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입패가 없으면 어떠냐. 나와 함께 가면 바로 통과인걸.”
“혼자 가고 싶은데요.”
“…….”
“굳이 같이 가야 할 필요가 있나요? 왜요?”
“……그건.”
“이유가 있어도 그 정도는 소가주님께서 혼자 해 주세요. 저도 백가행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서요.”
“…….”
못 줄 만한 것도 아니어서, 주경현은 결국 가지고 있던 출입패 하나를 그녀의 손에 올려놓았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것을 받아 챙긴 세화가 또다시 그의 위아래를 훑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매우 바쁘시다 하니 다시는 이곳엔 오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뭐?”
“저도 바쁘고 소가주님께서도 바쁘시고. 서로 바쁜데 굳이 얼굴 볼 필요는 없잖아요?”
“…….”
“급한 일 있을 땐 서신으로 보내 주시고요. 뭐, 전 곧 있으면 소가주님을 위해 백가에 가야 하니 웬만한 일로는 서신도 하시지 않을 것을 알지만요. 그렇지요?”
“…….”
주경현은 어안이 벙벙한 것을 넘어서 뭐에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이 아이가 오늘 계속 왜 이러지? 어떻게 세화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있어?’
“소가주님!”
“오라버니라고 불러야지. 넌 곧 내 신부가 될 텐데. 그때도 소가주님이라고 부를 참이야?”
“……경현 오라버니.”
고작 그 정도 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움에 얼굴이 있는 대로 붉어지던 세화였다.
시선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하던 그 아이는 어디 가고, 갑자기 이런 태도인 거지?
“혹시 나와 혼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쭉 기다려 왔는데 이번 일로 무산되어 그러는 것이냐? 그런 것이라면 네가 백가에서 돌아올 때까지 내가-.”
“제 사촌 동생과 아주 잘 어울리시던데요.”
“응? 사촌 동생?”
“네. 둘이 함께 있으면 참 잘 어울리는 듯해서요. 혼인도 하시면 어때요?”
“…….”
“그럼 참 보기 좋겠네요.”
그때 저 멀리 대문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제 역할은 끝난 것 같으니 세화와 주경현이 대화하는 동안 짐을 챙겨 달아나려 했던 사연주가 대문 앞에서 붙잡힌 것이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당장 놓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촌 아가씨. 하지만 주인 아가씨께서 아무것도 가지고 나가지 못하게 하라 명하셨습니다.”
사연주가 가련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건 내 것인데! 내 물건을 내가 가져가겠다는데 언니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명을 내려! 이제 나를 이런 식으로 괴롭히겠대?”
가련하긴 했으나 저택 담장을 넘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언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는 거야. 대체 내가 언니한테 뭘 잘못했다고!”
세화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대문으로 향했다.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이냐.”
황당함에 멈춰 서 있던 주경현이 무슨 상황인지를 알아보러 함께 움직였다.
“경현 님!”
하인과 실랑이를 하고 있던 사연주가 그런 주경현을 발견하고 매달렸다.
“경현 님. 소가주님. 시시비비를 좀 가려 주시어요. 언니가 저를 오해하고, 증거도 없는 일로 계속 저를 몰아세웁니다.”
“가지고 있는 것은 다 빼앗았어?”
세화가 묻자 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몸수색은 하지 않았습니다.”
“해. 당장 시녀를 불러서 옷 속을 꼼꼼히 뒤져 보라고 해. 뭐 하나 가지고 나갈 수 없게.”
“언니!”
“맨발로는 나갈 수 있어도 가락지 하나라도 품고는 절대로 정상적인 방법으로 나갈 수 없을 거라고. 기어 나가고 싶지 않다면 알아서 토해 내라고. 확실히 알려 주고.”
“예, 아가씨.”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놀랄 만큼 차가운 말들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은, 맹세코 주경현이 상상도 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지금 그게 무슨……. 세화야, 네 사촌 동생이잖아?”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잘 어울리시네요.”
“뭐?”
“둘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요.”
그 말과 함께 돌아선 세화가 그대로 멀어졌다.
잘 가시라는 말도, 주경현이 물은 말에 대한 대답도 없었다.
“…….”
‘아까부터 뭐지 저 말은? 게다가 저리 가는 거야? 정말 간다고? 내가 여기 있는데?’
내도록 그녀를 기다리다가 닭 쫓던 개 꼴이 된 주경현이 황당함에 입을 떡 벌렸다.
제 아가씨를 따라가다 뒤를 슬쩍 돌아본 영선이 조용히 물었다.
“사촌 아가씨랑 잘 어울린다니,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해요. 그러다 정말로 관심 있게 보시기라도 하면…….”
“아니. 이 말 때문에 더더욱 그 아이를 멀리할걸?”
“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때는 별 상관없이 함께 있었겠지. 헌데 누군가 그런 둘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면? 저 자만심 높은 소가주가 그 앨 옆에 둘까?”
“…….”
소가주를 향한 그 말투에 영선이 또다시 조금 놀랐다.
조금 전 상황을 보고 소가주님께도 무언가 서운한 일이 있었구나 싶긴 했지만.
‘도대체 저 소가주님과 사촌 아가씨가 아가씨께 무슨 짓을 한 거지?’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우리 아가씨께서 이렇게 변하신 걸까.
영선이 그것을 염려하며 고민하는 동안, 주세화는 대문 앞에서 엉켜 있는 둘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 * *
주명윤은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평정심이 흐트러지지 않는 무장이었다.
병사들의 실수도 군법에 위반되는 것이 아니라면 항상 포용력 있게 감싸 주었으며 언성을 높이는 일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미간이 지금은 끊임없이 찌푸려졌다가 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아들들이 합류한 후, 그의 마음은 훨씬 더 답답해져 버렸다.
“……해서 그땐 마치 영력이 무언가로 막히기라도 한 듯 뻗어 나가지를 못하고…….”
‘저 대화가 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저러는 것인가.’
참다못한 주명윤이 제 아들들을 불렀다.
“가윤아. 주가윤. 지금 누구에게 뭘 상담하는 것이냐.”
“아, 그럴 땐 영력을 이렇게 사용하시면 됩니다. 검을 줘 보시겠습니까. 네. 오, 좋은 검이군요. 한번 보십시오. 힘을 이렇게 돌려서, 이런 식으로.”
“와, 그렇군요!”
“헉. 정말 됩니다. 알려 주시는 방법으로는 금방 되네요!”
“아니면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이렇게 돌려서, 여기서 이런 식으로.”
펑!
“와!”
짝짝짝!
백기하의 영력 운용을 따라 흰빛을 뿜어내던 검이 가늘게 떨리며 진동했다.
마치 채찍처럼 길게 뻗어 나간 검격에 얻어맞은 나무는 거대한 화살이 관통하기라도 한 듯 중간이 뚫려 있었다.
아들들은 상기된 얼굴로 박수를 치다가 방금 본 것을 따라 해 보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하…….’
물론, 어떤 것이든 자신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배우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때와 상대는 가려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 대체 누구에게 뭘 배우고 있는…….’
뒷목이 뜨끈해진 주명윤이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가한아! 너마저 뭘 하는 것이냐. 아비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그자는 적이다. 그걸 모르는 것이냐, 이놈들아. 적이라고!’
“아버지.”
계속된 제 아버지의 시름을 이제야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늘 어디에서나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던 자랑스러운 장남 주가한이 주명윤을 보며 무릎을 꿇었다.
“염려하시는 바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부터 눈앞의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누구에게 배우든 그 배움이 육도(六度)에 어긋남이 없다면 좋은 배움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뭐라고?”
“맞습니다!”
주가윤도 제 형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저도 저분의 신분을 알고 있습니다. 허나 저분에게도 저희는 적일진대 한 점 거리낌 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비기를 나누어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마음마저 외면하는 옹졸한 이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백기하도 주명윤을 보며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미장 어른. 전 정말 세 분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알고 있는 것을 나누려 하는 것일 뿐입니다. 전장에서의 일은 전장의 일로만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결코 인성이, 그때 보셨던 것 같은, 그런 이가 아닙니다. 제가.”
“……하.”
이건 뭐, 셋이서 편을 먹으니 더 했다간 자신만 편협하고 옹졸한 자가 되어 버릴 판이다.
주명윤이 치솟아 오르는 울화를 한숨으로 쏟아 냈다.
“그럼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진심으로 대답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겠습니다.”
“이번 방문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건.”
“몇 번이고 여쭈었던 것인데, 아직도 대답하실 수 없으십니까.”
“…….”
아무리 낯짝이 두꺼운 백기하라 해도 이 질문엔 답할 말이 없었다.
따님의 혼약을 훼방 놓으러 왔습니다.
제가 나이는 비록 따님의 두 형님들보다 많지만, 그래도 혼인만 허락해 주신다면 따님을 그 누구보다 소중히 아껴 줄 것입니다.
슬픈 얼굴 따위는 보이게 하지 않겠습니다.
“…….”
……라고 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어 보이는 미장에게 말할 수 있을 리가.
백기하가 주명윤을 흘끗 바라보았다. 신장처럼 단단한 얼굴이 그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말할 수 있을 리가.’
저도 정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진심입니다, 미장 어른!
그렇게 속으로만 소리친 백기하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믿어 달라 하는 겁니까?”
“미장 어른. 제가 하나 분명히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제 방문이 결코 주가에 해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
“방문 목적을 제대로 말씀드릴 수 없는 것도 단지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 그럴 뿐이니 제게 말미를 조금만 더 주십시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주가에 절대 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
가만히 백기하를 바라보던 주명윤이 결국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믿어 보겠습니다.”
백기하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주명윤이 하나를 더 물었다.
“그런데 저를 왜 갑자기 미장 어른이라 부르십니까? 미장이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