데. 혹시 아직 자각하진 못하셨지만, 어딘가 편찮으신 건 아닐까요? 의원을 부를까요?”
영선이 걱정스럽게 얘기하는 것을 보고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떠올리다가,
“아니면 일단 원로 어른께라도 말씀드려 보세요.”
하고 당장 아버지를 부르러 갈 기세길래 서둘러 영선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냐. 이거 우리가 파낸 그 영단 때문에 그래.”
“영단이요?”
“응. 그게 장가, 푸른 거북이 신수의 영단이었나 봐. 그 때문이야.”
“헉. 그러면 우리가 영단을 몰래 손에 넣었다는 걸 들키는 건 아닐까요? 신영께선 그런데 민감하시잖아요.”
“그러니 속여야지. 일단 백가주의 영력 때문에 그렇다고 얘기할 거니까, 너는 누가 뭔가 물으면 그냥 네가 본 바로도 그렇다고 해.”
“네? 백가주께서 왜요? 백가주께선 하얀 영력을 쓰시던데요.”
“사실 백가주의…… 선선선선선선선대께서 장가의 여식과 혼인하셨었대. 그래서 푸른색이 섞인 걸 수도 있다고…….”
“그런, 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의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생각했는지 염려스러운 표정을 짓던 영선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께 반을 쏟아붓고 나머지 반 궤짝이 남았거든요. 이건 잘 숨겨 둬야겠어요.”
“뭐?! 내 소매에 있던 다섯 개만 쓴 것 아니었어? 반 궤짝이나 내가 먹은 거야?”
“그러면, 안 됐나요? 죄, 죄송해요. 전 아가씨께서 위험하실까 봐…….”
“어쩐지 영력이 강하더라니.”
영선은 그녀를 위해 한 일이니 티 내면 안 될 테지만, 나름대로 쓸 곳을 정해 두고 있었기에 반이나 제게 써 버린 게 아깝긴 했다.
이 영력의 색을 보고 나면 신영도 뭔가를 눈치챌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손안에 영력을 끌어올려 보던 세화가 가만히 고민을 거듭하다가 생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그냥 내가 신수가 되어 버려?’
* * *
“깨어났다고 합니다.”
“정말 의식을 잃긴 했던 거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무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내내 초상집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
“소가주, 가 보시겠습니까?”
“됐다. 일 없다.”
주경현이 수하의 보고에 냉랭하게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또 이대로 두었다가 그 아이의 백가행에 뭔가 걸림돌이 생기진 않을까 염려는 되고.
“그럼 지금 깨어나 있는 건 확실한 거냐? 백가에는 갈 수 있는 몸 상태인 거야?”
“네.”
“……하아.”
“소가주?”
주경현은 머리가 다 아팠다.
‘아버지께서 세화의 백가행 얘기가 미리 새어 나가지 않도록 백기하와 그 아이의 접촉을 막으라 하셨는데…….’
본래대로라면 백기하가 주명윤의 집에 머물 동안 주세화는 이곳, 신영의 저택에 머물게 할 생각이었다. 한데 화를 내다가 일을 그르쳐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게 진짜 탈피였을 줄은.’
게다가 뜬금없이 백기하가 얼굴도 모르는 주세화에게 달려가 탈피를 도우려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오지랖 한번 장히 부리는군. ……신영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해결해 놓긴 해야 하는데.’
잠시 골치 아픈 머리를 누르며 고민하던 주경현이 몸을 일으켰다.
“좋아. 앞장서거라. 혹 백가행에 대한 이야기가 새어 나간 건 아닌지 확인도 해야 하니, 어차피 한 번은 가 봐야겠지.”
수하를 따라 주명윤의 저택으로 향하는 경현의 얼굴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잔뜩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