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리는 목소리가 사연주의 입술 사이에서 애처롭게 흘러나왔다.
“언니. 대체 무슨 이유로 절 이렇게 매도하고 모함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제가 언니에게 뭘 그렇게 잘못한 거죠? 언니를 걱정하느라 다른 이들에게 언니에 대한 말을 조금 한 것이 그렇게 화가 나시는 건가요?”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의 모습은 가련하기 이를 데 없었다.
허나 문제는 그런 사연주를 신경 쓰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세화가 소매 속에서 은침이 든 통을 꺼내 든 것이다.
깜짝 놀란 이들이 자기들끼리 소곤거렸다.
“세상에 저게 뭐람. 뭘 탔네, 어쨌네 주장하더니 은침까지 미리 준비해 온 거야?”
“뭐야. 준비성을 보니 이런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본데?”
새하얀 침이 등장한 순간부터 연회장의 모든 시선은 그 은침을 따라 움직였다.
세화의 손끝에 호기심 넘치는 눈을 고정한 채 앞으로 벌어질 일을 마른침을 삼키며 지켜보았다.
제게 집중된 시선 속에서도 세화의 손놀림은 거침없었다.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느리지도 않게.
긴 은침이 접시 위의 음식들을 찔렀다가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연회장의 모든 이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준비한 은침의 수가 적지 않았음에도 상 위의 요리들에 닿는 족족 검게 물들어 검사 결과에 의문이 들 정도였던 것이다.
사연주의 옆에 앉았던 이들이 경악하며 한꺼번에 빠르게 옆으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손을 벌벌 떨며 지켜보고 있던 사연주가 비참하게 소리쳤다.
“내, 내가 아니에요! 내가 아니라고요! 모함이에요! 내가 저런 짓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모두 저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믿는 거예요?”
“…….”
“다들 날 오래 봐 왔잖아요. 그럼 알 것 아녜요, 내가 결코 저런 일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아니, 그보다 내가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언니에게 저런 짓을 하죠?”
“…….”
“그래요. 아무도 날 믿지 못하겠다 해도 좋아요. 하지만 내게도 결백을 증명할 기회를 주세요. 부탁이에요.”
호소하는 목소리가 절절했으나 그것을 깔끔하게 잘라 내는 목소리 역시 선명했다.
“그 기회는 네가 이미 날렸지. 그러게 먹어 보랄 때 먹었으면 좋았잖니.”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찬 세화가 덧붙였다.
“그렇다고 네가 그렇게 슬퍼하는데 그 억울함을 무시할 수가 없구나. 한 번 더 기회를 줄 테니 그럼 옆방으로 가서 옷을 좀 벗어 볼래?”
“……뭐, 라고요?”
“네가 믿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모두 참관인으로 데리고 가도 된단다. 가서 네 옷을 조사해 보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면 이번에도 내가 사과하기로 하마. 아, 이번엔 이 많은 분들 앞에서 무릎도 꿇을게.”
“…….”
“그러니 어서 다녀오렴. 억측이 난무하는 상황이라 기분이 조금 안 좋을 수야 있겠지만 이런 억울함 따위 네 의복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곧 풀리게 되는걸. 정말로 뭔가가 나온다면 그땐 많은 것을 감당해야 할 테지만 말이야.”
“…….”
“왜 안 가지?”
“…….”
“참 이상하네. 못 가겠니?”
세화의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사연주는 그대로 굳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공방을 가만히 바라보던 주수연이 눈을 빛내며 주세화 옆으로 살짝 더 붙어 앉았다.
이 아가씨의 목표가 자신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건 연회장에 있는 다른 주씨들도 마찬가지였다.
세화를 바라보는 그네들의 표정이 아까보다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주수연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일단 제 잘못입니다. 제가 연 연회에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직접 독을 타신 것도 아니실 텐데요.”
“그 무슨 큰일 날 말씀을요. 제게도 큰 화가 될 뻔한 일이었으니 이번 일은 결코 가볍게 처리하지 않겠습니다. 게다가 자리 배치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아가씨를 무시하려는 건 결코 아니었습니다.”
“압니다. 그저 사촌 동생 옆이 익숙하고 편할 거라 생각해 날 배려해 준 것이 아닙니까.”
화색을 띤 주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맞아요. 그런 거지요!”
“하지만 나에 대한 소문도 소문이고.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이젠 어찌한다.”
세화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머리를 짚었다.
“아까 들은 소문이 계속해서 나돌 것을 생각하니, 부모님의 위신에 누를 끼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가 않군요. 제가 극진히 보살핀 사촌 동생이 저를 향해 이런 경악할 짓을 벌였다는 것도 그렇고요.”
주수연이 조금 더 바짝 붙어 앉으며 세화를 위로했다.
“아가씨, 마음 쓰지 마십시오. 우린 다 혈족인데 혈족 사이에서 작은 소문 몇 개가 무슨 큰 흠이 되겠습니까. 오늘 일들 역시 우리는 모두 입을 꾹 다물 것입니다.”
천천히 눈을 뜬 세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믿을 것은 혈족뿐이지요.”
만약 우리 주씨끼리였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우리끼린 똘똘 뭉쳐야지요. 서로를 아끼고 무슨 비밀이 있어도 지켜 주어야지요. 그게 혈족이니까요.”
그러다 지금 생각난 듯 주수연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건 주씨들만 있는 연회인가요?”
주수연은 이번엔 완벽히 이해했다.
아니, 주수연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모두가 다.
사연주까지도.
이건 주씨끼리 뭉치는 한 무슨 비밀이든 지켜 주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그녀들의 손에 들어간 서신의 행방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다는 말이었다.
“언, 언니.”
사연주가 더듬거리며 주세화를 부르자 연회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번 사연주에게로 향했다.
“잠, 잠깐……. 지금 무슨 일을 하려고.”
이제부터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예감한 사연주가 손을 내저으며 물러섰다.
아니나 다를까.
“당장 끌어내. 앞으로 어떤 연회에서도 저 얼굴을 보지 않을 테니 주변에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연회장 주변에 시립해 있던 시종이 주수연의 신호를 받고 사연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겁먹은 그녀가 주위를 돌아보며 외쳤다.
“왜, 이래요. 아니에요! 아니라잖아요! 우리 지금껏 다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 내 언니의 모함만 믿고 내겐 결백을 증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거예요?”
누군가 대답했다.
“하지만 넌 주씨가 아니잖아?”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은 사연주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 * *
연회장을 나올 땐 제법 많은 이가 그녀를 배웅하러 나왔다.
“또 오세요.”
“맞아요. 제가 곧 열 연회에서도 뵈어요.”
“저도요. 저도 연회를 열 것이니 그때 또 뵈었으면 좋겠네요.”
세화는 그들의 인사에 대답 없이 웃음만 지어 보이다가 몸을 돌렸다.
영선이 목소리를 낮춘 채 물었다.
“앞에선 저렇게 간이라도 빼 줄 듯 굴지만 속은 모르는 거니까요. 괜히 경계심만 갖게 한 건 아닐까요? 각각 서신을 돌리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해서요.”
“아니. 대대적으로 해야 해. 비밀리에 하면 약점을 잡혔다고 생각하지만, 공개적으로 일을 벌이면 모두가 한편이 되었다고 생각하거든.”
“사촌 아가씨가 저러고 쫓겨났으니 이번엔 뭘 할지 모르겠네요. 차라리 그냥 바로 처리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연주를 죽일 생각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던 영선이 아니던가.
그런 영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듣고 세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하하 웃었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이런 맹목적인 신뢰라니.
이런 마음을 보내주는 상대가 그동안 너무 그리웠었다.
“당분간은 그럴 정신도 없을걸. 저 애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주씨들 사이에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이거든. 그러니 일단 철저히 고립시켜야지. 두 번 다시 뻐꾸기 행세를 하지 못하도록.”
비릿한 미소가 붉은 입술 끝에 맴돌았다.
“받아 줄 데가 없다고 생각하면 방계 원로들을 찾아가겠지. 그럼 거기서도 음험한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을 솎아 낼 수 있을 거야.”
“저이들을 믿을 수 있을까요?”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어. 이용할 수 있을 만한 이를 찾아내야 해.”
오늘 세화가 연회에 참석한 이유는 저 서신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선악이 중요한가? 혈족들의 선악이 왜 중요해야 하지?”
과거에 낮고 침착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그렇게 물었었다.
저것이 한 일족을 이끄는 가주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세화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화살 하나를 손가락 사이에서 빙빙 돌리는 백기하의 얼굴은 퍽 진심처럼 보였다.
“그런 말을 하실 거라면 규율은 왜 만들어 놓으십니까?”
선도 악도 다 친구인 양,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무법으로 살지.
실종 사건의 조사 같은 것도 하지 말고, 그래서 날 여기까지 부르지도 말지.
그 부루퉁한 모습이 우스웠는지 백기하가 그녀를 돌아보다가 조금 웃었다.
“모든 이들은 다 제 욕망을 채워 주면 착해지거든.”
이 사내는 때때로 이런 영문 모를 곳에서 웃곤 했다.
그때마다 바보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아 제법 화가 났었다.
“소가주와 혼약하고 이곳에 왔다고 했으니 그대도 돌아가면 가모가 될 것 아닌가. 그러니 들어 둬. 필요한 것은 늘 내 수족이 될 수 있는 자이지 선한 자가 아니야.”
그 말이 맞았다.
요 며칠간 그녀 역시도 되돌아온 시간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그것은 사연주와 최덕문 같이 양분된 사례 때문이었다.
이곳이 명계라면 모두가 그녀의 원수가 맞으니 복수를 하는 데에 한 점 거리낌이 없겠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거라면 아직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이들이 있어.’
사연주는 명확한 원망과 열등감이 동기였기에 이미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하지만 최덕문 같은 사례는 원한은 그저 결과일 뿐, 일을 벌이게 된 동기가 따로 있었다.
그 부분을 충족시켜 준다면 제 수족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거기다 권속 계약으로 목줄을 단단히 매어 놓기까지 했으니.
아무리 전생에서의 그이가 밉다 한들 이번 생에서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처럼,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들에 대해 복수의 한계를 정하는 것과 누가 제 손을 잡을 것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했다.
“이대로 돌아가실 건가요?”
“아니. 아직 한 군데 더 갈 데가 있어. 서곽으로 갈 거야.”
“네. 앞서겠습니다.”
‘그나저나 나 또 그 남자를 생각하고 있네.’
그러고 보면 그는 제게 아주 많은 것들을 해 주었다.
검과 활을 가르쳐 준 것도 그였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무너지려 할 때 정신을 다잡아 준 것도 그였다.
‘아버지는 이미 그를 만나셨겠지?’
제 아버지는 전장에서 그를 아주 좋게 보았던 듯했다.
아버지도 단윤 아저씨와 둘만 환계로 넘어가셨고 백기하도 여기까지 홀로 왔다고 했었으니 주가로 가는 길은 일행이 딱 셋인 걸까?
만약 그렇다면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을까?
뭐가 되었든 다들 대단한 무장들이시니 필시 그만큼 대단한 말들을 나누고 계시겠지.
* * *
세화의 예상과는 달리 그 시각, 둘 사이를 오가는 대단한 말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한 번씩 대화가 오갈 때마다 분위기만 험악해져 갈 뿐.
사실 주명윤이 일방적으로 화를 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주명윤은 이때까지 백기하를 많이 배려했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되도록 예를 갖추려 했건만.
“어르신.”
“…….”
이자는 그런 방법으로 대할 수 있는 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님.”
“…….”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