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형제가 멀뚱히 서로를 응시했다.
“형도 들었어? 백가 가주라니. 그 백기하?”
“백가 가주라면 하나밖에 없긴 한데……. 그가 왜 아버지와?”
초소병들의 말에 따르면 호위나 시종도 없이 단 둘뿐이었다고 하는데, 그 상황 자체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백가의 가주가 왜 일행도 없이 주가의 영지에 넘어와 있는 것이며.
그들의 아버지는 왜 다른 병사들을 대동하지 않은 채 백기하와 단둘이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일까.
단윤 아저씨는 또 어디 가고?
의문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기에, 그들은 결국 해답을 찾기 위해 또다시 말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편자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속도를 내던 그들은 한참 만에 평원 너머 저 멀리서 높낮이가 다른 두 그림자를 발견했다.
한 그림자는 빠르게 말을 타 달려가고 싶어 하는 듯했고, 한 그림자는 말도 타지 않은 채 마치 이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고 싶은 것처럼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
그들의 아버지와 백가 가주였다.
“아버지!”
“가윤아, 가한아! 아니, 너희가 여긴 웬일이냐.”
말발굽 소리를 듣고 멈춰 섰던 주명윤이 깜짝 놀라며 아들들의 이름을 불렀다.
“전선을 지켜야 하는 너희가 왜 여기까지 왔어. 혹시 영지 경계선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것이냐? 그래서 신영께 보고드리러 가는 중이기라도 한 거야?”
그들의 코앞까지 달려가 멈춘 주가윤이 말에서 내리며 소리 높여 대답했다.
“무슨 일이 생기긴 했지요!”
“맞습니다. 세화의 백가행 얘기를 듣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저희는 둘 다 신영의 앞에서 목을 내놓고 그 명만은 재고해 주십사 청을 올리러 가는 길입니다!”
“뭐라고?”
“어찌 연약한 동생에게까지 그런 의무를 짊어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목숨을 내놓더라도 어떻게든 세화만은……!”
비장한 얼굴의 아들들을 보며 주명윤의 울화통이 한 번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이…….”
이 답답한 것들!
“너희가 청을 올려 될 일이었으면 내가 이미 해결했을 것이다! 그런 중대한 일을 너희끼리 결정하고 전선을 멋대로 이탈했단 말이냐!”
“아닙니다. 자윤 원로님께 일주일의 말미를 얻었습니다.”
“자윤 원로까지 이 일을-.”
“헌데 아버지.”
첫째 주가한이 적절하게 말을 자르며 그 옆에서 부자의 말을 흥미롭게 듣고 있는 이를 가리켰다.
그제야 제가 지나쳤다 여긴 주명윤이 부끄러운 얼굴로 백기하에게 두 사내를 소개했다.
“추태를 보였습니다. 백가주, 제 아들 녀석들입니다.”
“네, 이미 알고 있습니다.”
“가윤아, 가한아. 너희들도 인사를 드리거라.”
“아버지. 그 전에 왜 저자가 여기 와 있는지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이미 합의한 배상금만으로는 모자란답니까? 하여 무언가를 더 내놓으라고 온 겁니까?”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더 뽑아 갈 수 있는 것들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아 여기까지 온 것이랍니까?”
“너희들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한 가문의 가주께 어찌 그따위로 말들을 해!”
“가주도 가주 나름이지요. 아버지는 저자에 대해 나름 괜찮게 평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전장이라도 그렇지, 말에서 떨어진 자에게 거리낌 없이 발길질을 하질 않나. 일대일로 검을 겨루는 자리에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영력을 꽂아 넣질 않나.”
“그렇습니다. 저희와 마주쳤을 때 형님의 머리를 걷어차고 제 검을 빼앗아 강으로 던져 버리기까지 한걸요. 우리는 포로에게조차 예를 갖춰 대접했는데, 어찌 한 가문의 가주이자 장수라는 저자는 상대에게 그런 모욕적인 짓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들들이 일제히 성토하자 주명윤의 눈도 동그래졌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냐?”
그때였다.
세 사람의 대화를 부드럽게 지켜보고 있다가, 당황했다가. 그들의 공방이 길어질수록 점차 사색이 되어 가던 백기하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털썩!
“??”
“?!”
“…….”
마지막 반응이 주명윤이었다.
짧은 사이에 벌써 이 사내의 기행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아지고 있는 주명윤이 그를 흰 눈으로 쳐다봤다.
이번엔 저 유려한 입술 사이로 무슨 헛소리를 또 꺼내 놓으려나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기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점입가경’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했다.
“형님들.”
“???”
“??!”
“…….”
제 아들들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것을 보며 주명윤이 몸을 돌렸다.
저자가 얼굴은 저리 젊어 보여도 아들들과의 나이 차보다는 나와의 나이 차가 더 적을진대.
‘대체 저게 무슨 경망스러운 호칭이란 말인가. 우리는, 나는, 저런 자에게 패한 거란 말인가.’
커다란 자괴감이 몰아치며, 저 상황이 뭔지는 몰라도 일단 끼고 싶지가 않았다.
그때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주가한이 얼른 백기하를 부축하며 일으켰다.
……키려 했다.
하지만 마치 땅에 붙기라도 한 듯 백기하의 무릎은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당황한 주가한이 힘을 줘 그를 당겼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육가의 수장이라는 이가 어찌 부모도 아닌 이 앞에서 무릎을 꿇는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당신은 자존심도 없습니까? 얼른 일어나십시오! 무장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는 걸 모르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한 가문의 가주로서, 육가의 바람을 짊어진 자로서, 저야말로 제 무릎을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제가 그간 행해 온 잘못들을 저 자신도 알고 있는바. 어찌 이 두 무릎을 아끼겠습니까.”
백기하가 침통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분명 나이는 두 분보다 조. 금. 아주 조. 금. 많을지도 모르나 이미 전장에서 두 장수분을 뵈었을 때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저보다 아주 조. 금. 어리심에도 불구하고 인품과 실력, 기백, 그 외의 모든 면에서 두 분이 저보다 월등히 우월하심을 알아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네?”
“예??”
“그 두려움이 제게 그런 짓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간의 제 행동에 대해서는 백번 죽어 사죄해도 모자라겠지만 언젠가 두 분을 만나게 된다면 전장이어서 그랬다고. 결코 본심이 아니었다고. 육가 연합의 맹주로 나선 제가 패해선 안 되었기에. 제게도 지켜야 할 이들이 있기에 그런 예의 없는 짓마저 하게 되었다고.”
“…….”
“…….”
“두 분의 용맹에 짓눌려 그런 짓을 하게 되었다고. 그리 변명이라도 해 보고 싶었었습니다.”
“……허, 음.”
“……크흠.”
“그간 두 분을 향한 제 행동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 어떤 질책을 하셔도 좋습니다. 허나 이것만은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백기하가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말을 덧붙이며 두 형제를 올려다보았다.
“이 모든 말들이 얼마나 진심인지를. 두 분을 뵙자마자 머지않은 미래에 곧 환계에서 손꼽히게 대단한 무장들이 되시겠구나,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었음을. 나이 따위는 제가 두 분을 형님으로 모시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생각했었음을요.”
백기하의 말이 청산유수처럼 이어졌으나, 이미 저것과 유사한 말을 들어 본 적 있는 주명윤의 시선은 갈수록 짜게 식었다.
한 번도 누구에게서도 이런 극찬을 받아 본 적 없는 두 아들들만이 백기하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에 놀라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며 얼굴을 붉혔다.
제 아들들의 그런 모습이 한심스러웠으나 사실 의심하기가 쉽지 않긴 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 자체가 상대를 지극히 높이는 행위였던 것이다.
거기다 상대는 육가 연합의 맹주이자 환계 유일의 신수인 백기하가 아닌가.
그와 자신들의 실력 차를 생각한다면 무슨 꿍꿍이가 있다 해도 무릎까지 꿇을 정도는 결코 아닐 것이다.
그러니 저 말에도 신빙성이 생길 수밖에.
아들들을 탓할 수조차 없다.
“저희를 그, 그리 평가하고 계셨습니까?”
“가한아, 그냥 좋은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이다. 빨리 겸양하여 인사드리고 뒤로 물러나거라.”
“신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황송합니다.”
“가윤아, 인사치레로 해 주시는 말씀이니 어서 겸양하여 인사드리고 뒤로 물러나래도.”
“인사치레라뇨.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님. 저는 정말로 이 두 장수분께 감명받아-.”
“저를 정말 아. 버. 님.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일단 좀 일어나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여기까지 오는 길에 이미 아버님이란 호칭을 300번쯤 들었던 주명윤이 포기한 듯 중얼거렸다.
흙이 묻은 무릎이 바로 땅에서 떨어졌다.
그가 일어서자 마치 호위라도 된 양 두 아들들이 백기하의 무릎을 한쪽씩 맡아 털어 주었다.
이 신수가 그들을 그리 대단하게 여겨 주는 것에 큰 감명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괜찮습니다. 두 분께선 이러지 마십시오.”
그런 아들들을 말리려는 듯 백기하의 허리가 굽었다.
그러자 마치 인사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아들들의 허리는 더욱 굽어졌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전시라는 걸 알면서도, 서로에게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켜야 할 이들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억지를 부렸습니다.”
“그리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두 분께 너무하였습니다.”
침통한 얼굴로 사과를 반복하며 백가주의 허리가 다시 굽었다.
그러자 두 젊은 장수의 허리도 다시…….
그러자 백가주의 허리도 다시…….
아들들의 허리도 다시…….
‘아무리 신영의 명이라 해도 백가주의 마중엔 다른 이를 보냈어야 했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주명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