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막에서 나오니, 이미 짐작했는지 다들 천막을 걷고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사이 멀리서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한발 늦게 아들들이 도착한 것이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찬 주가한과 주가윤은 뛰어내리듯 말에서 내리자마자 주명윤을 향해 달려왔다.
“아버지! 세화는요.”
“세화는 무사한 겁니까?”
“그래. 다행히 탈피가 잘 끝난 듯하다.”
“하. 정말 다행입니다.”
“딱한 것. 이런 곳에서 부모님도 오라비들도 없이 홀로 탈피를 치르다니.”
“제대로 가족과 시간을 보낸 적도 없는 아이인데 탈피도 혼자 치르고. 아버지, 대체 이런 아이를 어떻게 백가에 보낸답니까.”
“맞습니다. 지금이라도 신영께 목을 내놓고 간언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아버지.”
“…….”
“아버지?”
주가한과 주가윤이 갑자기 굳어진 제 아버지를 불렀으나, 노장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어떻게 백가에 보내냐는 아들들의 말에, 그간 쭉 생각해 왔던 것에 대해 뭔가 실마리가 잡힐 듯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아들들이 합류했을 때.’
“세화의 백가행 얘기를 듣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저희는 둘 다 신영의 앞에서 목을 내놓고 그 명만은 재고해 주십사 청을 올리러 가는 길입니다!”
“맞습니다! 어찌 어린 동생까지 그런 의무를 짊어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목숨을 내놓더라도 어떻게든 세화만은……!”
‘이 녀석들이 그런 일을 마구 떠들었는데도.’
주명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걸 듣고 있던 백기하는 반응이 전혀 없었지. ……마치 이미 세화가 백가에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친해지고 싶다고 하면서 무릎까지 꿇었다. 무장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런 주제에 세화의 백가행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군요. 그가 따님과 지금 함께 오고 있군요. 이틀이나 걸리는 이 길을…….”
‘또, 소가주와 내 딸이 함께 있다는 걸 신경 쓰질 않나.’
이상하게도 내내 정리되지 않던 생각이.
백기하와 함께 한 이후부터 내내 주명윤을 혼란스럽게 하던 그 생각들이, 딸을 끼워 넣으니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만약 괜찮으시다면 주가의 영지에 머무르는 동안은 꼭 원로님의 안내를 받고 싶습니다.”
“원로께서 여기 계시면 자녀분들의 혼사는 진행되다가도 멈추는 게 맞습니까?”
“심성으로는 저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하시던 말씀을 계속해 주시지요. 매제로 삼으실 수 있는 조건에 또 뭐가 있습니까?”
“제가 본디 그런 이가 아닙니다. 연장자에 깍듯하고, 품행 방정하고. 사고에 모남 없고, 약자를 배려하고 혼……. 마음이 넓으니, 혼, 혼인하면 부인에게도 잘할 것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절 아, 아들로 여겨 주시지요, 아, 아버님.”
“형님들.”
“…….”
주명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럴 수가 있나? 백가주는 지금껏 내 딸을 만난 적이 없잖아.’
그는 백가의 영지에 있었고, 제 여식은 내도록 주가의 영지에만 있다가 인계로 내려갔는데. 그가 대체 어디서 세화를 만났단 말인가.
허나 그 목적이 아니라고 한다면 생각은 또 막다른 길을 만난 듯 실마리를 잃고 끊겨 버린다.
“…….”
딸을 넣으면 상황이 들어맞는다.
딸을 빼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어진다.
“제가 하나 분명히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제 방문이 결코 주가에 해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그래. 주가에는 해가 되지 않겠지. 우리 가족에게 해가 될 뿐이지.’
“미장 어른.”
“미장 어른.”
그때 사람으로 변한 백기하가 한발 늦게 천막에서 나오며 그를 불렀다.
짐승으로 변용했던 영향인지 아직 그의 몸에서 다 사그라들지 않은 영력이 일렁였다.
그 상태로도 그는 주명윤을 향해 조심스럽게 팔을 내밀었다.
“어르신, 괜찮으시다면 따님을 잠시 제가 안고 걷겠습니다. 오늘 제 기운의 영향을 받아 탈피를 마쳤으니 제 영력이 있으면 더 빨리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미장 어른?”
가만히 고민하던 주명윤이 백기하를 보며 물었다.
“백가주.”
“네.”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네. 말씀하십시오.”
“지금 부르시는, 그…….”
“그?”
“그, 호칭 말입니다. ‘미장 어른.’”
“네.”
“혹시 그 미장의 의미가,”
“아,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대로 좋은 뜻입니다. 정말입니다. 존경한다는 의미의 그런-.”
“저도 제가 괜한 추측을 하는 것 같습니다만…… 혹시 그 미장이 ‘미래의 장인’입니까?”
“…….”
백기하의 말을 자르며 주명윤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대답해 보십시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거짓말은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만.”
“…….”
“…….”
“…….”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들의 사이로 차고 냉랭한 바람이 거칠게 지나갔다.
어느새 세화의 두 오라비들 역시 그들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주명윤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제 딸을 언제 어디서 만나신 겁니까? 인계입니까?”
“……아, 닙니다. 제가 언제 따님을 보았다고. 저는 오늘 처음-.”
“거짓말을 하셨다가 사실이 아님이 드러나게 된다면 가문을 걸고 맹세컨대 저는 절대로 백 가주를 사위로 맞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뭐, 거짓말을 하지 않으셔도 혼인은, 시킬지 안 시킬지 모르지만요.”
“…….”
“너무 뜬금없는 말인가요. 생각해 보니 저도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부끄러운 조건을 거는지 모르겠군요. 백가주는 제 사위가 되실 생각도 없으실 텐데, 죄송합니다. ……그래서 어디서 만나신 겁니까. 인계입니까?”
“…….”
“오늘이 처음이 아니지요?”
“…….”
“혹시.”
주명윤이 이 부분에선 잠시 이를 물었다.
“혹시 백가행에……. 제 딸이 대신 가게 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서 여기까지 딸을 데리러 오시기라도 한 겁니까?”
“…….”
“…….”
“…….”
긴 침묵이 이어졌다.
주명윤이 아들을 불렀다.
“가윤아.”
“네.”
“너 이곳으로 달려오기 전에 또 백가주에게 검을 배우고 있었느냐. 네 검이 아예 백가주의 허리춤에 있구나.”
“이리 주십시오.”
가윤이 냉랭한 태도로 백기하의 허리에서 검을 풀어 가져갔다.
“가한아.”
“네.”
“네가 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해 보아라.”
“배움이 육도에 어긋남이 없다면 좋은 배움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상대를 가려야겠지요. ……제가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아버지. 두 번 다시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겠습니다.”
“저…… 원로 어르신.”
주명윤이 싸늘한 눈으로 백기하를 보며 대답했다.
“미장 어른이라고 하시던 분이 호칭은 왜 바꾸시는지.”
“하하…….”
백기하가 두 아들들이라도 다시 불러 보려 하였으나 그쪽에서 날아오는 시선은 더 험악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 표정들을 보며 백기하의 시선이 적잖이 흔들렸다.
‘이걸, 어떡한다…….’
* * *
세화는 주명윤에게 안겨 집으로 돌아왔다.
의식을 잃은 그녀를 영선이 정성껏 돌보았다.
하지만.
쾅!
“탈피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흘이나 됐는데 아직도 깨어나지 못할 리가 있습니까. 백기하, 그자를 족쳐 봐야 합니다!”
복귀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온 주가윤이 조급함에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가까스로 얻은 칠 일의 말미였건만.’
신영은 인계에서 돌아오지도 않으셨고.
탈피를 마친 여동생은 여태 정신을 차리지 못한 데다가.
형과 그를 여기까지 달려오게 만든 원흉은 태연하게 집안에까지 기어들어 와 있는 형국이었으니.
주가윤의 울화가 목 끝까지 치미는 것도 당연했다.
첫째 주가한 역시 음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전 아버지께서 어찌하여 그를 세화의 방에 머무를 수 있게 허락하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가윤이와 제가 백가주에게서 세화의 백가행에 대한 거절을 받아 내 보겠습니다.”
“맞습니다. 저희가 능력은 그자보다 모자랄지 모르나, 목숨을 걸 의지는 그자보다 강할 것입니다.”
주명윤이 뭔가를 기다리듯 때때로 문가를 돌아보며 아들들에게 대답했다.
“너희 마음을 어찌 모르겠느냐. 허나 자윤 원로가 준 시간은 일주일뿐이라 하지 않았느냐. 뒷일은 이 아비가 알아서 할 터이니 너희는 이만 자리로 복귀하거라.”
“아버지!”
그때였다. 시녀 하나가 쟁반에 사기그릇을 담아 방으로 들어왔다.
“왔구나. 잘 달여졌느냐.”
“예.”
확인이라도 시켜 주듯 시녀가 사기그릇의 뚜껑을 여는 순간이었다.
“!!”
“!!!”
주명윤의 두 아들들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독이라도 본 듯, 그릇에서 먼 곳으로 황급히 몸을 피했다.
“아, 아버지? 대, 대체 그, 그게 뭡니까?”
“너희도 그때를 기억하느냐. 백가주가 오랜 여정으로 지쳐 발끝이 후들거린다고 했던 것을.”
“네, 기억이 나긴 합니다.”
“우리 주가가 그리 야박한 곳은 아니지 않느냐. 지친 백가주를 대접하고자 특별히 준비한 약탕이다. 이미 사흘 내내 가져다 드리고 있지.”
“……그가 먹긴 합니까?”
약탕을 내려다보던 주명윤이 차갑게 대답했다.
“먹지 않으면 어쩔 것이냐. 그 어린것을 반드시 끌고 가야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내 집에 들어앉아 있는데. 내 집의 대접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다른 집으로 가셔야지. 그게 싫으시면 먹어야 할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