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254)

“여봐라! 그대들을 위해 헌신했다 외치는 이 몰염치한 배신자를 위해 천신주를 가져오라!”

“죄를 시인하고 뉘우쳐. 잘못했다고 이 자리에서 소리치고 내 발밑에서 빌어. 그러면 천신주가 아니라 네 가족이 떠나간 방법으로 죽게 해 주마.”

“배신자 무리의 목을 광장에 효시하고 몸뚱이는 갈기갈기 찢어 모두 개 우리에 던져 넣어라!”

집행인의 발에 걷어차이던 가족들의 목. 붉은 피가 흥건히 배어들던 포석들.

‘그 모든 장면들이 어떻게 해도 흐려지지가 않는데.’

이 금수만도 못한 놈에게 예전처럼 오라버니라고 부르며 웃어 보여야 한다고?

대화마다 장단을 맞추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해야 한다니.

‘그건, 정말로 못 하겠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삼켜 낸 세화가 그를 보며 대답했다.

“그건 소가주님께서 저와 마주치지 않으시면 해결되는 일 아닐까요?”

“세화야!”

“더는 오시지 말라 청을 드렸는데도 굳이 찾아오시질 않나. 그것을 말씀드렸을 뿐인데 다른 이가 보면 큰일 난다, 태도를 똑바로 해라, 가족들의 안위를 담보로 저를 겁박하시지 않나.”

“너-.”

“저야말로 여쭙고 싶네요. 대체 어떻게 하면 제 말이 하나라도 소가주님께 오롯이 전달될 수 있을지 말이에요.”

“…….”

“…….”

“……너 정녕 내게 이럴 것이냐?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결국 이리할 셈이야?”

주경현이 이를 악문 채 물었다.

“생각을 잘해야 할 거다. 이대로 돌아선다면 정말로 널 보지 않을 거니까. 다시는 네게 예전처럼 말을 걸어 주지도, 너와 정원을 함께 걸어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도 똑같이 말하겠느냐?”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소가주님이야 말로 아직도 이해가 안 되십니까?”

“…….”

“보지 말죠, 이제. 우리.”

분노를 삼켜 내듯 그녀를 직시하는 주경현의 시선은 한겨울 북풍보다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이리하겠다 이거지.”

그의 턱이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그래, 좋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이제 더는 내게 가까이 올 생각 말아라. 너와 난 아무 사이도 아니니 마주쳐도 알은체할 필요 없다!”

소매를 털며 선언한 주경현이 단호하게 돌아섰다.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그를 보며, 그 공방을 쭉 옆에서 지켜보던 영선이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아가씨. 아무리 그래도 소가주님이십니다. 저분께 이리하시면 어떡합니까.”

“…….”

세화는 멀어지는 주경현을 잠시 바라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해 놓은 일이 없기에, 그를 이렇게 자극해 놓고 나면 가족들이 걱정돼서 겁나고 무서울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도 안 무섭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의 제 이런 행동은 배수의 진과도 같은 것이니.

‘이렇게까지 자극한 이상, 내가 떠나기 전에 반드시 소가주를 처리해야 해.’

세화의 시선이 낮고 단단하게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최장명의 심부름을 왔다는 하인이 급한 걸음으로 들어와 주세화에게 작은 함을 하나 내밀었다.

오전에 보낸 서신의 답이 제법 빠르게 도착했다.

그것을 받아 든 세화가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함을 슬며시 열어 보았다.

작고 푸르스름한 돌멩이들이 옹기종기 들어 있었다.

환석이다.

* * *

그 시각 주명윤의 이마는 종잇조각처럼 구겨져 있었다.

아무리 처음보단 백기하에 대한 적대감이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자신은 주가의 원로이자 주가의 적을 일선에서 섬멸하는 무장이었다.

혈혈단신으로 쳐들어온 적의 속셈을 파악하지 못한 채로 마음을 놓고 있을 수 있을까.

백기하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절대 주가에 해가 되는 게 아니니 믿어 달라고, 곧 모든 걸 말하겠다고 장담하긴 했지만.

‘어쩐지 맥락 없다 느꼈던 지금까지의 대화들이 어떤 한 점으로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래서 잘 생각해 보면 뭔가 잡힐 듯도 한데…….

“그 이후에 제가 그 백가 아이들에게 호통치는 대신 이렇게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내일부턴 사시(巳時)까지 이곳으로 활을 들고 모이거라. 내가 가르쳐 주마. 하니 그 아이들이 모두 어쩔 줄 모르고 저를 존경하며…….”

“그러셨군요. 가주의 자리가 한적한 자리도 아니고. 더군다나 백가주께서는 다른 다섯 가문과 엮여 더 일이 많으실 텐데.”

“맞습니다. 그 사이에서 시간을 내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그 아이들을 모두 직접 가르치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부끄럽지만 제가 어디 가서 심성이 빠진단 얘기를 듣는 이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주변의 대화가 너무 신경 쓰여 도저히 생각이 제대로 이어지지가 않았다.

“저는 지금까지 가문에 헌신하느라 어떤 여성에게도 마음을 줘 본 적 없고, 피부조차 스쳐 본 적 없고. 그런 저를 향해 가문의 이들이 어찌나 고결하고 청백하다 하는지, 듣는 제가 낯이 부끄러워 제발 그만하라고…….”

“허, 그러면 어떤 여성분과도 서신조차 주고받은 적이 없으시단 말씀입니까?”

“서신이라니요. 그런 걸 함부로 주고받았다간 바로 혼인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큰일 날 말씀을요.”

“네? 서신을 주고받았다고 혼인을 해야 하다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여성에 대해 이렇게 모르실 수가. 백가주께선 보기보다 정말 순진하시군요.”

‘내가 보기엔 네놈들이야말로 백가주에 대해 모르는 것 같구나, 이 녀석들아…….’

“그렇습니까. 제가 여성에 대해 무지하여…….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저와 혼인해 부인이 될 여인에게만 온 마음을 다하기로 맹세했었거든요.”

“그 결심이야말로 대단하군요.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백가주와 혼인하여 가모가 되실 분은 참 좋으시겠습니다.”

“하하, 그런가요. 하지만 진심입니다. 저는 오로지 제 부인에게만 잘할 것입니다. 아, 그리고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제가 금을 제법 다룹니다. 지난번 동생분에 대해 말씀하실 때 동생분께서도 금을 다룬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제 동생도 금을 정말 정말 아름답게 연주합니다. 제 동생만 한 실력이 없지요.”

“언제 그 천상의 음이라는 연주를 한번 들어 보고 싶군요. 혹 제게도 악기를 빌려주신다면 함께 연주하는 것도 즐거울 것 같고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가 악기를 참 잘 다루거든요.”

“그것도 좋지요. 백가주께서 직접 연주해 주신다니. 그 진풍경을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그렇다고 무슨 대화를 나누건 무시하기에는 저놈의 순진한 아들들이 백가주에게 말려드는 상황이 너무나도 여실했다.

어린 나이에 장수로서 전장에 나가 하달받은 명을 이행하는 생활만 반복해 온 탓일까.

본래 장수들이 적이 아니면 동지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적이 아니라 판단하자마자 이렇듯 쉽게 마음을 열 줄이야.’

자신 혼자 이 일행을 끌고 가기가 제법 버거웠다.

가장 큰 문제는, 일단 한번 앉으면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조금 전 갑자기 시장하다며 또다시 길옆에 주저앉은 사내는 아들들과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엉덩이를 뗄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참다못한 주명윤이 연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식사를 다 하셨으면 그만 일어나시죠. 너무 오래 앉아 계십니다.”

“죄송합니다, 미장 어른. 하지만 조금만 더 쉬면 안 되겠습니까. 여정이 예상보다 길어져 조금 무리했는지 발끝이 아직 후들거립니다.”

“……말을 타고 오셨는데 왜 발끝에 경련이 생기십니까?”

“제가 말을 오래 타면 근육이, 아, 그렇다고 제 몸이 부실한 것은 절. 대. 아닙니다. 이 부분은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절대로.”

“…….”

“다만, 백가에 있을 때 처리할 일이 너무 많아 무리한 탓에, 잠을 오래도록 자지 못하다가 이곳에 온 것이라 피로가 쌓인 듯합니다.”

“……전장에선 보름 넘게 뜬눈으로 지새우시면서 저희와 맞부딪치셨던 것 같은데, 아니셨습니까.”

“아버지, 전장에서야 계속 긴장한 상태라 솔직히 피로도 잘 못 느끼지 않습니까. 지금과는 상황이 다르지요. 그러니 백가주의 말씀처럼 조금만 더 앉았다 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네. 저희가 아버지를 거역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음식도 남았으니까요. 이것만 마저 먹고 움직이면 어떨까요.”

“…….”

이 셋 사이에 끼어들자니 또 전처럼 자신만 이상한 이가 되고 있고.

‘단윤아, 너 언제 오느냐. 대체 너 언제 오느냐.’

그때였다.

“명윤 님!”

‘이 목소리는!’

바라고, 바라고, 바라던 목소리에 감격한 주명윤이 벌떡 일어났다.

여기가 노상이 아니었다면 벌떡 뿐 아니라 버선발로 뛰쳐나가 맞았을지도 모른다.

“사단윤!”

주가의 호위들을 데리러 갔던 사단윤이 돌아왔다.

“드디어 왔구나! 네가 왔구나!”

명윤의 환호엔 그가 느끼는 기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생각보다 더 격한 환영에 사단윤이 말에서 내리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있기는!”

있었다.

“아무 일도 없네.”

내가 그간 속이 말이 아니었다. 저 백가주가 주가의 영지에 홀로 찾아온 이유를 한시라도 빨리 알아내야 하건만. 대화할수록 머리만 복잡해지고 말려드는 것 같은 이 기분. 아마 삼박 사일을 얘기해도 모자랄 거야. 하지만 네게 들려줄 이야기가 목 끝까지 차 있다 해도 저 호위들 앞에서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구나. 답답한지고. 답답한지고.

……를 축약한 ‘아무 일도 없네’를 사단윤은 바로 알아들었다.

“그 정도입니까?”

“네?”

말에서 내려 다가오던 호위들이 대화의 방향을 읽지 못하고 되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니네. 자네들은 신경 쓸 것 없어. 그리고 가한아, 가윤아.”

“네, 아버지.”

“이제 호위해 줄 이들이 왔으니 너흰 먼저 권역으로 돌아가거라.”

“아닙니다. 어차피 신영께서도 인계에 계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곧 오신다고. 그러면 저희도 급할 것 없으니 여유가 될 때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맞습니다. 어차피 국경으로 돌아가게 되면 아버지도 또 오래 뵙지 못할 테니 함께-.”

“잔소리 말고 가라면 좀 가!”

“아, 아버지.”

주명윤은 주가의 호위들의 앞에서 여전히 백기하와 붙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대단히 친밀감을 과시할 예정인 두 아들을 보며 다시금 참을성을 되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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