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254)

상황을 알아보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지만 시야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주위를 조금 더 돌아보려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제 곁에 어떤 낯선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완벽하게 아름다운 남자가 옆에 앉아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백……!’

놀란 그녀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백기하.”

“응.”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로 다가왔다.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가 왔어.”

“…….”

그녀의 시선이, 잔잔한 미소를 띤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용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말했다.

“내가 왔어.”

“…….”

“내가 왔어.”

……그 말이 뭐라고.

그게 뭐라고.

당신이 온 게 대체 뭐라고, 코끝이 이렇게나 시큰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듯 막막했던 가슴이 뜨끈히 채워지는 느낌.

“배가 고프진 않아?”

다정한 목소리가 물었다.

“불편한 곳은?”

없다고 고개를 젓는 그녀의 눈께가 저도 모르게 젖어 들었다.

그를 보고 느낀 커다란 안도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표정이 무너진 제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헌데, 눈물을 닦아 내려 볼을 쓸어 내는 손에 무언가 다른 게 묻어났다.

‘……피?’

이게 왜.

생각하던 순간에 알아차렸다.

벌떡 일어나 그의 손을 확인했다.

얼마나 크게 베였는지, 아물지 않은 붉은 상처가 그의 손목에 선명했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그가 당황하며 손목을 뒤로 감췄다.

“조금만 더 있으면 금방 아물 거야.”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보자 그가 당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한테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알잖아.”

“…….”

“난 그냥 그대가 너무 오래 깨지 않으니까. 영단보다는 피가 영력을 더 빠르게 줄 수 있으니까.”

“미친 거 아니에요?”

“뭐?”

“당신 미친 거 아니냐고요.”

“…….”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하지 말라고. 나한테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왜 이러는 거야. 하지 말라는데. 당신에게 좋을 것 없으니 다가오지 말라는데. 나한테서 좀 멀어지라는데.’

“대체 왜 여기까지 와서는. 대체 왜!”

불합리한 분노라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이 조절되지 않았다.

“……왜, 내 말을 안 들어.”

목까지 차오르는 뜨거운 것을 다스리기 위해 가슴을 눌렀다.

그는 그저 자신을 도와준 것뿐인데 이런 말을 듣고 있으니, 얼마나 화가 날까.

하지만 거세게 밀려오는 것은 어떻게 해도 전혀 참아지지가 않았다.

‘이게 뭐람. 뭐가 이따위야.’

“이런 바보 같은 짓 좀 이제 그만하라고요!”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차라리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하냐고 화라도 내라고. 이곳을 박차고 나가 버리기라도 하라고. 세화가 그렇게 바라고 있던 그때.

“잘했어.”

그가 엉뚱한 말을 했다.

“잘했어.”

어이가 없어서 그녀가 화를 내듯 물었다.

“뭐가요.”

“그 모든 시간들.”

“…….”

“당신 탓이 아니야.”

“…….”

그녀는 화를 내던 것도 잊고 잠시 그를 마주 바라봤다.

백기하의 시선도 제법 붉어져 있었다.

그 상태로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가 말했다.

잘 버텼다고.

“잘 버텼어.”

“…….”

잘했다고.

“잘했어.”

“……왜.”

“응?”

“……왜. 나한테. 자꾸, 왜.”

“…….”

“왜.”

기가 막혔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해.’

그 시간들에 대해 대체 뭘 알아서.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화가 나고, 풀릴 길 없는 울분으로 가득 찬 가슴이 답답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그런 말을 하냐고.

그의 탓도 아닌 일을 따지고 싶어질 정도로.

당신이 그 마음을 알아? 당사자가 아니면 그 상황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잘 버텼어.”

그러면서도 또. 그 말이 어찌나 위로가 되는지.

입술이 파르르 떨려 오더니, 눈꼬리 사이로 넘쳐흐른 것들이 얼굴을 적셨다.

완전히 당황한 그가 커다란 손으로 황급히 눈물을 닦아 주었다.

“왜 울어. 많이 아파? 그래서 그래?”

그 체온을 느끼며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도와 달라고만 하지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내 일을 함께하자고 말만 하지 않는다면…….’

그런 생각들.

그저 옆에만 있어 줘도 힘이 날 것 같다고.

그녀가 해내야만 하는 모든 일들이 이 남자가 곁에 있으면 결코 두렵지 않을 것 같다는, 그런 바보 같은 생각들.

……그녀도 어렸던 것이다.

전생에서도 탈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었고, 그마저도 백가에서 보호자도 없이 홀로 치렀다.

가족들을 만나고, 혼약자를 만나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는 의지 하나로 백가에서의 생활을 버텼었다.

하지만 돌아온 그녀가 맞닥뜨려야 했던 것은, 그녀가 가장 따르고 마음을 주었던 이가 저를 지하 감옥에 처넣는 일이었다.

오 년 동안 영문 모를 고문을 당하고, 아꼈던 사촌 동생이 배신했다는 걸 알게 되고.

아무도 감싸 주지 않은 상태에서 결국 그녀는 가족과 함께 비참하게 죽었다.

그 모든 일에 대한 설움이, 그 일을 아는 유일한 이 앞에서 터져 버린 것이다.

당신을 내 복수에 절대 끼워 넣지 않을 거라고 그토록 다짐했는데도.

얼굴을 흠뻑 적시며 우는 그녀에게 그 역시 흔들리는 목소리를 건넸다.

“잘했어.”

“…….”

“잘 버텼어.”

“…….”

“당신 탓이 아니야.”

아무리 입술을 깨물어도, 두 손으로 눈을 꾹 눌렀음에도. 눈물이 멎기는커녕 넘쳐흘렀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세화는 몸을 웅크린 채 그냥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여전히 너무도 두려웠던 것이다.

그날이 반복되면 어떡하나.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던, 그 고통스러운 감옥에서의 시간이 반복되면 어쩌나.

“이런 일이 벌어진 것도 다 언니 때문이니 너무 억울해하지 마. 언니가 내 앞에서 재수 없게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느니 잘난 척만 안 했어도. 멍청하게 내 일에 왈가왈부하며 부정한 연회에는 참석하지 말라느니 어쩌라느니 훈계를 늘어놓지만 않았어도 이러진 않았을 것 아냐.”

“언니 때문에 죽는 거야. 언니네 가족 모두는.”

나 때문에 내 가족들이 잘못되면 어쩌나.

그 비참한 시간들이 정말 나 때문이었던 거면 어쩌나.

극심한 죄책감에 눌려졌던 두려움이 폭발했다.

어허어엉.

울 생각은 없었는데, 한번 울기 시작하니 멈춰지지 않았다. 목에서 꺽꺽 소리가 나는데도 말이 되지 못한 설움이 끊임없이 넘쳐흘렀다.

웅크린 등에 큰 손이 닿았다.

체온이 따뜻했다.

그의 존재는 그 체온보다도 더 따뜻했다.

가장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당한 그녀에게, 제 목숨을 내어 주고, 불사도 아닌 몸으로 그녀를 보러 여기까지 와 주는 그를.

‘이런 당신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가 한참 그렇게 우는 동안에도, 그는 울지 말라고 달래지 않았다.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것처럼 긴 시간 등을 토닥여 주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끝이 없이 나오는 것들을, 그녀는 그 밤 내내 토해 냈다.

말이 되지 못한, 앞으로도 꺼내지지 않을 여러 가지 말들이 그 울음 속에 섞여들었다.

미안하다고.

정말 고맙다고.

나도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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