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명윤이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도 처음엔 좋게 좋게 말을 했다.
“그 호칭은 거두시지요. 육가 연합의 맹주께 그런 존칭을 들을 만한 이가 아닙니다, 저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인품, 실력,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으신, 환계에서 손꼽히는 대단한 무장께서요.”
“그리 평가해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제가 듣기 불편하니 그만둬 주십시오. 그냥 전장에서 하시던 대로 주명윤이라고 부르십시오.”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때는 전장이라,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이 백 모가 입방정을 떨었습니다.”
“…….”
“원로 어르신께서도 전장에 익숙하실 테니 무슨 말인지 아실 거라 믿습니다. 제가 본디 그런 이가 아닙니다. 품행 방정하고. 사고에 모남 없고, 약자를 배려하고 연장자에 깍듯하며 혼…….”
“?”
“마음이 넓으니, 혼, 혼인하면 부인에게도 잘할 것입니다.”
“…….”
“정말입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제 앞에서 저런 말을 하는지.
하지만 이후로도 백기하의 자기 자랑은 계속되었다.
하여 주명윤은 ‘자기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찌 저런 말을 제 입으로 뱉을 수 있지?’ 하며 끊임없이 놀라는 중이었다.
문이 있는 초소에서부터 주가 권역 내의 저택까지는 말로 힘껏 달리면 고작 이틀밖에 걸리지 않는다.
고작 이틀.
그러나 그 짧은 거리가 지금은 왜 이리 영원처럼 느껴지는 건지.
‘단윤아, 대체 너 언제 오려느냐. 빨리 와라, 제발. 빨리 와.’
주명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
고통스러운 여정은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 * *
딱딱한 얼굴의 세화는 또다시 바쁘게 걸었다.
그녀가 가고자 하는 곳은 어느 거리에 있는 한 글방이었다.
가마를 먼저 저택으로 보낸 그녀가 영선과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석양이 지고 있었다.
글방은 낡고 기울어져 가고 있었으나 사람들이 제법 북적였다. 그들은 모두 보물이라도 얻은 양 무언가를 가슴에 품고 서둘러 글방을 빠져나오곤 했다.
사람들을 밀치며 내부로 들어선 세화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가장 안쪽, 비밀스러운 작업실까지 한 번에 찾아 들어갔다.
“무슨 짓입니까?! 거긴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주인인 듯한 자가 당황한 듯 외치며 쫓아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작업실 안에서 뭔가를 작업하고 있던 사내는 제 앞에 나타난 침입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얼떨떨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사내가 황당함을 담아 물었다.
“네가 웬일이야, 갑자기?”
여전히 사내 복장을 하고 있는 정흥생이었다.
“어? 아시는 사이입니까?”
“응. 주인장은 가 보쇼. 이야기 좀 잠깐 하겠으니.”
“허참, 그러면 그렇다고 진작 얘기를 해 줄 것이지.”
“앉아.”
정흥생이 재빨리 구석에서 방석 두 개를 챙겨 내밀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흥생이 여인의 복장을 한 세화를 신기한 눈으로 훑었다.
어느 순간 흥생도 무슨 일에도 잘 동요하지 않는 제 동무가 여인임을 알아채긴 했었다.
하지만 늘 사내 차림을 한 세화만 보다가 이리 완벽하게 차려입은 그녀를 보니 못내 다른 사람같이 느껴졌다.
그런 흥생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세화가 입을 열었다.
“네가 전부터 궁금해하던 거, 대답해 주려고 왔다.”
“뭐?”
세화가 잠시 과거의 제 모습을 돌이켜보았다.
주씨들의 아집과 특권 의식 가득한 사고방식을 싫어했으면서 그 성품 그대로를 답습하던 제 모습을.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 보려 했으면서도 멸시하듯 인간 중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 것이다.
정흥생은 딱딱하게 마음을 열지 않던 세화에게 끝까지 다가오던 사람이었건만.
패전의 기미가 역력해지며 인간계의 생활을 접고 환계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매몰차게 연락을 끊고 돌연 잠적해 버리는 식으로 헤어졌었다.
지금도 이 사람이 제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았다면 찾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뭐야.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나서는. 뒤에 선 사람은 누구고?”
“내 자매야.”
“자매? 너 오라버니만 둘이라고 하지 않았어?”
“이쪽은 정흥생. 사람이야. 인사해.”
“안녕하세요. 세화 아가씨를 모시는 사영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뭐냐. 이 상황.”
얼떨떨하게 인사를 받는 흥생을 보며 세화가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갑자기 나타나서 뜬금없겠지만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그건 상관없는데 ‘사람이야’는 또 뭐니? 누가 들으면 너흰 사람 아닌 줄 알겠다 야.”
“…….”
“……뭐야, 왜?”
항상 직설적으로 말을 꺼내 놓던 세화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으로 머뭇거리자 정흥생이 제 앞에 놓인 종이와 붓을 옆으로 밀어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 일단 부탁이라는 것부터 얘기해 봐.”
“우물을 몇 개 팔 거라 치수사와 인부들이 필요해. 이목이 쏠리면 안 되니 비밀리에 진행해야 하고. 약초와 쌀도 되도록 많이 구하고 싶어. 이것도 물론 다른 이들은 결코 몰랐으면 해. 돈은 내가-.”
“돈은 됐고. 언제까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하나만 물어볼게. 위험한 일이야?”
“위험? 아, 혹시 부담이 된다면-.”
“아니, 나 말고. 너한테 말이야.”
“…….”
“너 학당에도 나오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었잖아. 집으로 찾아가도 만날 수 없었고. 지금 혹시 위험한 일에 말려든 거 아니냐고.”
“…….”
“사람들 모르게 쓸 돈은 있어?”
“있어.”
“일단 이거라도 가져가.”
정흥생은 밀실 구석에 놓인 목함을 뒤적이더니 무게가 상당한 전낭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괜찮아.”
“그래도 가져가. 뭔지는 몰라도 무슨 일을 벌이든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테니.”
그 말에 가만히 전낭을 받아든 세화가 조금 침묵하다 물었다.
“왜 필요하냐고는 안 물어봐? 나 오늘은 네가 전부터 묻던 것들에 다 대답해 주기로 마음먹고 왔어.”
“됐어. 너도 나 모르잖아.”
“뭐?”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세화를 보며 정흥생이 피식 웃었다.
“너도 다른 놈들이 다 날 보고 수군거리면서 피해 다닐 때, 나한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잖아.”
“그건.”
“대놓고 날 더럽다고 하질 않나, 역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피하니 한 번쯤은 궁금하기도 했을 텐데 아무것도 안 물어봤어.”
그들이 다닌 학당은 권세 있는 가문의 자제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들끼리는 이미 서로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도 대충 알고 있었다.
그런 이들 사이에서 흥생만이 출신이 불분명했고 흥생 본인도 그에 대해 밝히지 않았기에 주위 사람들 사이에서 갖가지 추측이 돈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짜 족보를 만들어서 양반을 사칭해 들어온 천것이 분명하니 고발해 국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말부터 어미가 노비인 서자일지도 모르니, 똑같이 천해지고 싶지 않으면 말도 섞지 말아야 한다는 따돌림까지.
“그저 내게 관심이 없을 뿐이었다고 해도 난 그런 네 무심함이 좋더라. 그리고 나도 아직 내 얘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너한테 말 안 했잖아. 그러니 너도 네 얘기는 네가 하고 싶을 때나 해.”
“…….”
“구해지면 연락은 어떻게 해? 집으로 찾아가도 되나?”
“아니. 내가 다시 여기로 찾아올게.”
머뭇거리던 주세화는 “그럼.” 하고 짤막한 인사와 함께 일어났다.
“오늘은 준비할 게 많아서 이만 갈게.”
“그래라.”
“…….”
“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하고 가. 필요한 거 더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나 너한테 완전히 관심 없지는 않았어.”
“뭐?”
“그러니 여기 알고 있었잖아. 누구한테 묻지도 않고 헤매지도 않고 바로 여기로 찾아왔어. 너 여기서 춘화 그려 판다는 거 기억하고 있었거든.”
잠시 망설이던 주세화가 덧붙였다.
“그리고 진짜 이름도 기억해. 정치화.”
“…….”
“갈게. 고마워.”
주세화가 전낭을 가지고 돌아서자 그녀의 뒤에 시립해 있던 영선도 정흥생에게 꾸벅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러네. ……내 이름을 기억하네.”
좁은 통로를 빠져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정흥생이 그제야 멍청히 중얼거렸다.
“게다가 나 여기 있는 것까지 알고.”
이 글방에 대해 얘기했던 건 아주 오래전, 그들이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과묵한 저 아이와 조금 더 빨리 친해지고 싶어서 좋아하는 장소, 좋아하는 색, 즐겨 하는 일 등 아무 말이나 꺼내 놓았었다.
남장을 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지었던 가명 말고 제 본명까지도.
‘그때 내가 옆에서 뭐라 하든 그저 먼 풍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지.’
그 모습이 기억 속에서 선명히 떠올랐다.
‘그랬으면서. 안 듣는 것 같더니 다 듣고 있었구나.’
그것을 떠올리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벗어 두었던 갓을 집어 쓴 흥생이 세화가 부탁한 것을 들어주기 위해 글방을 나섰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흥생의 안색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밝아져 있었다.
* * *
짜악!
짝!
마편 소리가 드넓은 평원 위를 찰지게 울렸다.
그때마다 거센 진동 소리를 내며 달리던 말들은 더욱더 속력을 높였다.
휴식 한 번 취하지 않고 미친 듯이 말을 재촉하고 있는 그림자는 세화의 두 오라비들이었다.
뿌연 먼지구름이 그들의 행적을 따라 길게 늘어졌다.
전선을 벗어난 두 젊은 무장은 가족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딱 일주일간의 말미를 얻어낸 참이었다.
주가의 영지가 줄어든 탓에 아직도 영지 경계선을 두고 분쟁이 잦았다. 그 탓에 일주일이라는 기간은 반드시 지켜야 했다.
오고 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하여 그 시간을 조금이나마 늘리기 위해 그들은 식사는커녕 잠조차 자지 않은 채 초소마다 말을 갈며 내달렸다.
얼마나 고되고 바쁜 일정이었는지 숨 돌릴 겨를도 없을 지경이었다.
한데 그 와중에 희한한 말을 듣게 되었다.
“……방금 누구라고?”
“다시 한번 말해주게. 우리 아버지께서 누구와 함께 계셨다고?”
그들의 아버지가 백가 가주와 함께 바로 얼마 전 이 초소를 지나쳤다는 소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