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다리를 다친 것을 발견하고 그녀를 처소까지 안아 데려다준 이후부터일까.
백기하는 종종 이런 식으로 세화에게 다가오곤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그녀는 백기하가 이렇게 도움을 줄 때마다 위선자라고 폄하하며 제대로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 태도에는 아랑곳없이, 백기하는 그녀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화살에 영력을 싣는 법도 알려 주었다.
그럼으로써 거리에 상관없이 과녁을 맞히는 방법까지.
그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그녀는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치 원래부터 그에게 배우기로 약속되어 있었던 것처럼 순순히 그의 말에 따라 자세를 교정했다.
한참을 그렇게 성심성의껏 방법을 일러 주던 백기하가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 그녀의 자세를 보아 주던 도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걸 왜 가르쳐 주는지 궁금하지 않아? 어째서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지?”
또 다른 화살을 시위에 메긴 그녀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엇을, 왜 물어봐야 하죠?”
핑! 소리를 내며 화살이 과녁으로 날아갔다.
영력을 싣는 방법을 익히면 익힐수록, 화살이 과녁의 중심 근처에 꽂히는 횟수도 늘어나고 있었다.
“좋은 마음으로 가르쳐 주는 거겠어요?”
“……? 좋은 마음인데?”
“알 바 아니고요.”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제 다친 다리를 보며 미안하다고 사과하기도 했으니 답지 않게 죄책감이라도 느꼈나 보지. 그렇게 생각했다.
“……좋은 마음으로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왜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배운 건데?”
‘뭐 저런 멍청한 질문이 다 있담?’
그녀가 처음으로 백기하를 잠깐 돌아봤다.
대답을 할까 말까 하다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대꾸했다.
“무슨 개떡 같은 이유인지 내 알 바냐고요. 가문의 비전을 마구 남발하며 밖에다 퍼 나르겠다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내 일도 아닌데 그런 멍청한 짓을 굳이 뭐 하러 말린담?”
이내 다시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화살이나 시위에 걸었지만.
시위를 떠난 화살이 다시금 핑―! 소리를 내며 과녁에 가서 꽂혔다.
완벽히 중심을 관통했다.
냉정한 대답에 한참이나 멍하니 있던 백기하는 말의 어디가 우스웠는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열심히 배워 놓고는 너무하는데.”
다시 화살을 들어 올리던 그녀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런 적 없다는 양 자연스레 다시 시위에 화살을 메겼으나 저 백가의 가주는 이미 다 보았을 것이다.
보면 어때.
그녀가 이를 사리물었다.
너무하다니. 터진 입이라고 별말을 다 해, 정말.
너무한 건 너희들이지.
실종 사건의 범인이 주가의 영지에 들어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증거도 없이 주가가 범인인 양 억지를 부리는 너희가 너무한 거지.
주가는 도의적으로 사건의 해결을 도울 뿐인데 전쟁까지 일으키고.
힘도 없는 어린 환족을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끌고 와 가문에 얽매어 놓는 너희야말로 너무한 거지!
별 가당찮은 말을 다 듣는 그녀의 속에 울화가 들끓었다.
육가 연합의 맹주라는 놈이 저따위 말을 하고 있으니 자신이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귀환 일을 특정할 수 없을 테고 말이다.
표정엔 드러내지 않았으나 그는 그 잠시의 머뭇거림을 통해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그녀의 속을 짐작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한참 만에 이상한 소리를 꺼내 놓았다.
“……미안하진 않지만, 미안하네.”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되묻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녀는 지금 여기 있었고, 돌려보내 줄 게 아닌 이상 저런 말은 들어 봐야 소용 없었으니까.
“……미안해.”
한 번 더 반복된 말 역시도 못 들은 체했었다.
* * *
그때의 조언을 되새기며 그녀가 몸 안의 영력을 돌렸다.
이제 몸속엔 그녀가 본디 가지고 태어난 영력보다 백가의 영력이 조금 더 많았다.
호족의 영력이 그녀 주위로 낮은 바람을 불러왔다.
각 가문의 가전 무기는 그들이 가진 영력의 기질에 따라 선택된 것이다.
그 말인즉슨 이제 그녀는 이 백가의 영력 이상으로 제 본신의 영력을 키우지 않는 이상 검보다는 활에 특출한 능력을 보일 거란 말이었다.
“자세 신경 써야지.”
세화가 허리를 펴고 턱을 당겼다.
“과녁은 직선으로 보고.”
기억 속,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고정한 후 손을 놓았다.
영력이 실린 화살이 순식간에 과녁으로 날아가 한가운데를 터뜨렸다.
펑―!
‘아.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런가. 힘이 너무 들어갔네.’
그녀가 한 번 더 활을 들었다. 이번엔 조금 전보다 영력을 줄인 채 신중히 손을 놓았다.
빠르게 날아간 살이 터져 나간 과녁의 구멍 옆, 가느다란 실밥을 정확히 맞혔다. 그녀가 의도한 곳이었다.
몇 번을 쏴도 마찬가지였다.
백가 신수의 영력이 제 몸 안에 있으니 전생보다 적중률이 월등할 거라 예상은 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그녀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마치 신이 주신 능력처럼, 쏘는 화살마다 백발백중으로 과녁을 맞혔다.
“꺄악! 아가씨!”
“……?”
“아가씨, 손이요. 손!”
그 상황이 어찌나 즐겁던지, 정신없이 활을 쏘다가 갑작스러운 고성에 정신을 차렸다.
당황한 표정의 영선이 그녀에게 황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금방 왔을 텐데 저를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 그러셨어요.”
영선이 그녀의 손끝을 조심히 들어 올렸다. 손끝이 다 터져서 피가 범벅이었다.
“어?”
그걸 그제야 눈치챈 세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프다고 표정을 찡그리긴커녕 좋아서 배시시 웃었다.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걸 이런 곳에서도 느끼네.’
전생의 그녀는 백기하의 조언 이후 부단히 활을 연습해 왔기에 이미 손끝과 마디에 빽빽이 굳은살이 배겼던 것이다.
그런 뒤로는 이렇게 다친 적이 많지 않았는데 지금 내려다보이는 손은 여리고 곱기만 했다.
“아이고, 어서 가셔서 약을 발라요. 고운 손에 흉이 지겠어요.”
“아냐. 나 이젠 검 연습할 거야.”
“절대 안 돼요! 약 바르고 손이 낫기 전까진 절대로요! 이 이상 하시겠다면 원로 어른과 장부인께도 다 말씀드릴 거예요.”
“아, 알았어.”
영선의 단호한 태도에 세화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빨리요. 활 내려놓으시고요. 검도요. 검 잡으실 생각 마시고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어, 그래.”
세화가 영선에게 손목을 붙잡힌 채 손을 치료하러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보이는 과녁엔 과녁을 이룬 끈의 결을 따라 화살이 정교한 모양새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 * *
이른 아침, 팥배나무가 가득 펼쳐진 저택의 마당을 가로지르는 가벼운 발걸음이 있었다.
이슬이 앉은 나무의 서늘한 향이 싱그러웠다.
환계보다 아침이 이른 인간계의 공기 역시도 제법 상쾌했다.
‘인간계는 이 햇빛이 좋단 말이야.’
주경현이 시리듯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직한 콧노래가 새어 나왔다. 주세화를 백가로 보내는 일이 물이 흐르듯 착착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으라는 법은 없군. 육가 연합에서 신영의 핏줄이어야 한다며 사건의 조사 책임자를 요구했을 때는 대체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몹시 초조했었건만.’
다행히 지혜로우신 아버지, 가주이신 신영께서 저 대신 그 임무를 맡아 수행할 사람을 찾아 주셨다.
‘주제도 모르는 역도 무리들이.’
주경현이 그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감히 날 인질로 잡아 아버지를 협박하려고 해?’
다행히 주세화를 보내기로 얘기가 다 되었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 아닌가.
육가 연합에서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쩌나. 그 걱정 때문에, 주경현은 어떤 반박도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서류를 준비했다.
마치 짐승의 혈통을 보장하듯 주세화의 가문 족보까지 꼼꼼히 첨부한 것이다.
이만큼 관련 자료를 많이 들려 보내어 그녀가 신영의 피를 받은 혈육임을 명확히 했으니.
‘그걸 보면 더는 날 보내라 요구할 수 없겠지.’
함께 보낼 약간의 호위와 그녀를 백가로 안내한 후 돌아올 특사까지 선출해 둔 후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세화에겐 미안하지만 날 보좌하는 것 또한 혈족들의 임무이니까. 중요한 신분인 내가 어찌 그런 곳까지 가겠어.’
주경현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제 아버지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신영의 앞에서 흘러나왔다.
“이렇게 준비가 벌써 완료되었으니 당장 내일이라도 그 아이를 백가로 보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