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집으로 돌아온 세화는 방에 앉아 제 안의 영력을 돌려보았다.
타인의 영력이건 어쨌건 간에 몸 안에 힘이 그득 차올랐으니 탈피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탈피하지 못한 종족과 탈피를 끝낸 종족은 쓸 수 있는 힘의 양이 완전히 달랐다.
‘조금이라도 빨리 탈피를 할 수 있다면 분명 도움이 될 터인데…….’
하지만 이미 탈피를 할 수 있을 만큼 영력이 충분한데도 뭐가 문제인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영력이 문제가 아닌가? 그럼 대체 뭐가 더 채워져야 탈피가 되는 거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어도 지금은 부모님도 오빠도 모두 멀리 떨어져 있으니.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선 조금 기다려야 할 터였다.
‘탈피도 하기 전에 두 가지 영력이 섞여 버려서 그런가? 설마 이러다 예상보다 더 늦어진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늦은 시간까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생각을 거듭하는데, 불빛을 보았는지 영선이 밖에서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누우셨습니까? 최장명이 사람을 시켜 무얼 보내왔어요.”
“뭐? 벌써?”
세화가 반갑게 일어서서 방을 나섰다.
연회장에서 마주쳤을 때 미리 무언가를 부탁해 둔 것이다.
환계의 것이든 인계의 것이든 상관없으니 구할 수 있다면 검과 활을 구해 달라고.
“가져온 이의 말에 따르면 이곳의 것 중 괜찮은 것이 있어 먼저 보냈다 합니다. 다른 곳의 것도 구하는 대로 보내겠다 했고요.”
서둘러 신을 신고 땅으로 내려섰다.
하인들이 긴 목함 하나를 들고 와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목함 안에는 비단 천에 싸인 두 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천을 풀자 꽤 커다란 흑각궁과 화살이 나타나 영선의 눈이 동그래졌다.
“활? 뭔가 했더니 활이었나요? 아가씨께서 활은 뭘 하시려고요? 활을 배우시게요?”
“배우긴. 나 이미 쏠 줄 안다. ……알걸?”
“네?”
영선이 깜짝 놀라다가 손사래 쳤다.
“설마 아주 옛날에, 그러니까 요만하실 때, 코 흘리시던 시절에 배우신 걸 말씀하시는 거예요?”
“……코를 흘리진, 않았던 것 같은데.”
세화가 저 아래를 가리키고 있는 영선의 손끝을 보며 대답했다.
“그만 하지도 않았고. 그때도 난 좀 컸지.”
“크시긴요. 요만하셨는데요.”
“그만하지는 않았다니까.”
“어쨌든요. 그 옛날에 배운 것이 기억이 나시겠어요? 괜히 다치시지 마시고, 정 배우고 싶으시거든 원로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배우세요.”
“괜찮아. 쏠 줄 아니까. 나 심지어 잘 쏜다. ……잘 쏠걸?”
세화가 제법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하다 말고 번번이 의문으로 끝을 맺자 영선이 답답한 듯 제 가슴을 퍽퍽 때렸다.
그리고 세화의 대답은 듣지 못한 양 염려를 쏟아 냈다.
그도 그럴 것이 세 자매와 세화는 오래 떨어져 본 일이 없었다. 항상 붙어 있으면서도 활 연습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잘 쏜다는 말이 믿어지기나 할까.
게다가 “알걸?”, “잘 쏠걸?”이라니.
저게 무슨 본인도 모르는 자신감이시지?
“나머지 하나는 뭔가요? 혹시 검인가요?”
비단 천에 싸여 있어도 어렴풋이 드러나는 형태가 명백했다.
영선의 질문에 세화가 얼른 다른 물건도 천을 풀었다.
“최장명이 능력이 있긴 있구나.”
어디서 이렇게 좋은 것을 빨리 구했는지, 딱 그녀가 쓰기 좋은 크기와 무게였다.
세화의 손이 검집에서 검을 꺼내 보았다.
스릉-.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뽑혀 나오는 검이 달빛 아래에서 은은한 흰빛으로 빛났다.
환계나 인계에서 보통 사용하는 것보다 더 얇고 가벼운 검이었다.
“영선아, 가서 연무장 좀 준비해 줘.”
“네?! 지금요? 뭐 하시려고요.”
“뭘 물어봐. 당연히 둘 다 지금 써 보려는 거지.”
“아이고, 아가씨.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세요. 일단 오늘 주무시고 내일 하세요. 내일 일찍 준비시켜 놓을게요.”
“아냐. 지금 해 줘. 빨리.”
“내 편찮으시다 깨어나신 게 엊그제인데 외출에, 연회 참석에. 이제 이 밤중에 무예 연습까지 하시겠다니요.”
“괜찮다니까.”
“아무리 가벼워 보여도 검은 검이에요. 열 번만 휘둘러도 얼마나 힘든데요. 게다가 활시위라는 게 얼마나 단단한지 기억 못 하셔서 그러시는 거예요. 그걸 팽팽히 걸어 당기다 보면 멀쩡하던 이도 병이 날걸요.”
대단히 걱정되는지 영선은 세화가 손을 내젓는데도 끊임없이 말을 덧댔다.
“백가행 때문에 걱정돼서 그러시는 거세요? 그래도 조금만 기다리시면 원로 어른께서 돌아오실 테니 그때 하세요. 저도 아가씨와 같이 배울게요.”
“응. 그때도 배울 거고.”
영선의 말에 꼬박꼬박 대꾸하면서도 세화는 거침없이 걸었다.
제 아버지가 사용하는 연무장에 도착해서는 하인에게 짚 인형과 과녁을 준비하라 명했다.
아가씨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눈을 동그랗게 뜬 하인들이 서둘러 창고에서 그것들을 꺼내 왔다.
“등불! 등불도 가져와! 아이, 아가씨도 참. 어두운 데서 잡지 마시고 하인들이 등을 가져올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 주세요.”
“아냐, 괜찮아. 등불은 됐어.”
“이렇게 어두운데요? 오늘은 달빛도 강하지 않은데.”
달이 크면 좋으련만, 밤하늘에는 반으로 갈라진 하현달만이 구름 사이로 삐죽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화는 먼저 흑각궁을 집어 들어 시위를 걸었다.
일자로 뻗었던 활이 힘겹게 휘어지며 고정됐다.
시위를 한 번 튕기자 마치 악기의 현을 뜯은 것처럼 좋은 소리가 났다.
최장명이 좋은 활을 구하기 위해 대단히 신경 썼을 것이 분명했다.
“아이고, 진짜 쏘시려나 보네. 우리 아가씨 손 다 터지시겠네. 아가씨, 그럼 깍지부터 좀 끼셔요. 제가 금방 가서 가져올게요.”
“좋지! 대신 빨리 가져와야 해?”
“그럼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화색을 띤 영선이 부리나케 세화의 별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간신히 방해자를 떨쳐 낸 세화가 영선을 기다리지 않고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허리를 더 세워야지.”
낮고 침착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크고 따뜻한 손이 허리를 앞으로 밀고 제 턱을 당겨 자세를 바로잡아 주는 듯했다.
“턱은 더 당기고. 그렇지.”
* * *
그러니까 그건 아마 백가의 사냥 대회 날짜가 공고된 다음 날이었을 것이다.
바람을 다루는 백가 호족의 가전 무기는 활이었다.
태어나서부터 자연스레 활을 다룰 수 있는 그들에게, 정련된 활 솜씨를 겨루는 사냥 대회는 아주 중요한 행사였다.
더욱 정교하고 신묘한 기술들을 보여 주겠다며, 영지 전체가 얼마나 떠들썩해지던지.
백가에서 수학하던 육가 연합의 자제들 역시 저마다 가전 무기가 따로 있음에도 분위기에 휩쓸려 활을 연습할 정도였다.
그중엔 세화도 있었다.
‘또 억지로 끌려 나갈 게 분명하니까.’
주가의 가전 무기는 검이었으나 그녀는 검을 제대로 잡아본 적도 없었다.
고민하던 그녀는 깊이 생각한 끝에 검을 버리고 활을 잡았다.
활이야 조금 못 쏘아도 자기 가문의 가전 무기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우겨 볼 수 있었으나, 검을 못 다룬다면 그거야말로 변명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적어도 화살이 과녁 근처에 스칠 정도는 되어야 했다.
연무장도 사용할 수 없었던 그녀는 간신히 구한 낡고 비루한 활을 들고, 후원의 나무를 과녁 삼아 손끝이 터지도록 시위를 당겼다.
피로 범벅된 손가락이 따갑고 미끄러웠으나 연습을 멈출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백기하의 개입 이후 그녀를 향한 노골적인 공격은 사라졌지만, 이 커다란 백가에는 여전히 어떤 식으로든 그녀에게 모욕을 주고 싶어 안달 난 이들만 모여 있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고 이미 각오했던 바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든, 백가를 위시한 육가 연합의 자제들은 마치 실종된 아이들을 그녀가 잡아먹기라도 한 듯 모멸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신영이 나서셨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실종 사건이 해결되고 자신도 금방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녀는 벌써 사 년째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그녀의 귀환이 앞으로 얼마나 더 미뤄질지 모른다는 거였다.
‘그나마 어렸을 때 대충이라도 활을 배워 다행이지. 시위를 거는 방법도 모를 뻔했어.’
생각만으로도 막막해지는 가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고 그보다 썩 나은 상태인 것은 아니었다.
기억나는 것은 기초 중의 기초뿐으로 쏘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화살은 과녁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그녀는 여러모로 방법을 바꿔 가며 화살을 쏘아 보았으나 며칠 동안 노력해도 결과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연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니야. 정신 차려. 안 하는 것보단 낫지.’
독하게 마음을 먹은 그녀가 이를 악문 채 다시 한번 활을 들어 올렸다.
‘가르쳐 주는 이가 없어도 상관없어. 두고 보라지. 어떻게든 익혀서, 이곳을 나가기 전엔 반드시 그 거만한 얼굴들에다 화살을 박아 버릴 테니까.’
어디에 있어도 자신은 주씨였다.
소가주 주경현의 혼약자이자, 주가 원로 주명윤의 딸.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비굴해지지 않을 테다.’
그녀가 홀로 그렇게 아등바등하고 있을 때였다.
“그게 아니야.”
누군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자세를 가볍게 바로잡아 주었다.
그녀가 속으로 수없이 욕을 퍼부었던 백가 가주, 백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