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안을 들여다보던 흥생이 잠시 멈칫했다.
‘……잠깐, ‘너희에게’라고? 저번에도 그렇고. 혹시 ‘너희’가 ‘인간’을 말하는 건가.’
“왜. 뭔지 알 수 없는 거면 싫어? 그럼 도로 줘.”
“왜 줬다 뺏으려 하냐. 한번 줬으면 내 거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보답이라 하니 좋은 거겠지.
흥생이 냉큼 그 주머니를 품속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너도 우물을 한두 개 파 둬. 비밀스러우면서도 집에서 오갈 수 있는 곳으로. 쌀과 약초도 살 수 있는 대로 사서 저장해 두고.”
“왜?”
“앞으로 반년은 비가 오지 않을 거야. 반년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고.”
세화가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물은 최대한 깊게 파야 해. 어떤 상황에서도 마르지 않게. 약초도 마찬가지야. 잊지 말고 꼭 준비해. 모자라면 네가 준비해 준 데서 가져가고.”
“약초는 또 왜?”
“가뭄이 지나간 다음엔 폭우가 쏟아질 테니까. 그럼 전염병이 창궐할 거야. 돈이 있어도 약초를 구하기 힘들어질 테고.”
“…….”
“믿고 안 믿고는 네 마음이야.”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던 흥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렇게 할게.”
그리고는 소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네가 부탁한 것들을 숨겨 둔 곳이야. 반년간은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 둘 테니 언제 돌아오든 아무 때나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오면 돼.”
종이를 받아든 세화가 조금 멋쩍게 인사했다.
“나도 고마워.”
그 말에 흥생이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어딜 가는데? 멀리 가?”
“좀 그렇긴 해. 그런데…… 다음에 볼 땐 나 좀 달라져 있을 거다?”
“응?”
“뭔가 달라져 있을 거야. 기대해도 좋아.”
“달라져 있을 거라니, 뭐가?”
“뭐든.”
나중에 놀라는 모습을 보아도 재미있겠다며, 나중에 보자고 인사한 세화가 손을 흔들었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흥생이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부터도 모를 성격이긴 했는데 갈수록 더 모르겠네. 왜 쟤랑 얘기만 하고 나면 자꾸 기담이라도 하나 듣고 온 것 같지.”
“앞으로 반년은 비가 오지 않을 거야. 반년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고. 가뭄이 지나간 다음엔 폭우가 쏟아져 전염병이 창궐할 거야.”
“일단 나도 우물부터 파야겠다. 쌀이랑 약초도 사야 하는데 돈이 얼마나 있더라. 그것들은 또 어디에 보관하지?”
세화의 충고를 복기하며 흥생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 * *
돌아온 세화는 꼼꼼하게 짐을 꾸렸다.
자잘한 장신구부터 환계에서는 필요 없을 인간계의 의복과 서책까지.
돈이 될 만한 걸 모조리 챙기고 보니 거대한 마당 안쪽으로 작은 언덕이 생겼다.
심부름을 보냈던 영선이 돌아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쌓여 있는 짐을 보며 기함했다.
“아가씨, 정말 이걸 다 가져가시게요?”
“응.”
“굳이 이걸 다 가져가시는 이유가 뭔지 여쭤봐도 돼요?”
“놔 두고 가면 분명 사연주가 집어갈 거거든.”
“아이고, 그런 이유면 차라리 관리할 사람을 더 세워 두고 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안 돼. 다 가져갈 거야.”
말을 하며 세화의 시선이 그득그득 쌓여 있는 짐 중, 빈 궤짝과 천으로 감싸 둔 삽에 닿았다.
영선에게 말한 이유 이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술도 챙겼지?”
“그럼요. 마흔 동이나 준비했습니다.”
“안주는?”
“그것도 당연히 챙겼지요. 닭, 오리, 소, 돼지, 생선 할 것 없이 고기란 고기는 다 넣은 데다 전에다 탕에, 무절임도 열 동이나 챙겼어요.”
“좋아. 잘했어.”
“그럼 출발은 언제로 하시겠어요? 준비는 다 마쳤으니 언제든지 떠나실 수 있어요. 짐이 워낙 많아 움직이는 속도가 더딜 듯한데, 더 챙기실 것 없으시면 차라리 지금부터 서둘러 옮기라 할까요?”
세화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냥 둬. 밤에 떠날 거야.”
“……밤에요?”
“응.”
“밤에 어떻게요? 혹시 등을 든 채 밤새 움직이시겠다는 그런 의미이신지…….”
“밤에 환계로 가는 문을 넘고. 거기 초소 옆에서 하룻밤 노숙을 한 다음 아침에 떠날 거야.”
“……?”
영선은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침에 가시고 싶으신 거면 내일 새벽에 출발하기로 하고 저택에서 편히 푹 자고 일어나도 될 텐데.
‘왜 굳이 노숙을?’
하지만 제 아가씨는 이미 그렇게 하기로 이미 결정을 내렸는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해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래 뭐, 이유가 있으시겠지.’
어차피 그녀는 제 아가씨를 따르기만 하면 될 뿐.
아가씨의 계획이 어떻든, 몸을 해치는 일만 아니라면 간섭할 일은 아니었다.
‘난 빠진 게 없나 한 번 더 살펴보기나 하자.’
그렇게 돌아선 영선이 다시 한번 목록과 쌓여 있는 것들을 대조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대문 쪽이 소란스럽다 싶더니 누군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주경현이었다.
“이게 다 무어냐?”
그는 마당 한가득 쌓여 있는 짐들이 제법 의아했던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환계로 간다고 이렇게 짐을 싼 거냐? 이럴 필요 없어. 우린 백가주의 환영연에 가는 것뿐이고, 끝나면 곧…….”
하지만 그 목소리도 곧 끊어졌다.
곧장 백가로 떠나야 할 주세화가 거기서 죽거나 불구가 되어 인계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상기한 까닭이었다.
전생과는 달리, 주경현의 그러한 속내를 그대로 읽어 낼 수 있었던 세화가 허탈한 한숨을 흘렸다.
‘내가 정말 장님이었구나. 어떻게 저렇게나 투명한 속내를 몰랐던 거지?’
하지만 그때는 그런 줄 알았다.
말을 삼키면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런 줄.
잘못을 저지른 뒤 미안한 표정을 지을 때면 그의 위치가 어쩔 수 없이 그리 만드는 줄.
목소리가 떨릴 때엔 저를 연모하고 애타게 기다릴 그의 마음이 그대로 담긴 줄 알았다.
‘저런 사갈(蛇蝎) 같은 속내를 모르고서.’
“어쨌거나 이 짐을 다 옮기겠다면 내가 도와주마. 내 저택의 인부와 호위를 더 불러 줄까?”
“소가주님께선 귀가 없으신가요?”
“뭐?”
“제가 어제 분명 혼자 가겠다고, 다시는 이곳에 오실 필요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
잠시 침묵하던 주경현이 낮은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너야말로 내가 어제 분명히 말했을 텐데. 다시는 내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해선 안 된다고. 막돼먹은 그 언사를 참아 주는 건 오늘뿐이라고. 기억나지 않는 거냐.”
“참지 않으면 절 어쩌실 건데요?”
“뭐?”
“궁금해서요. 참지 않으시면 대체 어찌하실 건지.”
“빨리 죽이세요, 가주. 혀를 뽑으시든가요.”
“배신자 무리의 목을 광장에 효시하고 몸뚱이는 갈기갈기 찢어 모두 개 우리에 던져 넣어라!”
“제 혀를 뽑으실 건가요? 아니면 감히 소가주님을 모욕한 죄로 참수하시기라도 하실 건가요? 잘린 목은 광장에 효시하고 몸뚱이는 개 우리에 던져 넣으시면서요.”
“너-.”
“아무것도 못 하실걸요. 여섯 가문에 저를 신영의 핏줄이라고 내미실 때는 사지가 멀쩡해야 할 테니. 그래야 육가에서 소가주님을 대신한 희생양을 받아 주죠.”
“감히!”
주경현의 턱이 단단히 굳어졌다.
이를 갈 듯 노기를 드러낸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경고했다.
“네가 내게 방만하게 굴어도 백가로 가는 일로 두려워 그러겠거니 하고 참아 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야. 더는 용납 못 하니 이제부턴 잘 생각하고 입을 열어야 할 것이다.”
“…….”
“그래. 신영께서 안배하신 바가 있으니 내가 널 처벌하지 못할 수도 있지. 하지만 네 가족들도 그럴까? 네 어머니와 아버지는? 두 오라비는? 내가 참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들을 통해 보여 줘?”
“그러면 안 되실 텐데요. 그렇게 되면 저 자진할 거거든요.”
“……뭐, 라고?”
“정말이에요. 말로만 이러는 것일지 정말 그렇게 할지. 궁금하시면 시행해 보셔도 됩니다.”
“…….”
“하지만 아마 못 그러실 거예요. 제가 죽으면 소가주님께서 백가에 가셔야 하실 테니까요. 그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 살려 두시겠죠.”
세화의 시선이 또다시 주경현의 위아래를 훑고 지나갔다.
‘비겁한 새끼.’
말로 하진 않았으나 주경현은 시선에 담긴 의미를 그대로 읽어 낸 듯했다.
조금 전까지 얼굴에 가득했던 노기는 어디 가고, 그는 마냥 황망한 듯했다.
“세화야.”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세화야, 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응? 너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야.”
“제가 왜요?”
“왜냐니. 너 정말 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무슨 일이야. 누가 널 힘들 정도로 괴롭히기라도 한 거야? 누구냐. 내게 말하면 내가 다 해결해 주마, 응? 무슨 일이야, 대체.”
“…….”
“너 환계에 가서도 내게 이러면 정말 큰일 난다. 내가 참는다 해도 다른 이들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걸 모르느냐.”
어떻게 모를까.
그런 것 따위, 그녀가 제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원하는 바를 더 확실히 얻어 내기 위해서는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게 낫다는 걸.
그를 몰락시킬 때 몰락시키더라도, 지금은 예전의 살갑던 태도를 다시 꾸며 내는 편이 낫다는 걸.
하지만.
‘그것만은.’
저고리 소매 아래로 늘어져 있던 하얀 손가락들이 손바닥 안쪽으로 거세게 파고들었다.
‘……알면서도 그것만은 못 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