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254)

“…….”

“…….”

“어, 그것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백기하가 표정 관리를 하며 눈을 굴렸다.

‘그래도 곧 장인어른이 되실 분인데…….’

계속 원로 어른이라 부르는 것은 조금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 정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미장이 뭐냐면…….”

하여 나름 친근함을 담아 호칭을 조금 바꿔 보았다.

미래의 장인어른으로.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정확할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좋은 뜻입니다. 존경한다는 말과 비슷한 의미이고, 백가에서 쓰는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단어라 고개가 갸우뚱해졌으나.

‘……뭐, 이런 식으로 음험하게 누군가를 조롱할 이는 아니니까.’

나름대로 납득한 주명윤은 이제 미장이라 부르거나 말거나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제 아버지의 누그러진 태도를 본 주가윤과 주가한이 덩달아 안심하며 한마디씩을 덧붙였다.

“주가에 해가 되는 일로 오신 것도 아니라 하시니, 주가 권역에 도착하면 저희 저택에도 한번 들르시지요.”

“네, 그러십시오. 제 어머니께서 담그시는 술이 맛이 아주 좋습니다. 기회가 될 때 같이 한잔하세요.”

‘그 무슨 말씀을. 겨우 한 번 들르다니. 저는 어떻게든 그 저택에 머물 겁니다.’

라는 말은 쏙 빼놓은 백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좋습니다.”

“그렇다고 다 드시면 안 됩니다. 몇 병 없거든요. 대신 제 동생도 술을 제법 잘 담그니, 그것도 한번 맛을 보시지요.”

백기하의 눈이 반짝였다.

“동생분 말씀입니까.”

“네. 아직 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손재주가 제법 있습니다.”

“그, 렇군요. 그 가늘고 작은 손으로 술도 직접 빚는다니, 신기하네요.”

“……네?”

갑자기 주씨 삼부자의 시선이 제게로 날아와 백기하가 잠시 당황했다.

“백가주. 혹시 저희 동생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예? 그럴 리가요. 제가 어디서 동생분을 뵈었겠습니까.”

“……그렇, 지요. 네.”

주가윤이 가만히 수긍했다.

그런 동생과 백기하를 잠시 응시하던 주가한이 백기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제 동생을 처음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 녀석이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갑자기 머리를 삭발하여-.”

“네? 그 아름다운 흑단빛 머리를 다 잘라 버렸다고요?”

“…….”

“…….”

“…….”

주가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백가주. 제 동생을 어디서 보신 겁니까?”

그가 조금 전에 비해 완연히 낮아진 목소리로 묻자 백기하가 황급히 부인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동생분을 뵙다니요. 아닙니다. 저는 그저 세 분 모두 정말 아름다운 흑단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계시니 그런 관점에서…….”

“…….”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대체 어디에서 그분을 뵈었겠습니까.”

“…….”

“정말입니다. 전 쭉 여러분들과 함께 전장에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 지요?”

“그럼요.”

일부러 떠본 말에 걸려들기까지 하는 것을 보니 뭔가가 굉장히 찜찜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백기하가 어디서 세화를 만날 수 있었겠는가.

백기하는 내내 전장에서 자신들과 얼굴을 맞대고 있었고, 세화는 주가의 영지를 한 번도 떠난 적 없는데.

주가 영지뿐 아니라 세화는 애초에 저택도 잘 나서지 않는 아이였다.

연회에도 제대로 참석한 적 없는 아이이니 백가의 가주와는 접점을 가지려야 가질 수가 없을 터였다.

‘뭐, 우리와 가까워지고 싶은 듯하니 그런 마음에서 친근하게 대답해 본 건가.’

“저희에겐 정말 소중한 여동생이어서요. 나중에 대체 어떻게 혼인을 시킬지 벌써부터 암담합니다.”

“맞습니다. 단 하나라도 조건이 맞지 않는다면 절대로 보낼 수 없지요.”

한결 편안해진 목소리 사이로 백기하가 조심히 끼어들었다.

“조건, 이라면 어떤…….”

“일단 검 실력이 저희 두 사람과, 아니지. 저희 아버지와 비견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안 되지요.”

“그렇죠. 영력도 물론 최고여야 하고요.”

“생김새도 꼼꼼히 보아야 합니다. 제 여동생이 천하절색이거든요. 그런 아이의 옆에 서려면 그 반의반이라도 생겨야지요.”

“심성은 무엇보다 빠질 수 없지요. 혹여 돼먹지 못한 이라면 그냥-.”

쉬지 않고 이어지는 말에 백기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군요. 심성, 그거 정말 몹시 중요하지요. 심성으로는 저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

“…….”

“동생분에 대한 두 분의 애정이 정말 지극하신 듯 보여서요. 저도 그렇게 아껴 줄 수 있는 가족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에 조금 끼어들게 되었습니다.”

“백가주께서는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시는…….”

“저는 아주 어렸을 때 혼자가 되었습니다.”

“아…….”

두 형제의 시선이 설핏 가라앉았다.

백기하가 쓸쓸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덧붙였다.

“그래서 계속 가족을 바라게 되더군요. 하지만 제가 믿고 의지하며 존경할 수 있는, 그런 분을 찾다 보니 여태 혼인을 하지 못했지 뭡니까.”

“……저런.”

“헌데 그러다 일이 생기고, 전장에서 시간을 보내다 이렇게 나이만 먹었으니. 이제 어떤 집안에서 저를 사위로 맞아 주실지,제법 암담해지더군요.”

이러다 평생 혼자 지내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며 말을 흐리는 백가주에게 두 형제가 열성적으로 덧붙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백가주께서는 용모도 이리 훤칠하신 데다 영력도 출중하신데, 누가 백가주를 마다하겠습니까. 혼인이 성사되면 신부 측 가문에서도 좋은 일이지요.”

“네. 원하시는 분과 꼭 혼인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럴까요?”

“그럼요!”

언제 어둡고 쓸쓸했냐는 듯 백기하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군요. 그럼 하시던 말씀을 계속해 주시지요. 매제로 삼으실 수 있는 조건에 또 뭐가 있습니까?”

“조건이요?”

“네. 신부 측 가문에서 원하는 기준이란 것이 대개 비슷할 테니 미리 알아두려고요.”

“아, 그러셨군요.”

백기하의 말에 수긍한 두 아들이 다시 경계를 풀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물론 신랑 될 자의 재력도 확인해야지요. 데려가서 고생만 시킬 이에겐 절대 보낼 수 없으니까요.”

“사는 곳이 저희 저택에서 너무 멀어서도 안 됩니다. 보고 싶을 땐 언제든 서로 볼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악기도 꼭 다룰 줄 알아야 합니다. 저희 동생이 금을 그렇게 기가 막히게 연주한답니다. 천상의 음이 따로 없어요.”

사는 곳. 음악적 소양. 재력. 영력. 심성. 외모.

백기하는 열심히 두 형제가 읊는 조건을 입속으로 반복했다.

너무나 열렬히 집중하는 바람에, 대화에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던 주명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는 건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 * *

세화는 아침이 되자마자 영선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

흥생이 있는 글방 앞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기다랗게 줄을 서고 있었다.

슬쩍 안쪽을 들여다보자, 열성적인 주인이 새로운 춘화를 부지런히 팔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없나?”

“있다!”

찾는 이가 외출했나 살피는 도중이었다.

누군가가 지붕 위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대답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짓이야, 위험하게. 다치면 어쩌려고.”

깜짝 놀란 세화가 타박했지만 흥생은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괜찮아. 나 어차피 이제 이대로 살 거라.”

“이대로 살아? 그게 무슨 말이야?”

“집 나왔거든. 우리 노망난 아버지가 날 늙다리 영감한테 강제로 시집보내려고 해서.”

“…….”

“우리 아버지, 제법 높은 관직에 있는 분인데 무슨 부귀영화를 더 누리겠다고 자식마저 팔아먹으려는지. 난 그 마음을 정말 이해 못 하겠더라고.”

씁쓸하게 덧붙인 흥생이 애써 웃음 지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암튼 그래서 이제 여자 이름은 버리고 이대로 평생 살 거야.”

“…….”

“그런 얼굴 하지 마. 난 괜찮으니까.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잠시 무겁게 침묵하던 세화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너도.”

“응?”

“너도, 무슨 일 있으면 날 찾아와. 내가 사는 곳 알지?”

그 말에 흥생이 조금 웃었다.

“알지. 그래도 괜찮아. 나 돈 정말 잘 버니까.”

주세화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흥생이 그녀에게 어깨를 부딪치며 음흉하게 웃었다.

“너 도성에서 들인 돈 없이도 제일 돈벌이 잘되는 게 뭔지 알아? 춘화야, 춘화. 나 그래서 부자다.”

아무렇지 않은 그 모습에 세화도 피식 웃었다.

“뭐야, 왜 웃어. 안 믿겨서 그래?”

“아냐, 그런 거.”

“그런 게 아니면 뭔데. 아하. 너도 필요하구나. 춘화 하나 줄까?”

“됐다. 난 저거 왜 보는지 모르겠어.”

“왜. 봐 봐. 필요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부탁했던 건 어때. 잘 되고 있어?”

“그래. 다만 일을 비밀리에 진행해야 하다 보니 네가 말한 것들을 숨겨 둘 만한 곳간은 도성 안에선 구할 수 없었어. 해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구하게 되었는데, 괜찮겠어? 성문을 나서서 이틀 정도 가야 한다.”

“그 정돈 괜찮아.”

“좋아. 치수사는 넉넉히 여덟 정도인데. 우물은 언제 팔 거야? 오늘이라도 보내 줄 수 있어.”

그 말에 세화가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그거 말인데 내가 내일부터 어디를 좀 잠시 다녀와야 해서. ……혹시 보름 뒤까지 내가 오지 않으면 네가 일을 맡아 줄 수 있을까?”

“난 별로 상관없어. 내가 해도 되는 거면 내일부터 당장 시작할까?”

“그래. 어디다 팔지, 내가 대략 위치를 그려왔어.”

세화가 소매에서 잘 접힌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 이것도 가져.”

종이를 받아든 흥생의 손 위에 한 가지가 더 올라갔다.

“이게 뭔데?”

정흥생이 손 위에 놓인 작은 주머니를 열어 보며 물었다.

웬 바싹 마른 가루가 조금 담겨 있었다.

“일단 가지고 있어. 내 보답이니까. 위급한 상황에 조금씩 먹고.”

“먹으라고?”

“응. 대신 아주 조금씩만 써야 해. 너희한테는 좀 독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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