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254)

“…….”

“백가주의 새로운 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저희 아이들도 보통 숫자를 센 뒤 마시곤 했는데, 제가 신호라도 드릴까요? 셋, 하면 드시는 걸로요. 하나. 셋.”

“하, 하나 다음에 둘이지, 왜 셋입니까.”

주명윤은 대답도 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시선에 재촉당한 백기하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여기 뭐가 들어간 건지만 알고 마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사실 특정 약초에 과민 반응을 보여서, 몸에 맞지 않는 건 먹으면 안 되는…….”

필사의 미소가 다시 떠올랐지만, 제 할 말을 다 끝낸 주명윤은 여전히 그런 백기하를 가만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먹어야지요. 누가 주신 건데. 한 그릇이라도 더 마셔야 늘 젊게 보일 수도 있고.”

어색한 웃음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백기하가 눈을 질끈 감고 입안에 탕약을 들이부었다.

나이 차가 나는 부인을 얻기 위해 이 정도도 못 하겠는가.

들고 있는 그릇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백기하의 입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것을 본 주명윤은 그제야 싸늘했던 분위기를 거두고 “잘 드시니 제 마음도 참 흡족하군요.” 대답하며 빈 그릇을 가져갔다.

“제가 특별히 신경 썼습니다. 이걸 만든 약제사가 무게까지 재 가면서 재료를 아끼지 뭡니까. 그래서 제가 백가주를 생각해 몸에 좋다는 재료는 한 바가지씩 더 넣고 달이게 했습니다.”

……아니, 뭐라고요?

“한데 만들어진 게 너무 걸쭉해서 저희 가문 대대로 아껴온 비장의 약술과 마침 오늘 고깃국이 아주 잘된 것 같아 그것도 넣었습니다. 좀 어떠십니까.”

좀 어떠냐니.

죽을 만하냐.

묻고 싶으신 것이 이것 맞습니까?

다행히 주명윤은 목적을 달성하자 후련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백기하는 서둘러 입에 문 것을 게워 냈다. 하수구 냄새가 나는 폭포수가 쏟아졌다.

* * *

세화의 앞은 온통 어둠이었다.

검은 안개가 시야를 모두 가로막았고 매캐한 냄새가 불길한 기운을 뿌리며 공간을 잠식했다.

그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두려움에 떨며 두리번거렸다.

그 안개 뒤에서,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붉은 눈을 가진 그림자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달아나려 몸을 돌리는 그녀를 그림자가 단번에 잡아챘다.

거대한 검은 손을 휘둘러 두려움에 떠는 세화의 뺨을 내려치고 발로 짓밟았다.

“!”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동시에 소리가 되지 못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림자는 세화의 손발톱을 뽑고, 채찍을 내리쳤다.

폭력은 무자비했으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달아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몸을 웅크렸다.

힘껏 당겨 물은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검은 그림자는 남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고, 여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언니의 부모님과 두 오라버니를 엮어서 백가와의 내통 증거를 만든 사람도 나야.”

“잘못했다고 이 자리에서 큰 소리로 고하고 내 발밑에서 빌어.”

“누가 저 입을 막아라!”

“그냥 죽어. 이제 그만 내게 모두 넘기고 떠나. 좋은 곳으로 가라고.”

그 목소리에 반응하듯 그녀를 뒤덮은 안개가 웅웅 울었다.

“집행하라!”

“집행!”

“가문의 반역자를 참수하라!”

“참수하라!”

달아나고 싶었으나 주변은 모두 칠흑 같은 어둠뿐이라 어디로 달아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발밑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도망쳐도 그녀를 지배하는 이 검은 그림자로부터 달아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이 몰려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커다란 짐승의 포효가 들려왔다.

“―――!!!”

어둠을 잡아 찢을 듯한 위협적인 소리였다.

세화는 제 머리에 범벅된 붉은 피를 닦아 낼 생각도 못하고 겨우겨우 눈을 떠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저 멀리 거대한 백호가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검은 그림자에게 달려들었다.

“!!”

두 거대한 생물은 뒤엉킨 채 서로의 급소를 노리며 살기 어린 공격을 내질렀다.

어둠을 가르며 시작된 싸움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허공으로 낭자한 피가 흩뿌려졌고 서로의 살점을 잡아 뜯는 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림자의 힘도 범상치 않았고 크기까지 거대했다.

허나 짐승의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에는 당해 내지 못했다.

그림자는 제 분노를 감추지 못하면서도 이내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몸을 감췄다.

그녀는 저를 괴롭혀 왔던 그림자가 달아나는 모습을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망연히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백호와 눈이 마주쳤다.

백호의 앞발과 입가는 그림자의 피로 흥건했으나 세화는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

탈피했을 때 보았던, 그 짐승이라고. 그것이 기억이 났다.

제 앞발과 입가에 묻은 피를 혀로 핥아 닦아 낸 짐승은 그녀에게로 다가오는가 싶더니 약간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선 다음 바닥에 엎드렸다.

가까이에서 보는 짐승은 마치 작은 언덕처럼 거대했다.

빛이 나는 듯한 하얀 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세화가 엉망인 몸을 이끌고 천천히 다가갔다.

짐승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그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미동이 없었다.

세화의 손이 백호의 몸에 닿았다.

손끝에 닿는 털은 매끄럽기 그지없었었고, 무척이나 따뜻했다.

마음대로 만졌건만 백호는 오히려 기분이 좋다는 듯 그르렁거릴 뿐 어떤 거부감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녀는 엎드리듯 제 앞에 있는 거대한 백호의 위에 몸을 기댔다.

짐승의 호흡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리는 털이 뺨을 간질였다.

그렇게 누워 있는 동안 그녀는 그림자와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 외에도 이 백호의 몸에서 어떤 오류를 읽어낼 수 있었다.

‘뭐지?’

제 앞에 엎드린 하얀 털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검은 선들을 바라보던 그녀가 두 손을 백호의 몸 위에 올렸다.

세화의 손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손바닥 안에서만 짧게 반짝이던 푸른 빛은 이내 백호의 몸을 다 덮을 정도로 밝게 빛났다.

어딘가 불안정하던 짐승의 호흡이 평온해졌다.

그녀가 그것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치마 끝을 무언가가 살포시 잡아당겼다.

흘끗 돌아보자 머리는 푸르고 몸통은 하얀 작은 새끼 뱀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작고 하얀 고드름 같은 꼬리가 삐죽이 솟은 채 흔들렸다.

‘아, 귀여워라.’

새끼 뱀의 말간 시선 안엔 몰라 볼 수 없는 호의가 그득했다.

그녀가 작은 뱀을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

스르륵 바닥을 기어 몸을 피한 새끼 뱀은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 그녀의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이윽고 그 뱀은 그녀의 손 위를 기어 백호의 털 사이로 스며들었다.

백호는 귀찮다는 듯 뱀이 오른 장소를 흘끗 보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스라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백호의 몸이 그때부터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어디를 가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어쩐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백호 역시도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마지막까지 목을 울렸다.

그리고 백호와 그 안에 스며든 작은 뱀의 형체가 함께 사라진 곳에는 투명한 빛을 뿜어내는 보라색 영단이 있었다.

영단을 들어 올린 세화가 그것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마치 물처럼 녹아 입안으로 흘러든 그것은 그녀의 식도를 타고 오장육부로 스며들었다.

제 안에 들어차는 힘을 느끼던 순간, 시야에 닿는 모든 것이 새하얗게 변했다.

* * *

어떤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세화는 심한 두통을 겪으며 깨어났다.

“으윽. 윽.”

악문 잇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대체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렇게 아픈 거지?’

그때 누군가 고통으로 잔뜩 굳은 그녀의 상체를 조심히 일으켜, 무언가를 그녀의 입에 흘려 넣었다.

그녀는 마치 사막에서 비를 만난 사람처럼 그 손을 부여잡고 입안에 들어오는 것을 정신없이 삼켰다.

한 방울이라도 더 마시기 위해 약을 치우려는 손등을 다급하게 부여잡았다.

필사적으로 손을 잡아끈 통에 그녀의 손톱이 누군가의 피부 위를 거세게 긁었다.

고통이 일었을 텐데도 그 손은 제 것을 세화에게서 강제로 떼어내지 않았다.

세화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 이후에야 자신의 손을 빼내며 그녀를 뒤로 편안히 눕혀 주기까지 했다.

‘이게 다 뭐람. 통증이 너무…….’

그녀는 통증이 가실 때까지 이마를 부여잡은 채 웅크렸다.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온몸에 식은땀이 흠뻑 배어났다.

두통만이 아니었다. 마치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얻어맞기라도 한 양 온몸이 다 아팠다.

‘뭐지? 어디서 떨어지기라도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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