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254)

아가씨의 몸을 휘감은 푸른 영력은 영단 때문인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하나가 남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저 새하얀 영력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이란 말인가.

이윽고 그 영력들은 서로에게 자신의 색을 덧씌우며 섞여 들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렇게 세화의 몸을 허공으로 띄운 영력은 그 밤 내내 허공에서 화려하게 들끓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힘은 점차 맑고 투명한 보랏빛으로 변해 가며 안정세를 보였다.

하지만 그와 비례해 영력이 몸에 정착되는 고통은 극심해지는 듯했다.

표정이 일그러진 세화가 고통스럽게 몸을 뒤트는 동안, 영선은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고 꼬박 세화의 곁을 지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소중한 제 아가씨께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속이 상할 수가 없었다.

하여 천막 안에서 탈피가 제발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새벽의 어느 순간이었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뭔가가 천막 안으로 바람처럼 스며들어 왔다.

“……!”

거대한 몸체에 경악한 영선이 몸을 일으켰다.

그건 한 번도 보지 못한 크기의 백호였다.

‘어, 어째서 이런 짐승이 여기에……!’

눈이 크게 벌어지고 공포감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이 짐승은 영선에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천천히 천막을 가로지른 백호가 허공으로 떠오른 세화의 옆에 섰다.

‘아, 아가씨!’

이를 악문 영선이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팔을 활짝 벌리고 재빨리 끼어들어 백호와 제 아가씨 사이를 가로막았다.

백호의 시선이 처음으로 영선에게 닿았다.

그 심해보다 새파란 눈동자에 영선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고 나자 이상하게도 두려움이 줄어들었다.

어쩐지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그걸 증명하듯 백호의 커다란 머리가 영선을 부드럽게 밀었다.

영선이 자리를 비켜 주자마자 짐승은 세화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울부짖듯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렸다.

“――!!”

소리 없는 포효가 천막 안에 퍼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하얗고 푸른 기운이 짐승의 몸 주변으로 피어올랐다.

세화에게 다가간 짐승의 기운은 그녀를 둘러싼 영력을 끌어안듯 감싸 안았다.

잠시 후 일그러졌던 세화의 얼굴에서 서서히 고통스러운 기색이 사라졌다.

거세게 타오르던 영력의 파동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 과정들을 본 영선의 얼굴에서도 긴장이 풀리며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를 돕기 위해 온 거구나.’

저 백호의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제 아가씨에게 도움이 된다면 됐다.

어느새 편안해진 아가씨의 얼굴을 확인한 영선은 천막 벽 근처로 물러나 쪼그리고 앉았다.

제 아가씨의 탈피를 조금은 마음을 놓은 채 지켜보았다.

* * *

주명윤이 도착한 것은 새벽이 막 아침으로 바뀌던 시점이었다.

두두두두두―.

“원로 어른이시다!”

“원로 어른께서 오셨다!”

그렇지 않아도 두꺼운 천막 속의 일을 궁금해하던 이들이 거친 말발굽 소리에서 주명윤의 등장을 알아보고 환호했다.

“세화는?!”

“이쪽입니다, 어르신. 이쪽으로 오십시오.”

뛰어내리듯 말에서 내린 그가 사람들이 안내하는 막사로 허겁지겁 다가갔다.

하지만 천막을 들추며 안으로 들어서다 말고 깜짝 놀라 멈춰섰다.

‘……백가주?’

거대한 백호가 마치 제집인 양 웅크린 채 땅에 턱을 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 백가주가 신수로 변용한 모습을 전장에서 본 적이 있었기에 바로 알아보았다.

‘뭐지. 다행히 백가주가 먼저 도착해 탈피를 도와준 건가?’

“어르신, 아가씨는 저기 계세요.”

주명윤이 들어올 때부터 일어서 있던 영선이 한쪽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자 반원으로 구부러진 백호의 허리께에서 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화는 거대한 짐승에게 제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흑단같이 검고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얼굴은 단번에 어른이 되기라도 한 양 몰라볼 정도로 성숙해져 있었다.

탈피를 마친 것이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달려가 딸의 상태를 살펴봐야 할 주명윤은 어쩐지 그 자리에서 조금 주춤거렸다.

‘……뭐지.’

둘은 분명 처음 만나는 사이일 텐데.

‘뭔가 이상한데. 뭐지, 저 애틋함은.’

내 눈이 잘못된 것인가.

몇 번을 다시 보아도, 딸을 바라보는 백가주에게서 어쩐지 조금 묘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더구나 신수의 청력이라면 그가 온 것을 모를 리가 없건만.

지금은 푸르른 눈동자로 딸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느라 인기척조차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상한 건 딸도 마찬가지였다.

탈피 직후엔 감각이 몹시 예민해져 낯선 향과 감촉을 피하는 편일 텐데도.

‘왜 저렇게 평온해 보이는 거지?’

신수의 기운이 낯설 텐데도 딸은 따뜻한 털 속에 얼굴을 반이나 묻고 기대어 자고 있었다.

더없이 안온하게 보호받는 사람처럼.

다른 이의 접근을 밀어내는 듯한, 세상에 단 둘만 남은 듯한 저 분위기를 주명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기분 탓이겠지.’

그래. 둘은 오늘 초면인데 애틋하고 말고 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자꾸 백가주를 의심하다 보니 이제 별게 다 이상해 보이는가 보군.’

분명 그럴 것이다.

‘어서 세화의 상태나 확인하자.’

그렇게 주명윤이 앞으로 한 발짝 더 내디디며 가까이 갔을 때였다.

“크르르르르.”

커다란 백호가 이빨을 드러내며 목을 울렸다.

날카롭게 찢어진 푸른 눈이 침입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방향을 돌렸다.

공격적인 경고음이 그렇게 주명윤을 향해 날아오던 찰나.

“!”

백호의 눈이 명윤의 얼굴을 확인하고 동그랗게 뜨였다.

그리고 언제 위협했냐는 듯 이빨을 얌전히 감춘 채 가만히 침묵했다.

‘백가주?’

백호는 주명윤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백호의 모습을 주명윤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왜 저러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일단 딸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으니까.

“잠시 가까이 가겠습니다.”

그 목소리에 짐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화의 잠을 깨우지 않을 정도로 조심히 제 몸을 피며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주명윤이 여전히 뭔가 경직된 듯한 백호의 옆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얀 털 옆에 주저앉아 잠을 자는 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네 탈피는 꼭 내가 도와주려 했건만 결국 이번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구나. 그래도 무사히 탈피를 마쳐서 정말 다행…… 응?’

주명윤이 딸의 머리를 쓰다듬다 말고 또다시 잠깐 멈칫했다.

‘느낌이 뭔가 이상한데. 뭐지. 왜 영력의 느낌이 이렇지?’

보통 탈피를 막 마친 후엔 본신의 영력의 기운이 강해진다.

영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힘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인데, 이게 무슨 말이냐면.

주가의 근원은 불이니 막 탈피를 마친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때 뭔가 뜨끈뜨끈하다거나.

마치 열이 나는 것처럼 체온이 올라 있어야 정상이라는 뜻이었다.

‘헌데 왜 평소와 똑같지?’

모습을 보면 탈피를 마친 것이 분명한데 기운만은 탈피를 막 마친 느낌이 아니었다.

‘혹시 기미도 없이 탈피를 시작한 것과 관련이 있기라도 한 건가?’

그래서 탈피 과정을 물어보려 백기하를 불렀을 뿐인데.

“백가주.”

“……!”

‘이자는, 아까부터 왜 이러나.’

너무 눈에 띄게 긴장하는 눈치니 수상할 것도 없는데 뭔가 수상해 보인다.

하지만 뭘 물어본들 이 능구렁이가 제대로 대답할 것 같지는 않아, 잠시 고민하던 주명윤이 떠볼 상대를 바꿨다.

“영선아.”

“네, 원로 어른.”

“백가주께 인사는 드렸느냐.”

그렇지 않아도 영선은 주명윤의 입에서 백가주라는 호칭이 나오자마자 깜짝 놀란 상태였다.

“백가주이신 줄 모르고,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명윤 원로님의 따님, 세화 아가씨를 모시는 사영선이라고 합니다.”

“너 이 녀석, 이런 풍채와 기품을 가진 분이 백가주 이외에 또 있겠느냐. 당연히 백가주이신 줄 알아봤어야지.”

“송구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인사를 못 드린 일 외에 또 실례되는 일을 한 것은 없느냐? 백가주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진 않았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축시 말쯤 이곳에 당도하셨는데, 들어오신 후 바로 아가씨의 탈피를 도우시는 것을 보고 방해되지 않게 한쪽으로 비켜 서 있었습니다.”

“……그래? 탈피를 도와주시는 걸 보고 비켜 서 있었던 것이 다냐?”

“그럼요. 그리고 정신을 잃은 아가씨를 저리 꼬박 받쳐 주셨습니다. 천막 바닥에는 아가씨께서 타고 오셨던 가마가 영력에 의해 부서진 파편도 있고 하여, 감사하게 여기며 아가씨께서 깨어나실 때를 함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게 다라고?’

잠시 주명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그게 다라면 이 백가주가 제 딸의 은인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그가 도와주지 않았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런 가정이 중요한가?

지금 딸의 상태를 보면 뭔가 잘못될 수도 있었을 듯한데 그가 제때 도착해 도와줬으니 그것만으로도 순수하게 감사를 표해야 할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백가주. 탈피가 끝나 아이를 옮겨도 될 듯하니 이제 이동하시지요. 제가 딸을 데리고 나갈 터이니 모습을 변용하십시오.”

주명윤이 딸을 안아 들자 그제야 커다란 백호도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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