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254)

* * *

세화가 나고 자란 주가 권역의 저택은 백기하의 생각보다 더 고요했다.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을 둘러싸고 세워진 하얀 건물들 사이로 새들의 울음소리가 노랫소리처럼 반사되며 퍼져 갔다.

창 너머에는 햇빛이 내리비치는 정원의 경치가 환상적으로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백기하는 그 모든 것들을 한 번도 눈에 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엔 오직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세화만 있었다.

‘오 년 만인데, 우리.’

그가 땀에 젖은 세화의 머리를 가지런히 넘겨 주며 생각했다.

‘계속 이렇게 눈을 안 보여 줄 거야?’

탈피는 잘 끝마쳤건만 어째서 이렇게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일까.

‘내 영력이 혹 당신의 탈피를 방해한 건 아니겠지?’

백기하의 시선이 지극한 염려로 잔뜩 가라앉았다.

‘……미안.’

당신이 그 밀실에 갇혀 있다는 걸 더 빨리 알아채지 못해서.

오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는 걸 더 빨리 알아채지 못해서.

끝까지 제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되었을 텐데.

그녀의 소식을 종종 알아보기라도 했으면 되었을 텐데.

그녀가 결코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일부러 그녀의 소식을 조금도 알아보지 않았다.

혹여, 혼인식을 얼마나 성대하고 즐겁게 치렀는지.

아이는 몇을 낳았는지.

주가의 가모로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등의, 결코 알고 싶지 않은 일들을 알게 될까 봐.

한데 그 외면의 끝이 오 년 전부터 밀실에 갇혀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으니.

백기하의 손이 주저하다가 세화의 손을 감싸 쥐었다.

가느다랗고 하얀 손을 들어 올려 손끝에 입을 맞췄다.

힘없이 꺾이는 그것을 제 이마에 가져다 댔다.

“……이제 그만 눈을 떠 봐. 너무 걱정시키지 말고.”

그때였다. 그의 날카로운 감각이 뭔가를 잡아낸 것은.

잡고 있던 손을 황급히 이불 아래로 넣은 백기하가 서둘러 세화의 침상과 가장 먼 곳에 떨어져 앉았다.

그렇게 거리를 두고도 그의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 때문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발소리가 가져올 어떤 것 때문에.

인기척이 난 후, 누군가가 시종들 몇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새하얀 사기그릇이 탁자에 닿는 소리가 세차게 울렸다.

탁!

“시종들을 내쫓아 문밖에 세워 두고 둘만 이 방에 계셨습니까?”

주명윤이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듯 물었다.

애써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백기하는 긴장한 자세로 눈을 감은 채 결코 돌아보지 않았다.

주명윤이 뭐라 물어도 영력 증진을 위해 내내 명상을 하고 있었다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명상에 방해가 될지 몰라 시종들을 잠시 내보낸 것뿐이라고.

자신은 절대 저 아가씨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고.

그렇게 모르쇠를 할 작정이었으나.

“그래서, 제 예비 사위 자리를 원하신다는 분은 어디 계시는지.”

……그 결심이 오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백기하가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런, 오셨습니까. 제가 명상에 너무 심취해 있다 보니 그만…….”

하던 말을 다 끝맺지도 못한 채 백가주의 시선이 잔뜩 흔들렸다.

“또……, 또 가져오셨습니까?”

사기그릇 안에 그득 들어 있는 무언가를 본 백기하는 억장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이런 귀한 것을 왜 자꾸 절 주십니까. 좋은 것은 신영께나, 아니면 내내 전선을 지키셔야 하는 두 아드님께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주명윤이 역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끊었다.

“손님 대접이 그리 박한 곳이 아닙니다, 주가가.”

“……하하.”

주명윤이 가져온 사기그릇 안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역겨운 냄새가 피어올랐다.

게다가, 이번 건 아까 오전에 마신 것보다 더욱 힘겨운 냄새가 나는 것이…….

“약재가 바뀐 것입니까? 이, 이번엔 또 뭡니까.”

백기하가 필사적으로 미소를 띠며 물었다.

저 멀리 서 있던 주가의 시종은 이제는 그리 낯선 광경도 아닐 텐데 새삼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래. 말로만 듣던 백가 신수가 계속 이리 나약한 모습을 내보이고 있으니 신기하기도 하겠지.’

가문의 명예를 생각하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백기하도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제 보고야 만 것이다.

미소가 미소를 부른다고, 내내 저를 흰 눈으로 보던 미장이 제가 미소를 띠는 순간 어쩔 수 없다는 듯 표정을 누그러뜨리는 것을.

그 이후 백기하는 부단한 노력으로 시종일관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말을 걸고 있었다.

“제가 세심히 살펴보니 백가주께서 명상도 자주 하시고. 긴 여정에서 쌓인 피로가 보통 약재로는 잘 풀리지 않는 것 같더군요. 조금 더 건강을 회복하시면 좋을 듯하여 약재를 살짝 바꿔 보았습니다.”

“하하.”

오히려 독약이라면 먹고 데굴데굴 굴러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라도 하지.

‘저 그릇 안엔 또 얼마나 많은 귀한 약재들을 때려 넣은 것일까.’

온갖 좋은 재료들을 넣고 달인 덕분에 먹고 나면 실제로 몸이 좋아지는 게 느껴지니 거절할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대체 뭘 넣으면 이런 역겨운 구린내가…….’

일단 뭐가 들어갔는지 제발 정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그럼 이제 은침을 주거라.”

주명윤이 시종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백기하는 신수고, 신수는 본래 불로불사이니 은침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신수가 태어나지 않게 되고, 더는 주가의 능력인 천리안이 발휘되지 않게 되면서 주가의 예법도 바뀌었다.

의심 많은 신영이 누가 저를 독살하기라도 할까 봐 가주나 귀빈에게 올리는 모든 음식을 은침으로 확인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만이 백기하가 살 방도였다.

주가의 예법에 따라, 은침을 담그지 않은 음식은 먹지 못한다.

그렇다. 은침만 없으면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예법이 최고야.’

하여 주가에서 제게 붙여 준 하인에게 천 번은 당부했다.

이 방에서 또다시 은침을 꺼냈다가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보여 주겠다고.

헌데 이 시종이 그 협박을 잊었는지 품에서 뭔가를 꺼내려는 눈치가 아닌가!

‘저, 저…….’

마음이 급해진 백기하가 시종을 향해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살기를 퍼뜨렸다.

다행히 시종은 백기하의 살기를 받고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은 듯했다.

품을 뒤지다 말고 뻣뻣하게 몸을 굳힌 그가 고개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죄, 죄송합니다. 은침은 없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한 듯해 백기하 역시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분명 오전까지 썼던 은침을 잘 둔다고 두었는데 그 이후로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

“은침을 다시 가져오려 해도 일각은 걸릴 터인데, 그사이 탕약이 다 식지 않겠습니까. 식은 탕약은 먹지 못하니, 이건 저녁이나, 아니면 내일 다시 먹는 건 어떨까요?”

주명윤이 한참 만에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그러시군요. 그러면 혹시 제가 직접 기미를 보아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탕약을 받침대에 조금 덜어 그것을 마셨다.

“독이 없는 것은 확인이 되셨겠지요?”

그리고는 백기하를 향해 다시 그릇을 내밀었다.

“그럼 이제 드십시오.”

“…….”

‘이런, 이런 독한 분이 있나. 나에게 이걸 먹이겠다고 자기까지 마시다니.’

코앞에 디밀어진 사기그릇에서는 썩은 내가 났다.

백기하는 전장에서도 느껴 본 적 없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런 거……. 이런 거…….

잃어버린 불사를 돌려준다 해도 먹을 수 없다.

마치 진흙같이 걸쭉한 점도를 가진 액체에서 풍기는 꼬랑내는 가히 엽기적이었다.

이런 걸 입에 넣으라 하시다니. 내가 미장께 뭘 그리 잘못했던가.

‘사랑이 잘못은 아니지 않나.’

차라리 결투라도 해서 검으로 맞았으면.

직접적인 고통이 이것보단 나을 테니.

“백가주, 왜 그러십니까. 몸에 좋은 것입니다. 설마 제가 백가주를 독살하려 한다고 오해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그, 그럴 리가요.”

“정말 몸에 좋은 것입니다. 백가주께서도 당신을 믿어 달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백가께서도 절 믿고 쭉 들이켜 보시지요.”

원래 이런 걸 드셔야 나이보다 젊게 보이시고, 그래야 혹시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처자와 혼인하시게 되어도 어울리실 거라며 주명윤이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하하. 자비 없이 제 딸을 육가의 희생양으로 끌고 가겠다고 이곳까지 오신 분이시니, 물론 그 처자가 제 딸은 아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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