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254)

* * *

“자 소셋물. 내가 몰래 가져왔어.”

“…….”

김이 모락모락 나는 세안통을 내미는 이를 세화는 잠시 어이없게 바라봤다.

‘이런 건 또 어디서 찾은 거람. 나도 이게 어딨는지 모르는데.’

“얼른 씻어. 내가 들고 있어 줄게.”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지금 입을 열어 봤자 코맹맹이 소리만 나올 게 뻔해, 세화는 그냥 침묵을 지켰다.

그가 가져다준 물로 얼굴을 씻고 나자 옆에서 흰 명주 수건이 당연한 듯 디밀어졌다.

“수건도 가져왔어.”

“…….”

“왜?”

“……아, 니에요.”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고 나니 이번에는 작은 약병을 들이민다.

“산기름이야. 얼른 발라.”

“…….”

산기름은 탈피를 막 마친 주가 혈족들이 비늘의 반짝임을 좋게 하기 위해 바르는 약이었다.

귀한 만큼 저택 깊은 곳에 위치한 약재고에서 보관하는 물품인데.

세안통과 수건은 그렇다 쳐도, 약재고까지 찾아내서 들어갔다 왔다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결국 물어봤다.

“여기 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렇게 잘 알아요? 소셋물이랑 수건, 산기름이 있는 곳까지 말이에요.”

“…….”

“또 뭘 알아요? 저택을 막 몰래 돌아다녔어요?”

“…….”

코맹맹이 소리를 두려워할 때는 언제고 세화가 침상 옆을 탁 쳤다.

“앉아 봐요.”

“…….”

“어서!”

그가 망설이는 기색으로 제 앞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는 따져 물었다.

“대체 왜 그렇게 위기의식이 없어요? 정신이 있는 거 맞아요?”

“…….”

“당신, 더 이상 불사가 아니잖아요. 차라리 무사들을 끌고 오기라도 하지, 홀로 이곳까지 들어와서는 저택을 막 그렇게 뒤지고 다니고. 그러다 침입자로 간주되어 공격받으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예요?”

“…….”

“뭘 웃고 있는 거예요. 내가 장난하는 것처럼 보여요?”

“아냐.”

빠르게 고개를 저은 그가 황급히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손목은요. 봐요.”

“다 나았어.”

“봐요.”

세화의 기세에 백기하가 제 손목을 조용히 내밀었다.

그녀의 입안에 피를 흘려 넣어 주던 상처가 붉은 선 한 줄만을 남기고 아물고 있었다.

“거 봐. 내가 다 나았댔잖아.”

“……재생이 너무 느려요. 원래 이러지 않았잖아요.”

세화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예전보다 많이 느려졌네요. 앞으론 더 그러겠죠?”

불사를 포기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재생 능력은 힘을 잃을 것이다.

“괜찮아. 난 강하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니 이 남자가…….’

“신경이 어떻게 안 쓰여요? 자꾸 답답한 소리만 할래요? 그런 말 할 거면 입 좀 다물고 있어요.”

“…….”

백기하가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세화가 생각을 정리했다.

과거의 이때에는 무슨 일이 있었더라.

이미 많은 일들이 달라져 변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흐름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세화는 제 예전 기억들을 더듬었다.

예전에, 내가 백가에 가기 전에 분명…….

“헌데 말야, 그대.”

“잠시 가만 있어 봐요. 나 생각할 게 좀 있어요.”

“응. 그런데 심각한 표정인걸 보니, 혹시 이맘때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는 것 아니야?”

“맞아요. 그러니 말 걸지 말아 봐요. 뭐가 떠올라야 대응 방법을 생각하죠.”

“어,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대가 한 가지 알아 둬야 할 게 있어서.”

“그게 뭔데요?”

“그대 지금 일주일 만에 깨어났어.”

“……네?”

“탈피 끝나고 일주일 만에 깨어났다고.”

“…….”

“…….”

“무슨…….”

농담도 참 잘한다고 세화가 피식 웃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누가 탈피가 끝나고 칠 일 만에 정신을 차려요. 우리 오라버니 둘도 탈피 끝나자마자 일각도 안 돼서 눈뜨더니 배고프다고 소리소리 질렀었어요.”

“진짜야.”

“하하. 그만해요.”

“……진짠데.”

“하하…… 하.”

“…….”

“……진짜라고요?”

“응.”

“…….”

“재미있는 것 하나 더 알려 줄까?”

“뭐, 뭔데요?”

“사흘 후에 내 환영연이 열린대. 아마 거기서 당신의 백가행 계획을 발표하려는 것 같아.”

“…….”

“…….”

“……사흘, 후요. 진짜예요?”

“응.”

“…….”

연회에서 공표한다는 건 그녀를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한 달이나 일찍 보내 버리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백기하가 주가에 온 이상, 한시라도 빨리 보내야 소가주가 올 줄 알고 있던 여섯 가문에서 따로 의논이나 대비할 시간이 없을 테니.

‘사건들이 너무 빨리 변하고 있어.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꿨나?’

세화가 차갑게 식은 손을 무릎 위에서 단단히 마주 잡았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미래를 바꾸고 가족들을 지켜낼 수 있을까?’

“……화.”

“…….”

“주세화.”

누군가의 부름에 시선을 올리자 백기하가 부드럽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받고 있으려니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천천히 가라앉는 듯했다.

괜찮을 것 같았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나저나 전 왜 일주일 만에 깬 걸까요. 그러고 보니 탈피할 때 전조 증상도 없었어요.”

“그건 아마 성질이 너무 다른 영력들이 섞이며 이상 반응을 일으켰던 것 같아. 초소에 있던 고시대의 영단들을 가져갔지?”

“……미안해요. 전에는 당신이 가졌던 건데, 이번엔 내가 훔쳤네요.”

“괜찮아. 어차피 내가 파내도 그대에게 주려고 했어.”

“……왜요?”

“응?”

세화가 또 입술을 깨물며 다그쳤다.

“당신은 자기 이득을 챙길 줄도 몰라요? 불사의 능력을 버리질 않나. 목숨 위험한 줄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질 않나. 이젠 영단마저 날 주려고 했었다고요?”

“그게 내 이득인데…….”

“뭐요?”

“그렇잖아. 난 불사의 능력이 없어도 다른 환족들보다 훨씬 오래 살 텐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의문이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눈가를 미미하게 붉게 물들인 백기하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러니 그대도 신수가 되어야 나랑…… 오래 같이 있지.”

“…….”

“그 영단 빨리 다 먹고 신수가 되어 줘.”

“무, 무슨 소리예요. 그거 내가 쓸 거 아니에요.”

“뭐? 왜!”

“게다가 내가 신수가 되면 어쩌라고요. 그러지도 않겠지만 만약 그렇게 돼서 나 혼자 불사가 되면. 당신 죽고 나면 나 혼자 어쩌라고요.”

“내가 얼른 환생할게. 날 조금만 기다려 줘.”

“…….”

“금방 돌아올게. 그대 만나러.”

“…….”

그는 진심으로 말하는 것 같은데 세화는 오히려 그 말에 진심으로 화가 났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죽는다는 말, 앞으로 입에도 담지 말아요. 알았어요?”

“응?”

“죽지 말라고요! 죽으면 다신 용서 안 해. 평생 당신 얼굴도 안 보고 살 거예요. 알았어요?!”

“……응.”

“똑바로 대답해요!”

“알았어.”

“죽긴 왜 죽어요? 기다려 봐요. 당신한테 불사를 돌려줄 무슨 방법이 있을 거예요. 어떻게든 찾아낼 테니 조금 기다려 봐요.”

세화는 의지에 차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백기하의 눈에 보이는 그녀는 조금 달랐다.

엉엉 소리 내어 운 지 얼마나 됐더라.

눈도 얼굴도 퉁퉁 부어 가지고. 코는 아직도 새빨간데 그것도 모르고.

그런 얼굴로 코맹맹이 소리를 하며 침상을 탁탁 치질 않나.

제게 불사를 돌려줄 거라고 호언장담하질 않나.

‘게다가 거대한 영력이 뒤섞여서 그런가. 분위기가 어쩐지 전생보다 더…….’

이미 그는 보았었던, 탈피 이후의 얼굴이긴 했다.

하지만 오 년 만에 보아서일까. 아니면 새로 유입된 영력이 어떤 작용을 한 것일까.

탈피를 끝낸 그녀는 가슴이 철렁하도록 아름다웠다.

새하얀 피부는 핏줄이 비쳐 보일 듯 투명하기 그지없었고, 우느라 흐트러진 긴 검은 머리 역시도 숨이 막힐 정도로 요염해 보였다.

때때로 자기도 모르는 새에 영력을 뿜어 내는 모습마저 몹시 새롭고 관능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매혹적인 얼굴로 저러고 있으니.

웃음이 나면서도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웃으면 안 돼. 십이 년의 경험으로 짐작건대 여기서 웃으면 분명 화낸다.’

“응.”

그가 필사적으로 이를 물며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화의 시선이 제게로 날아오자 그가 다시 한번 덧붙였다.

“꼭 기다릴게.”

그 말에 잠시 멍하니 그를 응시하던 세화의 눈이 예쁘게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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