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254)

“잘했구나.”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배상 영력이라든가, 아직 해결되지 못한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다. 영력은 원로들에게서 강제로 몇 번 더 추출할 것이지만 불만이 생길 수 있으니 너는 괜히 그들 앞에서 영력을 사용하거나 하진 말아라.”

“헉. 원로들이 설마 저를 물고 늘어졌습니까?”

“그건 아니다. 너는 아직 탈피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영단을 사용해 강제로 탈피시켜서라도 소가주로써 책임을 분담케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으니 조심하란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신영.”

“그리고 백기하가 왔다는 말은 이미 들었지?”

“네.”

“신수만 아니었어도 여기서 죽이겠건만…….”

노인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몇 번 문질렀다.

“일단 환계의 영지로 보냈긴 했다만 명윤에게만 맡겨 둘 수는 없지. 주세화를 백가로 보낼 준비가 일단락된 듯하니 너도 곧장 환계로 넘어가서 그들과 합류하거라.”

“그 새끼가 대체 왜 여기까지 왔을까요. 방문 목적은 아직 밝히지 않았습니까?”

“널 직접 끌고 갈 생각 아니겠느냐. 도망치지 못하도록.”

“네?!”

“주명윤에게서 아직 뽑아낼 게 많으니 위로 차원에서 딸을 한 달 후쯤 보내려 했다만, 이렇게 된 이상 더 빨리 보내는 편이 좋겠어.”

고개를 끄덕인 노인이 주경현에게 당부했다.

“어쨌든 돌아가는 대로 넌 환송연을 준비해라. 그리고 연회가 끝나면 곧장 명윤의 여식을 혈통 증명서와 함께 들이밀어.”

노인의 메마른 목소리가 잠시 멈추었다가 덧붙여졌다.

“백기하가 미리 그 아이를 알아서 좋을 게 없으니 함께 데려가되 그 아이가 먼저 백기하와 접촉하게 하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차질없이 진행할 테니 염려 놓으십시오.”

“그래. 나도 정리해야 하는 일이 끝나면 곧장 환계로 돌아가마.”

“네, 아버지.”

“하하. 네가 가는 줄 알고 있을 텐데 주명윤의 여식이 간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낯짝을 하게 될까. 그게 참 궁금하구나.”

잠시 웃던 노인이 턱을 매만지며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도 이제 혼약을 해야 할 텐데, 상현의 여식은 어떠하냐. 윤경의 여식도 나쁘지 않고.”

“예?”

주경현이 제법 놀라며 반문했다.

“신영께서 분명 백가로 보내는 조건으로 주세화와 저와 혼약을 진행하신다고…….”

“그것이 너와의 혼인을 거부했다.”

믿어지지 않는 말이라 주경현이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네?”

‘주세화가, 나와의 혼인을 감히 거부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머릿속은 똑바로 박혔는지, 자신이 백가에 가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차마 너와 혼약은 할 수 없다더구나.”

“…….”

“아무튼 그렇게 되었으니 괜찮은 아이가 있는지 너도 한번 찾아보거라. 환계로는 며칠 내로 속히 출발토록 하고.”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주경현이 알현실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그러면서도 아직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세화가 나와의 혼약을 거부해? 그 주세화가?’

“자신이 백가에 가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차마…….”

뭐 합당한 결론이긴 했다.

아무리 자신과의 혼사가 욕심 난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염려를 우선시해야 하는 게 맞으니까.

하지만 또 어떻게 생각해 보면 여전히 이상하긴 했다.

그 아이는 늘 그에게 맹목적이었으니까.

두 오라비와 아버지가 십 년간 전장에 나가 있느라 얼굴을 잘 보지 못해서일까.

주경현은 주세화에게 두 오라비의 대신이었고 때로는 아버지였다.

나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아는데, 그렇게 쉽게 거절했다고?

‘아. 그러고 보니 울었었지. 그게 혼약을 거절할 때였군.’

그의 얼굴을 보며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던 주세화의 모습이 그제야 기억이 났다. 자신이 찾아가겠다고 했던 것도.

‘나와 혼약하지 못하는 게 얼마나 서럽고 가슴 아팠으면 그렇게 울었을까.’

며칠 전의 약속을 이제야 기억해 낸 주경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그 아이를 백가에 보낼 준비도 일단락되었으니. 한번 만나러 가 볼까?’

가볍게 결정을 내린 그가 발걸음을 돌려 저택을 나섰다.

* * *

한데 보무도 당당하게 주명윤의 저택에 도착한 주경현은 황당한 상황과 마주했다.

만나러 온 이가 당연히 버선발로 달려 나올 거라 기대했건만.

“없다고?”

그녀가 집에 없단다.

대문 앞에 선 주경현이 잠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며 되물었다.

주명윤을 모시는 환족 시종이 몹시 황송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소가주님. 아가씨께선 외출하셨습니다.”

“어디로?”

“그건 저도 잘……. 제게 행선지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

‘하, 이거 참.’

제법 이상한 날이다. 그가 찾아왔는데 주세화가 집에 없다니.

‘내가 찾아오겠다고 했는데, 날 기다리지 않고 나갔다는 게 말이 되나?’

“언제 돌아오지? 안에서 기다리겠다.”

“죄송합니다, 소가주님. 기다리시겠다면 안으로 모시겠습니다만, 언제 돌아오실지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귀가 시간도 말하지 않았다고?”

더욱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연히 외출이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내가 분명 찾아오겠다고 했잖아? 그런데도 행선지나 귀가 시간조차 이르지 않고 나갔다는 게 말이 되나?’

이해가 가지 않는 말들에 주경현의 얼굴이 제법 심각해졌다.

‘혹시, 신영께는 알리지 않은 뭔가 위급한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건가?’

그러지 않고서야 제가 오겠다고 했음에도 주세화가 나갈 이유가 없으니까.

그가 찾아가겠다는 말을 하고서도 벌써 며칠이나 지났다는 사실은 주경현의 뇌리에 남아 있지조차 않았다.

‘백기하를 주명윤이 맡고 있다고 했지. 혹 그 일 때문인가? 아니면 또 다른 뭔가가 있나?’

하지만 여기서 고민한다 해도 딱히 알 방법이 없었다.

잠시 고민해 보던 주경현이 일단 안으로 들어섰다.

‘두고 보면 알겠지. 혹 귀가 시간을 말하고 간다는 걸 깜빡한 것일지도 모르니.’

기다려서 일찍 돌아온다면 별일 아닐 테고, 늦게 온다면 무슨 일이 있긴 한 것일 터.

‘헌데 왜 세화의 사촌 동생도 내게 인사 오지 않는 거지?’

늘 입안의 혀처럼 비위를 맞추던 여자까지 보이지가 않았다.

그 사촌 동생은 세화만큼 예쁘지는 않았으나, 기가 센 주가의 여자들과 비교할 때 제법 그의 기분을 즐겁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둘이 같이 나간 건가?’

그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쪼르르 나타나 듣기 좋은 말을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건만.

하인이 안내한 사랑채에 자리를 잡으며 그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듯 홀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그는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뭐. 내가 기다린 것을 알면 세화도 기뻐하겠지.’

분명 또 볼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

자기를 걱정해서 여기까지 왔냐고. 눈을 반짝이며 감격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낼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제법 기다릴 맛이 나기도 했다.

창을 연 그가 후원 가득 핀 불두화를 보며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 * *

세화는 환계로 통하는 문 앞에 서 있었다.

“허락 없이 넘어가시게요? 가지고 계신 출입패는 이미 영채와 영무에게 주셨잖아요.”

영선이 제법 걱정된다는 얼굴로 속삭였다.

예전에야 주씨의 후손이기만 하면 저 문을 사용해 인간계와 환계를 넘나드는 일이 자유로웠다.

하지만 육가와의 전쟁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나서는 그 방침도 바뀌었다.

여섯 가문이 인간계 통로를 사용해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으나 그 방식을 파악할 수 없자 내통자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때문에 지금은 문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일일이 신영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혹은 신영의 인장을 받은 출입패가 있거나.

그녀의 출입패는 얼마 전 영채와 영무를 환계로 보낼 때 넘겨주었다.

“어차피 나 혼자 다녀오려고 했어. 괜찮으니 넌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안 돼요!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아가씨를 혼자 보내요.”

“괜찮다니까. 주가의 초소에서 무슨 일이 있겠어.”

“절대 안 됩니다. 원로 어르신도 어르신이지만 아가씨 혼자 보낸 걸 영무와 영채가 알게 되면 저는 죽은 목숨이에요. 걔들이 절 살려 둘 것 같으세요?”

“과장은.”

“과장이라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 그때 가셔서 영무와 영채 손에 잔인하게 살해당한 제 시신을 보고 놀라지나 마시고요.”

장난인 걸 알면서도 세화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야말로 그런 말 하지 마. 살해당한다느니, 시신이라느니. 절대로. 알겠어?”

“예? ……예.”

“절대로 죽지 말고.”

“예.”

정색하며 나온 대답에 영선은 잠시 놀랐으나 곧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배시시 웃는 얼굴을 하고 주세화의 옆에 바싹 붙었다.

“그래서, 여긴 넘어가서 뭐 하시려고요.”

“술 줘 봐.”

그들은 문에 오기 전에 여러 병의 술을 준비했다.

병목이 끈에 묶인 술병들을 향해 눈짓하며 손을 내밀었지만, 영선은 내어 주지 않았다.

“함께 간다니까요.”

표정에 담긴 결심이 몹시 단호해 세화가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둘이 함께 문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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