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냐는 듯 주경현의 눈매가 어이없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두 음절의 말을 끝맺기도 전에 얼굴 전체가 굳어졌다.
매섭게 눈을 치뜬 그가 사연주를 다그쳤다.
“정인이라니. 요즘 행보가 어떻길래 그런 말이 나도는 거지?”
“그건……. 아 참. 오래도록 식사도 하지 않으셨다고 듣고 조금 준비해 보았는데, 간단히 요기라도 하시는 동안 말씀드리는 건 어떨까요?”
“되었다. 오래지 않아 갈 것이다.”
“그래도 조금만 드십시오. 감히 소가주의 대접에 소홀했다는 걸 누가 알기라도 하면 모두 저희를 비난하지 않겠습니까.”
사연주가 문밖을 향해 신호하자 시녀들이 준비된 주안상을 들여왔다.
“소가주께서는 환계의 차대 신영이시자 장차 환계와 인간계 두 세계를 맡아 다스리실, 누구보다 귀한 분이신걸요.”
“…….”
“입맛이 없으시더라도 조금만 드셔 보시어요. 제가 술을 따라 올리겠습니다.”
모든 일이 항상 그의 생각대로 흘러가야 만족하는 주경현은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연주의 태도에 조금 짜증이 났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게 다 그의 특별한 태생과 고귀한 위치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의 대접에 소홀했을 때 퍼져 나갈 말들을 생각하면 사연주의 이런 행동 역시도 이해 못 할 일은 분명 아니었다.
‘이 사촌 동생이 사씨였지?’
방계 사씨들 역시도 어차피 나중에 그가 다스려야 할 일족 중 하나였으니까.
‘너그럽고 어진 모습을 보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주경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사연주는 술잔을 채운다는 명목으로 그의 옆자리로 다가왔다.
“알았으니 정인에 대해 먼저 설명해 보거라. 뭘 어쩌고 다니길래 그런 말이 흘렀다는 것이야.”
“그야, 끊임없이 누군가를 생각하듯 한숨을 짓지 않나. 몸이 아픈데도 건강을 돌보지 않고 외출하여 밤이 늦어야 돌아오곤 하니까요.”
“…….”
“이전의 언니와는 아예 딴판인 그 모습에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야 정인 때문은 아닐까 추측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아무 말이나 지어내는 동안에도 사연주는 살갑게 주경현을 챙겼다.
젓가락으로 직접 안주를 집어 입가에 대어 주는가 하면 술잔이 비지 않게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다지 뭔가를 먹고 싶진 않았지만, 술이 한 잔 두 잔 넘어가며 주경현의 기분도 제법 느슨해졌다.
어느새 사연주가 그의 등 뒤로 다가와 어깨를 주물렀다. 혈자리를 짚는 손길이 부드러우면서도 제법 야무졌다. 딱딱했던 어깨에서 천천히 긴장이 풀렸다.
“소가주님께선 그런 삿된 말들을 염두에 두시지 않겠지요?”
그러니 언니를 보러 자주 와 주시라고 사연주가 주경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신영을 보좌하며 가문을 돌보시느라 얼마나 힘이 드실까. 언니를 보러 오실 때마다 제가 이렇게 어깨를 주물러 드릴게요.”
늘 정성 들여 손질한 하얀 손끝이 주경현의 단단한 목덜미와 귓가를 매만졌다.
“아프진 않으시지요?”
“기분이 괜찮구나. 더 세게 주물러 보아라.”
주경현의 그 말에 사연주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녀가 더욱 세심히 뭉친 그의 근육을 풀었다.
자존심이 높은 주가의 여자들은 이런 아첨하는 듯한 모습을 경멸했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지배자의 혈족이라는 자부심이 대체 뭐라고.
그런 너희들을 내가 밟고 올라설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남자는 내가 가질 거야.
그때였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와, 주경현의 시선이 빠르게 돌아갔다.
어느새 돌아온 주세화가 둘의 그런 모습을 보며 문밖에서 웃고 있었다.
“세화야!”
쨍그랑!
“아얏!”
주경현이 서둘러 일어나는 통에 그의 어깨를 주무르던 사연주가 뒤로 넘어졌다.
상 위에 놓여 있던 술병도 바닥에 떨어져 깨져 버렸다.
“소가주님! 잠시만! 잠시만요!”
흥건히 퍼진 술에 치마가 젖고 파편에 긁혀 피가 나면서도 사연주는 주경현만 외쳐 불렀다.
하지만 주경현은 바닥에 넘어져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그녀를 한 번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세화에게 다가갔다.
그런 소가주의 등을 응시하며 사연주가 입술을 꾹 물었다. 손이 바닥을 긁으며 아프게 움켜쥐어졌다.
이래서.
이래서 빼앗아야 하는 것이다.
빼앗지 않으면 내게 잡혀 줄 이가 없으니까.
* * *
제 소매 속에 들어 있던 잎사귀를 영선에게 넘긴 세화는 여러 번 당부했다.
“바싹 말려야 해. 조금이라도 수분이 남아 있지 않게.”
“헌데 이게, 정말 그런 효과가 있다고요? 그런 게 알려졌다면 벌써 다들 영목의 잎을 뜯어 갔을 거예요.”
“다른 영목은 안 돼. 그 영목이어야 해.”
영선은 도대체 수많은 영목 중 자신들이 지금 보고 온 영목이 왜 특별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제 아가씨가 그렇다면 그런 것일 테니 굳이 이유를 알 필요는 없었지만 말이다.
“아궁이 근처에 두면 몇 시진 되지 않아 금방 마를 거예요. 제가 지키고 있을게요!”
그들이 그런 말을 나누며 저택으로 다가가고 있을 때였다.
대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던 하인 하나가 반색하며 달려왔다.
“오셨군요, 아가씨! 소가주님께서 낮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뭐?”
“벌써 한참 되셨습니다. 연주 아가씨가 주안상을 들이셨으니 아가씨께서도 빨리 들어가 보십시오.”
“……누가 와서 주안상을 들여?”
너무 어이가 없던 나머지 세화가 조금 웃었다.
“우습지도 않네, 정말. 앞으로는 그 아이 절대 저택에 들이지 마.”
“예? 사촌 아가씨를요?”
“그래. 그리고 오늘도 이 대문을 넘을 땐 가진 것 하나 없이 나가야 할 거야. 아무것도 손에 쥔 것 없이 빈손으로 내보내. 알았어?”
‘그때 맞은 걸로는 부족했나 보지? 제 발로 여길 들어오고.’
물론 뭣 때문에 돌아온 건지 알 것 같았지만 말이다.
‘주안상을 들고 들어가 대체 뭘 하고 있을까. ’
그것이 궁금해 거침없이 다가가 들여다본 사랑채 안이 또 가관이었다.
목선을 다 드러낸 사연주가 마치 창기처럼 주경현에게 가슴을 밀착한 채 그의 몸을 주무르고 있었다. 무슨 의도인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내가 전생에 정말 눈이 없었구나.’
저런 모습들이 어제오늘 일이 아닐 텐데 이제야 제대로 보게 된 것을 보면 말이다.
어이가 없어서 또 조금 웃었는데 주경현의 시선이 바로 따라왔다.
“세화야!”
그녀를 부르는 미소엔 여전히 그늘 한 점 없었고 시선은 달콤하기까지 했다.
어느 순간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세화가 물었다.
“무슨 일로 지금까지 계셨던 겁니까?”
“응?”
살갑게 다가오던 주경현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벌써 밤이 늦었습니다. 왜 지금까지 이곳에 계시느냐는 말이에요.”
“…….”
잠시 놀라 굳어져 있던 주경현이 눈썹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너야말로 늦은 시간이라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구나. 어찌 이런 시간까지 외출을 해.”
거기다 좋지 않은 소문까지 도는 것 같은데 그것도 모르면서 이리 밖을 나돌아 다니다니.
“음전하게 생활하며 몸가짐을 조심해야지. 그래야 나와 더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있지 않겠니.”
뭐라?
“…….”
잠시 굳어졌던 세화가 다시 낮게 목을 울렸다. 기가 막히니 웃음소리가 저절로 새어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주경현은 엄하게 찌푸렸던 표정을 풀고 다시 눈을 부드럽게 했다.
“내가 너무 늦게 와서 화가 나기라도 한 거냐. 전쟁 배상 일로 정신이 없는 걸 알지 않니. 그간 나도 바빴다. 네가 이해해 주어라.”
“…….”
“그래도 일이 해결되자마자 널 만나러 온 거란다. 그러니 너도 얘길 해 보거라. 대체 어딜-.”
“뭘 하셨는데요?”
“뭐?”
“소가주님께서 전쟁 배상 일로 뭘 하시길래 정신이 없으시냐는 말이었어요. 다른 원로분들은 영력을 뽑아내시느라 원신이 상하기까지 하시던데. 소가주님께서도 영력을 뽑으셨나요?”
“…….”
“아니면 내탕금에서 배상금을 내놓으셨나요?”
“…….”
“그것도 아니시면 백가에 직접 가는 것을 고려해 보신 건가요? 늦었지만 아직 불안한 전선을 직접 지키기 위해 출전 준비라도 하셨다든가?”
“…….”
세화가 이런 상황에서도 화려하게 의복을 갖춰 입은 주경현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뭘 하셨다는지 모르겠네요. 뭐 하느라 바쁘셨죠?”
“…….”
한 가지도 대답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같잖았다.
‘비겁한 새끼.’
세화가 차갑게 돌아서려 하자 주경현의 큰 손이 황급히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주세화.”
“소가주님!”
그 순간 영선이 서둘러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아가씨께선 고열로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다가 간신히 일어나셨습니다. 이틀밖에 되지 않았어요.”
“아…….”
세화의 어깨를 틀어쥐었던 단단한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래. 백가로 홀로 떠나야 하는데, 두려움에 누구에게라도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이 있겠지. 쉬운 일은 아닐 테니.’
그 틈을 이용해 세화가 제게서 멀어지는 걸 보면서도 이번엔 화를 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는 내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해선 안 된다. 막돼먹은 그 언사를 참아 주는 건 오늘뿐이야.”
제법 부드러운 목소리로 경고한 주경현이 피곤하겠다며 그만 들어가라 그녀에게 턱짓했다.
“신영께서 우리 둘 다 환계로 돌아가라는 명을 내리셨단다. 오늘 그 얘기를 하러 온 것인데 일단은 쉬고 있거라. 내가 내일 다시 오마.”
“저는 출입패가 없는데요.”
그렇게 대답한 세화가 주경현을 향해 당당히 손을 내밀었다.
“홀로 갈 터이니 그럼 오신 김에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출입패나 하나 주고 가세요.”
“…….”
‘이 아이 말투가, 대체 왜 이러지?’
제가 왔는데도 버선발로 뛰어나오긴커녕 기약도 없이 기다리게 하질 않나.
그럼에도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되바라진 말만 꺼내 놓질 않나.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던 주경현이 의아하게 눈을 껌벅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