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254)

“뭐, 소가주님?”

영선이 급히 가마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녀의 눈에도 적혈마를 타고 위엄 있게 달려오는 주경현의 모습이 보였다.

소가주 역시 탈피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니고 있는 본신의 영력이 역대 가주 누구와 비교해도 월등히 높다고 누차 칭송받아 오지 않았던가.

그러면 분명 제 아가씨보다도 더 높다는 말일 터였다.

‘됐다. 소가주님께 말씀드리면 도와주실 거야. 비록 어제 아가씨와 그리 다투긴 하셨지만, 탈피는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소가주 일행이 가까워지자 영선이 버선발로 뛰어나가 그들의 앞을 막았다.

“소가주님!”

히히히이이잉―!!!

거대한 말이 거침없이 앞발을 치켜들며 멈춰 섰다.

“뭐냐.”

“소가주 님. 저희 아가씨를 좀 도와주십시오. 지금 탈피를 겪고 계시온데 아무도 도와주실 분이 없습니다.”

“탈피? 무슨 헛소리냐?! 그 애와 내가 어제도 본 것을 잊었어? 오늘 탈피를 할 아이가 어제처럼 아무렇지 않게 서 있을 수 있단 말이냐?!”

“하지만 정말입니다. 부디 한 번만 살펴 주십시오. 이러다 잘못되시기라도 할까 봐 걱정됩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영선이 땅에 머리를 박으며 애원했다.

“제발 부탁드려요, 소가주님. 이대로 외면하지 마시고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주경현이 코웃음 쳤다.

오전에 문을 넘은 후 그는 한 번도 쉬지 못하고 줄곧 달려왔다. 초소 병사들에게 세화의 일행들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은 참이었으니까.

‘감히 날 무시하고 이따위로 군다 이거지? 소가주인 날?’

분노한 그는 저 역시 대놓고 주세화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한데 뜬금없이 탈피라니. 감히 그따위 걸 변명이라고 내밀며 어제 일을 무마하려는 건가? 나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지나가려고?’

“일 없다! 그 아이가 제 발로 찾아와 내게 머리를 숙이고 사죄하기 전까지는!”

매몰차게 대답하고 떠나려는 주경현의 앞을 영선이 다시 한번 막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소가주님! 소가주님, 아무리 그래도 탈피가 아닙니까. 보호자도 없이 길에서 저렇게 계시니 문제가 생기거나 이대로 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제발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제가 뭐든 하겠습니다.”

“네까짓 것이 뭘 한다고 내 마음이 풀릴 성싶으냐! 탈피? 내가 오히려 탈피를 방해하기 전에 비켜라!”

“소가주 님!”

“비켜!!”

히히이이잉―!!!

거대한 말이 다시금 앞발을 치켜들고 위협했다.

그럼에도 영선이 머리를 숙이고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자 주경현의 호위가 영력을 사용했다.

펑!

“……컥!!”

죽을 정도로 강하진 않았으나 몸을 날려 버릴 정도의 영력이었다.

흙바닥을 나뒹군 영선의 입술 사이로 피가 흘렀다.

“윽……, 큭.”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린 그녀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무너졌다.

“하!”

주경현은 그런 영선과 여전히 가마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 세화를 시리도록 냉랭한 눈으로 바라본 뒤 말의 배를 찼다.

“탈피 같은 소리 하고 있구나. 진짜 탈피라 해도 나와 무슨 상관이냐! 죽을 테면 죽으라 해라! 명계에서나마 내게 사죄할 수 있도록!”

“소가주님! ……으, 큭. 소가주님!”

무섭게 표정을 굳힌 주경현과 호위들이 빠르게 멀어지는 동안에도 영선이 애타게 그들을 불렀다.

하지만 그들은 한 번 뒤돌아보지 않은 채 멀어졌다.

세화의 일행들이 서둘러 다가와 그런 영선을 부축했다.

“영선아. 영선아, 괜찮니!”

“영선아!”

“괜찮……. 명윤 장로님께는 누가 갔죠?”

영선이 떨리는 팔로 제 배를 부여잡은 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함섭이와 채수가 갔다. 말과 명패를 줘서 보냈으니 초소마다 말을 빌려 갈아타며 빨리 다녀올 거야.”

“네……. 일단 여기 진을 쳐야겠어요. 절대 움직이면 안 되니까.”

제대로 걷지 못하고 발을 질질 끌면서도 영선이 빠르게 명령했다.

인계에서 짐을 바리바리 가져오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급히 천막을 쳤다. 길 한복판에서 야영을 준비하는 일행의 손들이 분주해졌다.

세화를 좁은 가마 안에 그대로 둔 채 가마 주위로 천막을 올렸다.

‘가마 안에선 제대로 눕혀 드릴 수도 없고……. 어떻게 하지.’

사람들이 준비하는 동안 영선은 안절부절못하며 열린 가마 문 주위를 맴돌았다.

‘전조 증상도 없이 탈피가 찾아온 것을 보면 명윤 원로님께서 도착하시기도 전에 끝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아!’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게 없을까 손톱을 깨물며 고민하던 영선이 영단을 떠올렸다.

‘그래! 왜 그걸 생각 못 했지? 영단 안에는 영력이 가득하니 아가씨께 도움이 될 수 있을 텐데!’

영선이 아가씨에게 받아 제 소매 안에 넣어 뒀던 다섯 개의 영단을 먼저 제 아가씨의 품에 올려 두었다.

‘아가씨 본신의 영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연회에서 본 힘의 잔상이 만만치 않았어. 이 정도로는 분명 모자랄 거야.’

서둘러 밖으로 나간 영선이 야영 준비로 분주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물쇠로 걸어 잠근 궤짝 하나를 천막 안으로 질질 끌고 들어왔다.

자물쇠를 풀고 뚜껑을 연 그녀가 영단을 잡히는 대로 집어서 가마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도 혹시 몰라 최장명에게 받은 환석들까지 가마 안에 몽땅 쏟아부었다.

‘이거 아가씨가 입으로 먹어야 효과가 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만 놔도 될까?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이제는 신께 기도하는 것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부디. 이렇게밖에 놓을 수 없는 영단들이지만 그래도 뭔가 역할을 해 주기를…….’

* * *

주명윤은 좋은 주인이고 존경할 만한 인품을 가진 환족이었다.

다른 주가의 일원들처럼 쓸데없는 일로 하인들을 질책하거나 매질하는 일도 없었다.

쓸데없는 향락엔 돈을 낭비하지 않으면서도 하인들에게는 크게 보상했고, 그들에게 슬프고 어려운 일이 생긴 경우에도 마치 가족처럼 나서서 해결해 주었다.

발이 빠르다고 뽑힌 함섭과 채수도 그런 주명윤에게 도움을 받았던 이들이었다.

어린 아가씨가 부모와 떨어져 늘 홀로 지내는 것도 안타까운데, 탈피마저 저런 식으로 길에서 치러야 한다니.

‘그러다 혹 잘못되기라도 하면…….’

채수와 함섭이 미친 듯이 마편을 휘두르며 말을 재촉했다.

그런 둘의 이마에 금세 땀이 흠뻑 배어났다. 안색이 창백해지고 허벅지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쉬지 않고 초소가 나오면 사정을 설명한 뒤 패를 확인받고 말을 교환했다.

말을 타고 이틀 정도 달려야 하는 거리를 하루 반도 안 걸려 주파했다.

그리고.

“뭐라! 탈피 중이라고?”

“네! 어서…… 헉헉. 어서 가 보십시오.”

“인간, 계…… 초소에서 멀지 않습니다. 제발 빨리 가 보십시오. 헉헉.”

가까스로 주가 권역 내 주명윤의 저택에 도착한 그들은 터질 듯한 심장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명윤을 찾아 상황을 고했다.

명윤은 두 번 묻지 않았다.

“말을 가져와!!!!!”

호령 소리에 놀라 나타난 두 아들들과 백기하에게 상황을 설명할 시간도 없이 말 등으로 뛰어올랐다.

“이랴!!”

뒤늦게 시종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두 오라비의 눈도 크게 뜨였다.

“말!!!”

“말을 당장 가져와!!”

두 오라비 역시 지체없이 말을 타고 달려나갔다.

저택의 호위 몇이 빠르게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 사이엔 백기하도 있었다.

* * *

‘뭐지. 몸이 너무 뜨거워.’

경련하듯 몸을 비튼 세화가 연신 신음을 흘렸다.

눈앞은 온통 깜깜하기만 해, 제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때때로 온몸을 저리게 하는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그럴 때면 이를 악물고 그저 그 시간이 지나갈 때까지 버티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대체 뭐지, 이게. 왜 이러지.’

제 몸 주위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몰려들어 있었다.

옹기종기 모인 그것들은 그녀를 둘러싼 채 뜨겁게 열을 뿜었다.

‘가뜩이나 더운데 이것들이.’

하지만 치워 내려 해도 손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때였다.

“커헝―!”

깜짝 놀랄 만큼 커다란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새하얀 무언가가 그녀의 시야 안으로 뛰어들었다.

‘백……호?’

그것은 거대한 백호였다.

위엄 있는 검은 줄무늬가 눈처럼 하얀 털 위에 선명했다.

시리도록 냉혹하고 매혹적인 파란 눈이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짐승을 발견한 순간 고열로 인해 정신이 혼미한 중에도 깨달음이 왔다.

‘……잠, 잠깐. 잠깐만.’

짐승이 천천히 한 발,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마, 맙소사. 잠깐. 이, 이거 설마 탈피니? 그래? 정말 탈피야?’

유려한 근육을 그대로 드러낸 짐승의 몸은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발아래에서 바람을 일으켰다.

‘맙소사! 아, 안 돼. 왜 네가 와. 저리 가!’

그녀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백호의 접근을 거부했다.

손이라도 내젓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뒤돌아 도망치고 싶었으나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용. 용 어딨어. 용 데려와! 주가는 용의 핏줄이란 말이야!’

그녀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온 짐승이 사나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안 돼. 오, 오지 말라고. 용! 용 어딨는데. 용 데려와……!’

이내 크게 입을 벌리며 울부짖었다.

“커허어어엉―!!”

‘안 돼! 안 돼. 안 돼!’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녀의 격렬한 거부에도 아랑곳없이 커다란 백호가 그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안 돼―!!!!’

그 비명과 동시에 그녀의 피부가 손끝에서부터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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