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처럼 나무의 뿌리는 파내도 파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계속된 삽질에 세화와 영선 역시 점점 지쳐 갔다.
그나마 일행들이 세화가 이미 자는 줄 알고 짐 너머를 들여다보지 않아서 다행이지.
망도 보지 않고 이러고 있으니 누군가 짐 더미 너머를 조금만 신경 썼어도 그냥 들킬 뻔했다.
“아니, 이 가느다란 나무 하나가 대체……. 어어어어.”
땀을 뻘뻘 흘리는 영선의 삽질이 거칠게 이어질 때였다.
어느 순간 영목이 옆으로 기울었다.
깜짝 놀란 둘이 달려들어 넘어가는 영목을 붙잡았다.
“자, 조심. 조심.”
가느다란 나무를 조심히 옆으로 눕혀 놓은 세화가 깊이 패인 땅 안쪽을 손으로 훑으며 조금 더 파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
땅 아래에서 드러난 것을 본 영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아가씨 이건……!”
“저 앞의 궤짝 가지고 와. 하나도 빠짐없이 주워 담자.”
“네!!”
까만 흙 속에 그득 묻혀 있는 고시대의 영단들을 경악에 차서 바라보던 영선이 대답했다.
심마니가 된 듯한 기분으로 구덩이 안을 샅샅이 뒤지며,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영단을 캐내 궤짝에 담았다.
커다란 궤짝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보며 영선과 세화의 얼굴에도 희열이 피어올랐다.
* * *
“아, 아니. 두 분, 모습이 왜 그러십니까?”
이른 아침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일어난 일행들은 거지꼴이 되어 있는 아가씨와 영선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단이 어찌나 끝도 없이 나오는지. 일행들이 깨어나기 전까지 모두 수거하지 못할까 봐 조급해 단장할 시간도 없었다.
씻을 물을 준비해 주겠다고 일행들이 물러나자 세화와 영선은 마주 보고 웃기만 했다.
영단들은 모두 궤짝에 잘 담아 잠가 두고, 가장 마지막에 캐낸 열 개만 세화와 영선이 다섯 개씩 나눠 가졌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이 어젯밤의 흔적을 정리할 동안,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소매 속에 그것을 잘 넣어 두었다.
초소에서 주가의 권역까지는 말을 쉼 없이 달려야 이틀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세화는 가마를 타고 있었던 데다가 가져온 짐이 많아 속도가 느렸다.
이대로 닷새는 가야 할 터였으나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서인지 일행들의 얼굴은 밝기만 했다.
한 명이 노래를 시작하자 나머지 일행들이 웃는 얼굴로 가락을 이어받았다.
그 노랫소리들을 들으며, 가마 속 세화는 소매 안에 넣어 놓은 영단을 만져 보았다.
작은 구슬 같은 영단들은 처음엔 분명 차갑기만 했었다. 하지만.
‘……이상하네. 원래 꺼내 놓으면 이렇게 되나?’
그녀의 손이 닿은 이후부터인지. 아니면 공기 중에 드러난 이후부터인지 조금씩 은은하게 열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영력을 사용해 만진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반응이지? 영단은 보통 영력으로 발동시키고 입으로 삼켜야 효과가 있는 것 아닌가? ……별일은 아니겠지?’
정확히 느끼지 못한 것은 제 몸 역시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어째서일까.
‘……나도 왠지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리는데.’
이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 참 이상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세화의 의식은 어느 순간 끊어져 버렸다.
* * *
쾅!
굳은살이 거의 없는 커다란 손이 탁자를 부서져라 내리쳤다.
“갔다고? 내게 사과하러 오지도 않고?”
인계의 주가 저택에 남아 있던 주경현은 기가 막혀서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그는 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밤을 꼬박 기다렸다. 심지어 밤을 새웠다.
“오라버니. 어젠 정말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울먹이는 얼굴과 붉어진 눈가를 하고 찾아온 세화가 제게 용서를 빌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어떻게 오라버니께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었는지. 저는 그저 백가에 가게 된 것이 너무 두려워서……. 자꾸만 화가 나서…….”
‘분명 그런 말을 하며 내게 찾아올 줄 알았는데…….’
그 누구에게도 발휘해 본 적 없는 인내심이었다.
한데 돌아오는 소식이 이따위라니.
“예. 어제저녁에 이미 문을 통과해 환계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하. 그 아이가 아주 단단히 미쳤구나.”
어떻게.
내가 이제 마주쳐도 인사조차 할 필요 없다고 했는데.
그런 말을 듣고도 어떻게 이따위 태도를 보일 수가 있지?
“그 사촌이라는 사가 계집은 아직 인계에 남아 있습니다. 한번 데려와 얘기를 들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년에게서 듣긴 뭘 들어.”
“그래도 혹 모르는 일 아닙니까. 세화 아가씨의 태도가 갑자기 너무 바뀌었는데. 혹 명윤 원로 쪽에서 뭔가 일을 꾸미는 건 아닐까요?”
“됐다. 집어치워라.”
“소가주.”
“나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아닐 거다. 일을 벌이려면 오히려 평소와 같이 행동했겠지.”
주경현이 도무지 모르겠다는 의미를 담아 헛헛한 한숨을 쉬었다.
“헌데 그러면 정말 그 아이가 미치기라도 한 건가? 어떻게 며칠 만에 그렇게 말투와 행동이 거꾸로 뒤집힌 듯 달라지지?”
“어쨌든 일단 환계로 넘어가시지요. 신영께선 일이 틀어지시는 걸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명윤 원로의 여식이 백기하와 만나지 못하도록 하라셨으니 지금 가시는 게 좋으실 듯합니다.”
“……그래. 그래야지.”
‘주세화.’
주경현이 마디가 선명한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네가 정녕 내게 이러고도 후회하지 않는지 한번 보자꾸나.’
심복인 천령의 말처럼, 세화가 문을 넘어간 이상 그 역시 빠르게 그 뒤를 쫓아가야 했다.
차가운 얼굴을 한 주경현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인간계를 떠나 환계로 넘어가면서도, 그의 굳어진 얼굴은 내도록 풀릴 줄 몰랐다.
* * *
그 무렵 세화의 일행은 길에 발이 묶여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하인들이 불안한 얼굴을 한 채 누군가 이곳을 지나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식사 때가 되어 잠시 멈춰 섰을 때였다.
건량을 끓이기만 한 간단한 식사였지만 공기 중으로 고소한 냄새가 물씬 풍겨 나가자 모두가 즐거운 얼굴이 되었다.
가장 처음 그릇을 받아 영선이 제 아가씨에게 가져다 드리려 가마를 살짝 두드렸다.
“아가씨, 식사하셔요.”
하지만 안에선 어떤 대꾸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가씨? 혹시 주무세요?”
의아한 마음에 가마의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가, 영선은 들고 있던 그릇을 떨어뜨릴 정도로 깜짝 놀랐다.
“아가씨!!”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제 아가씨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또 열이 나시는 걸까 하여 황급히 이마를 짚어 보기도 하고 옷깃 사이로 손을 넣어 안쪽의 체온을 확인해 보기도 하다가 이유를 알아차렸다.
맙소사. 탈피다.
그걸 알아채고 나서부턴 건드릴 수가 없었다.
환족에게 탈피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대개는 보호자의 입회 아래 별 탈 없이 잘 끝마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대기 중의 영력이 줄어든 지금에 와서는 낮은 확률이나마 탈피에 실패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도중에 외부 자극을 받거나, 뭔가 문제가 생겼을 경우였는데, 그럴 땐 보통 신체가 훼손되거나 심할 경우 목숨을 잃기도 했다.
때문에 갑자기 탈피를 시작한 세화를 보며 영선이 당황한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탈피란 보통 이르면 보름, 늦어도 일주일 전부터 자각 증상을 보이니 보호자를 구할 여유가 있었건만.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탈피를, 아무런 전조 증상이 없이…….’
그사이, 완전히 늘어진 세화의 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가고 있었다.
창백한 안색과 고통스러운 신음에, 영선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떡하지.’
탈피는 보통 겪는 이보다 영력이 높은 자만이 도울 수 있다.
제 아가씨의 본신 영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상태에선 함부로 보호자를 자처하며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급히 일행 중 하나를 권역으로 보내 명윤 원로님을 모셔오라 하는 것뿐이었으니.
점차 고통이 심해지는지 세화가 몸을 뒤틀기 시작하자, 그걸 지켜보는 영선의 속도 타들어 갔다.
상황을 파악한 시종들 역시도 안절부절못하며 그들을 지키기를 한참.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던 누군가 반색하며 소리쳤다.
“누가 오시나 봅니다!”
뿌연 흙먼지와 함께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맙소사!”
눈이 좋은 어린 시녀 하나가 그 소리의 주인을 빠르게 파악했다.
“소가주님! 영선 언니! 소가주님이세요! 소가주님이 오고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