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간, 문이 빛나는 것을 발견한 초소병들은 긴장한 기색으로 모여들었다.
미리 연락받은 바도 없었고, 문의 반응이 출입패가 있는 이들이 통과할 때와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윽고 문에서 나타난 것은 두 명의 여성이었다.
무기를 들고 있던 초소병들이 명윤의 여식을 알아보고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어쩐 일이십니까. 신영의 허가 없이 문을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아, 맞다. 규칙이 그렇게 바뀌었었지요. 이를 어째. 제가 문을 잘 사용하지 않다 보니 깜빡하고……. 정말 죄송합니다.”
세화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며 영선에게 눈짓했다.
영선이 끈으로 묶어 들고 온 술병들을 냉큼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혹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번에 신영의 명을 받아 홀로 백가로 가게 되었습니다.”
알다마다.
세화가 마음을 바꿀 수 없도록 신영이 빠르게 소문을 퍼뜨린 덕에 주가의 영지에서 그 일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초소병들의 눈빛이 동정으로 물들었다.
“헌데, 그 험한 길에 초소의 병사 한 분과 동행하게 되어서요.”
“아…….”
“당시에는 생각한 바가 있고 중요한 일이라 여겨 신영께 그런 청을 드리게 되었지만, 동행하시게 될 병사분께는 너무나도 죄송할 따름입니다.”
주세화가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여 죄책감에 밤낮으로 고민하다가 미흡하게나마 직접 뵙고 사죄드려야 할 것 같아 이리 불쑥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벌써 동행할 병사가 결정이 난 것입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자원하실 분이 계실 수도 있고, 혹 차출하게 되더라도 초소 분들끼리 의논을 하실 시간이 필요하시지 않겠습니까. 어느 쪽으로든 결정되기 전에 미리 알려드리는 것이 순서일 듯해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그렇군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헌데 왜 백가까지 동행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이번 전쟁에서 여섯 가문의 역도들이 인간계로 통하는 통로를 자유자재로 이용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 일, 때문이시군요.”
“네. 죄 없는 초소 병사분들께서도 잠재적 내통자로 오해를 받아 마음고생이 심하시다 들었습니다.”
“…….”
그간 몹쓸 말을 많이 듣긴 했던지 초소병들의 얼굴에 서러운 기색이 번졌다.
“하여 백가에 간 김에 방법을 알아보고 싶은데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초소분들이시라면 문에 대해 정통하실 테니 분명 어떤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내실 수 있으실 것 같았고요.”
“그러셨군요.”
병사들의 장으로 보이는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협조해 드려야지요. 다행히 자비로우신 신영께서 저희를 한직으로 보내시진 않으셨지만, 오명을 벗을 방법을 고심하던 차입니다.”
“그러면 혹시 제가 초소를 잠시 둘러보아도 되겠습니까? 초소장께서 추천해 주시는 편이 가장 좋겠지만, 저도 저와 함께 생활하실 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보니 괜찮으시다면 한번 직접 둘러보며 확인하고 싶은데요.”
“그러십시오. 안내자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염섭아.”
“네.”
그렇게 세화는 안내병과 함께 초소병들이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많은 병사들이 나와 인사를 했으나 세화의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으로 분주하기만 했다.
‘그때 분명 백가가 주가의 초소를 빼앗았고. 초소 안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한 영목을 보고 자리를 옮겨 주려다가 발견했다고 했는데?’
그런데 아무리 초소를 둘러보아도 영목은커녕 잡초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다.
‘뭐지? 대체 어디지?’
도무지 제가 원하는 곳을 찾을 수 없던 그녀가 결국 안내병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저…….”
“네, 말씀하십시오.”
“초소 안에도 영목이 있습니까? 영목의 단 향이 나는데요.”
“단 향이요? 영목은 중강 동북쪽에서만 기르는…… 아. 초소를 나가 조금 걷다 보면 강변 근처에 작은 영목이 있긴 합니다.”
“혹시 가 봐도 될까요?”
“네? 영목이라고는 하지만 굉장히 볼품없는 꼴인데요.”
그가 말하는 곳까지는 초소에서 거리가 좀 되었다. 초소 문을 나선 후 강을 따라 제법 걷고 나서야 원하던 것이 보였다.
‘이래서 쭉 발견되지 않은 거구나.’
전생에 갑자기 고시대의 영단들이 발견되었다고 들었을 때는 이상하기만 했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주가의 영토에 있었는데 어떻게 그사이에는 발견되지 않았다가 백가의 영지가 되자마자 발견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직접 보니 알겠다.
다리도, 길도 없는 마른 땅에서, 비루한 모습으로 자라고 있는 작은 나무 한 그루는 전혀 누군가의 관심을 끌 것 같지가 않았다.
백가의 누군가가 이 나무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면 백가 역시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목 치고 잘 크지 않아 향이 아주 옅은데 예리하시군요.”
영목이 왜 자라지 않는지 아는 세화는 그의 말에 그저 웃을 뿐이었다.
저 영목 아래엔 고시대의 영단이 가득한 것이다.
아무리 영목이 대기 속 영기를 모으며 성장한다고는 하지만.
‘너무 독한 비료는 오히려 식물의 성장을 저해하게 되지.’
뿌리를 통해 방대한 영력이 강제로 주입되는 상황이었으니, 힘을 이기지 못하고 썩어 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일 터였다.
그리고 또 하나 세화에게 다행인 것은 영목이 있는 위치였다.
‘여기라면 굳이 운용권을 사용할 필요 없이도 몰래 영단을 꺼내 갈 수 있어!’
물론 운용권이 있다면 더욱 안전하게 일을 해치울 수 있을 테지만, 일단 위치를 알고 나니 당장이라도 파내고 싶어 애가 닳을 지경이었다.
‘저 영단들만 있으면.’
탈피를 하고 나면 이 몸 안에 들어 있는 힘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가족들과 자신을 조금 더 안전하게 적들에게서 지켜 낼 수 있을 터였고.
그렇다 해도 서두르다간 일을 망칠 수도 있었다.
조급함을 애써 가라앉힌 세화가 초소병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혹시 영목의 잎사귀를 몇 장 뜯어 가도 되겠습니까? 인간계엔 영목이 없어 향이 그립네요.”
“그러십시오. 제가 키우는 나무도 아닌걸요.”
영목의 위치를 정확히 머릿속에 넣으며, 세화는 영선에게 눈짓해 되는대로 잎사귀를 따 제 소매에 넣었다.
* * *
“경현 님께서 오셨다고?! 저택으로?”
가는 목소리가 창호 문 바깥으로 높게 터져 나왔다.
하인의 말을 들은 누군가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안가에서 몸을 피하고 있던 사연주였다.
주세화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저택에 감시자를 붙여 두었는데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황급히 거울을 꺼내 단장해 보았으나 장신구도 옷도 도무지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아이, 급히 나오느라 짐을 챙기지 못했는데.”
그날 주세화의 달라진 모습에 너무 놀랐기도 했고.
혹 거기 남아 있다가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은 사촌 언니에게 또 얻어맞기라도 할까 봐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황급히 도망쳤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뭘 챙겨 나올 수 있었을까.
“헌데 제가 출발할 때 벌써 기다리신다고 안에 들어가셨었으니, 아가씨께서 도착하실 때쯤엔 이미 돌아가셨을 수도 있습니다.”
“됐어. 그래도 가야 해.”
다행히 돈은 미리 빼돌려 둔 것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저택에 남겨진 물건들을 언제까지고 그대로 놔둘 순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다시 저택으로 가기가 불안해 여태 챙겨 오지 못하고 있었지만.
‘저택에 계신 분이 소가주님이신데 그깟 주세화 따위가 대수야? 주세화 백 명이 있어도 가야지. 암.’
그녀가 품은 모든 소원의 종착지이자 결정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이가 바로 주가의 소가주 주경현이었다.
잘 정리된 손톱을 깨물던 사연주가 다시 물었다.
“언니는 외출한 게 확실해?”
“네, 그럼요. 헌데 언제 돌아오실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마음이 급해졌다. 쓰개치마를 뒤집어쓰고 일어난 그녀가 당장 저택을 나섰다.
‘그래. 마주치면 또 어떻담. 소가주님이 계신 곳에서 지가 나를 또 때릴 거야, 어쩔 거야.’
이 기회에 저택에 있는 제 장신구와 패물도 싹 다 챙겨 와야겠다고.
여러 가지 일을 결심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 * *
그사이 주경현의 심기는 시시각각 나빠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세화의 귀가가 너무 늦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시선이 흘끗 위로 향했다.
태양이 사라진 하늘은 끄트머리가 벌써 남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분명 날이 밝을 때 여기 들어왔건만. 대체 이 녀석은 날 몇 시진이나 기다리게 하는 건지.’
붉은 노을이 방 안 가득 스며든 것으로 모자라 어느덧 풀벌레들이 울기 시작했건만.
기다리는 이는 아직 소식조차 들려오지 않았고, 간식을 가져오느니 식사를 준비하겠다느니 분주하던 하인만 때가 되자 조용히 방 안에 초를 켜고 나갔다.
이건 확실히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
‘주명윤이 내 아버지께 고하지 않은 어떤 위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외출이 말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소가주님.”
문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구나!’
“들어오너라!”
너무 오랜 시간을 기다리느라 인내심을 잃어 가던 그가 반색하며 대답했다.
한데 그 대답에 문을 연 이는 기다리던 이가 아니었다.
쓰개치마를 한쪽 팔에 건 채 방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은 세화의 사촌 동생이었다.
그제야 주경현은 누가 왔다는 데만 신경을 쓰느라 목소리를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가주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저고리를 한껏 뒤로 젖혀 목선이 드러난 차림을 하고, 사연주가 주경현을 수줍게 바라보며 물었다.
“너도 어디 외출했다 온 것이냐? 세화는? 세화도 같이 갔었어? 함께 돌아온 것이야?”
“아닙니다. 언니는 요새 무슨 일이 있는 건지 홀로 그리 바쁘게 다닙니다.”
“뭐? 이 외출이 처음이 아니란 것이냐.”
“처음이라뇨. 계속 아침 일찍 나가서는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걸요. 무슨 일인지 제게도 알려 주지 않고 쉬쉬해 서운할 정도랍니다.”
“아침 일찍 나간다고?”
“네. 그래도 오해는 하지 마세요.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언니가 백가에 가지 않으려 뭔가 일을 꾸미는 거라느니, 저런 행태는 분명 정인이 생긴 거라느니, 온갖 소리를 하지만…….”
일부러 궁금할 부분에서 말을 끌며 사연주가 주경현의 눈치를 보았다.
그가 제 말에 집중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조용히 그의 앞에 앉으며 덧붙였다.
“저희 언니가 어디 그럴 성격인가요. 신영의 명에 따라 의연히 백가에 다녀올 것입니다.”
그녀의 입꼬리가 조금 위로 솟았다.
“물론 정인에 대한 것도 거짓 소문일 것이 뻔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