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254)

성질 같아서야 당장 저 순진해 빠진 아들놈들을 포승줄로 꽁꽁 묶고, 입도 열지 못하게 재갈을 물린 다음, 말에 얹은 채 말 궁둥이를 차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호위들이 보고 있었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해.’

그는 인내심 강한 무장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주명윤은 정말로 인내심이 강했다.

그랬음에도 백기하는 아주 짧은 시간만으로도 주명윤의 인내심을 바닥냈다.

그저 지극히 당연한 사고의 흐름에 따라 몇 가지 질문을 한 것뿐인데, 상황이 끝나고 나면 아주 희한하게도 자신만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고.

주위의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건만 자신만 괜히 마음을 넓게 쓰지 못하는 좀생이가 된 것 같고. 의심병 환자가 된 것 같고.

그러다 보니 답지 않게 자주 화가 치미는 것 같고.

‘가주란 다 이런가?’

주명윤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강적이다. 전장에선 미처 몰랐는데 심계가 지독해. 괜히 한 가문의 가주가 아니야.’

“헌데 명윤 님.”

“응?”

저 아들들의 등짝을 어떻게 내리치고 쫓아 보낼까 고민하는 그를 사단윤이 나직이 불렀다. 곧바로 바싹 다가와 뭔가를 보고했다.

“뭐라? 소가주님과 세화가 지금 주가 권역으로 오고 있다고?”

“예. 무사들이 그런 말을 하며 저보다 한발 앞서 초소로 달려가더군요.”

“가주께서 결국……. 정말로.”

정말로 백기하와 내 딸을 어떻게든 엮으려 하시는 것인가.

아들들과 얘기할 때 느꼈던 울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떻게 가주께서 나와 내 딸에게 이러실 수가 있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지금 따님께서 이곳으로 오고 계십니까? ……주가의 소가주와 함께요?”

백기하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엿들으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들려서. ……그런데 소가주와 함께 오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사단윤은 백기하보다 더 가까이 자리한 주가의 호위들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그 작은 소리를 들은 것도 놀랍지만.

“네. 그렇다고 합니다.”

긍정의 답변에 돌변하는 그의 눈빛이 조금 더 놀라웠다.

“그렇군요. 그가. 따님과. 함께. 오고 있군요. 이틀이나. 걸리는 이 길을…….”

마치 강조라도 하듯 말끝마다 힘을 줘서 뱉어 낸 백기하는 노려보듯 길 끝을 돌아보았다.

이렇듯 싸늘하고 예리한 표정은 전장에서조차 보지 못했었다.

소가주와 세화가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이, 속이 뒤집힐 만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나도 참,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백가주와 내 딸은 서로를 알지도 못하는데.’

하지만 저런 백기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지금도 또 뭔가 알 것 같은데…….’

뭔가가 계속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가 않는다.

‘그게 뭘까.’

그게 뭐든 간에, 중요한 건 주가의 호위들이 왔으니 백가주도 더 이상은 이전처럼 굴 수 없을 거란 사실이었다.

“충분히 쉬셨으면 이만 길을 떠나시지요. 여기서 저희 저택이 멀지 않으니 그곳에서 쉬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도착하는 대로 침소를 먼저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백기하 역시 순순히 말에 올랐다.

한발 앞서 출발한 주명윤의 아들들을 따라, 나머지 일행들도 주가 권역을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이거지. 말을 타고 있으면 이 정도 속도는 나와야지.’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동속도에 감격하느라 주명윤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와 함께 달리면서도 여전히 그들의 등 뒤, 초소가 있는 길 끝을 백기하의 시선이 언제까지고 응시하고 있었다는 걸.

* * *

세화의 의도대로, 인계에서 환계로 넘어가는 일행들은 늦은 저녁에 움직였다.

많은 짐들이 차질없이 뒤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세화는 제일 먼저 문을 건넜다.

문을 지키는 초소병들이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가씨셨군요. 소가주님이신 줄 알았습니다.”

“소가주님께선 아직 문을 통과하지 않으신 건가요?”

“네. 오신다는 소식은 전달받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러셨군요. 노고가 많으십니다. 아, 그리고 제가 인계의 짐을 모두 정리하느라 행렬이 조금 길어졌는데 전부 통과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헌데 어찌 이 시간에 오셨습니까? 지금은 길이 어두워 이동하시기가 쉽지 않으실 텐데요.”

“행렬을 꾸리느라 시간이 늦어졌는데, 막상 환계로 돌아오기로 하고 나니 조금이라도 더 고향의 기운을 느끼고 싶지 뭔가요.”

세화가 소맷자락을 들어 올리며 젖지 않은 눈가를 조금 닦아냈다.

“백가로 떠나고 나면 언제 다시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그 생각을 하니 조금도 더 기다릴 수 없어 이리 늦은 시간에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희 숙소가 부족해 내어 드릴 공간이 마땅치 않은데…….”

“염려 놓으십시오. 영지 경계선을 지키느라 고단하신 병사분들을 어찌 이런 일로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저희는 초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노숙할 예정입니다.”

“헉. 명윤 원로님의 여식께서 어찌 노숙을 하려 하십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희가 금방 숙소의 방 몇 개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제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은 모두 전장에 계셨으니까요. 돌봐 주는 이 없이 인계 생활을 오래 하게 되어 혼자서도 뭐든 잘합니다.”

“그래도-.”

“게다가 그간 환계 영목의 향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지난번에 왔을 때도 그런 이유로 영목의 잎을 몇 장 떼어 가기도 했었고요.”

“……저런, 그러셨군요.”

“초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영목이 있던데, 그곳에 하룻밤 자리를 잡을까 합니다.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하지만 그 영목이 가늘고 부실해 영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차라리 너무 늦지 않았을 때 초소 동북쪽으로 조금만 가시면 그곳에 영목 군락이…….”

“아닙니다. 다른 분들이 보시기엔 부실하고 볼품없을지 모르나 제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는 그 모습이 꼭 백가에서 홀로 시간을 버텨 낼 제 모습처럼 보여서…….”

세화가 다시 한번 저고리 소매로 젖지 않은 눈가를 비비며 닦아 냈다. 얼마나 세게 문질렀는지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이 가슴 아픈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아가씨, 울지 마십시오.”

“홀로 떠나시는 일로 얼마나 걱정이 많으십니까. 저희가 다 마음이 아픕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의지할 곳 없을 타지에서 마음의 위안으로 삼을 뭔가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혹 그 영목을 제가 가져가도 괜찮을까요?”

“당연하지요. 저희가 심은 것도 아닌 것을요.”

“쉽게 뽑으실 수 있도록 저희가 병사를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당황한 세화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희 쪽에도 일손은 많은걸요. 저희가 하면 됩니다.”

“그러시겠습니까?”

“그럼요.”

별 의심 없이 수긍하는 병사들의 모습에 한시름 놓은 그녀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리하여, 달이 산 너머로 가깝게 다가간 깊은 새벽이었다.

이 시간을 위해 술을 마흔 동이나 준비하지 않았던가.

스무 동이는 초소병들에게, 또 나머지 스무 동이는 그녀의 일행에게 풍족하게 챙겨 온 안주와 함께 전달했다.

초소가 바로 옆이니 짐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오늘은 모두 즐겁게 먹고 마시라고 권한 이후로 강변에선 작은 연회가 벌어졌다.

세화는 그들이 배부르게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는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며 시기를 쟀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나 원, 방바닥 뜨신 저택을 놔두고 생뚱맞게 웬 노숙을 하나 했더니. 이리 좋은 술과 음식들을 원 없이 먹어 보기도 하네.”

“내 말이. 첫날밤부터 갑자기 노숙이라셔서 뭔가 했는데 이런 노숙이라면 늘 환영이지.”

“우리 아가씨가 인간계 생활만 오래 하시다가 백가에 가게 되셨으니.”

“맞어. 얼마나 고향 땅이 그리우셨으면 노숙을 하게 되더라도 이곳에 와서 주무시고 싶어 하셨을까. 저 가엾으신 분.”

“그런데도 우리까지 신경 써서 이리 풍족하게 연회를 열어 주시니. 아, 노숙이 대수인가.”

‘하. 저 짧은 대화에 노숙이란 단어가 대체 몇 번이나 나오는 거람.’

“아가씨, 이제 제가 할게요. 저와 바꿔요.”

“쉿. 넌 망이나 봐.”

짐을 위로 겹쳐 쌓으라 했던 것도 바로 이 일을 위한 것이었다.

마당을 가득 메운 짐들은 마르고 작은 나무와 세화의 모습을 주변의 눈에서 완벽히 가려 주었다.

세화는 한 번도 쉬지 않고 가지고 온 삽으로 열심히 땅을 팠다.

탈피하지 못한 환족이 쓸 수 있는 영력은 한정되어 있어,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큰일이네. 그래도 아침이 오기 전까진 마칠 수 있겠지?’

이 정도야 금방 파내고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동안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거라 예상했었건만.

“비켜 보세요. 이제 제가 할게요.”

“아냐. 누구 오지 않게 망이나 보라니까.”

“어차피 아까 초소병들에게 나무를 파 갈 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누가 보면 그렇게 말하면 되니 괜찮아요.”

“……나무를 파는 거 맞는데?”

“아니시잖아요.”

세 자매 중 제일 체구가 좋은 영선이 세화에게서 삽을 넘겨받았다.

이미 탈피까지 마친 그녀는 확실히 영력의 운용에서 세화보다 월등히 나았다.

몇 번 퍽퍽 발로 밟아가며 삽을 움직이니 세화가 지금까지 판 것보다 더 깊게 땅이 파였다.

“어떻게 알았는데?”

“어떻게 모르겠어요. 갑자기 생뚱맞게 나무를 파 가시겠다는 말씀을 하시고부터 감이 딱 오던데요. ……그런데 이 나무 정말 이상하네요. 위는 이렇게 부실한데, 뿌리는 어떻게 이렇게 넓고 깊게 퍼졌죠?”

“…….”

“빈약한 윗부분만 보고선 금방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뿌리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모르니 시간이 제법 걸릴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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