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때 세화가 있는 연회장의 분위기는 단번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를 악문 누군가가, 세화가 돌린 서신을 손안에서 쥐어 구겼다.
제 소매 속에 얼른 집어넣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는 이도 있었다.
“보아하니 다들 비슷한 서신을 받은 것 같군요.”
서늘하게 바뀐 시선으로 주세화를 주시하는 이 중 하나가 주수연이었다.
“그간 어떤 연회에도 참석하지 않으시던 분이 갑자기 오시겠다 기별하시길래 이상하다 했더니.”
주수연도 들고 있던 서신을 착착 접어 제 소매 속에 밀어 넣었다.
“아가씨 대신 백가행에 밀어 넣을 이를 물색하기 위해 오신 겁니까? 이런 서신으로 겁박하여?”
그 말을 듣고 세화가 웃음을 터뜨리자 주수연의 눈매가 더 표독스러워졌다.
“뭐가 우습습니까. 당신 대신 포로로 끌려갈 이를 찾게 돼 기쁘기라도 합니까?”
“그걸 겁박으로 받아들이고 따지기부터 하니, 우습지 않습니까. 이렇게 멍청하리라고는 생각 안 했거든.”
“뭐라고요?”
“그래, 겁박이라 치지요. 그럼 어찌할 겁니까. 부모님께 달려가 서신의 내용을 보여 드리고 이런 협박을 받았습니다, 고하기라도 할 겁니까?”
“…….”
“그러지도 못할 분들이 입만 살아서는. 내용을 보았으면 이런 비밀들을 어떻게 알았냐 제 다리밑에 매달려 묻기라도 해야지요. 곁에 붙어 속살거리며 폭로하지 말아 달라, 달래지는 못할망정 내게 겁박이냐 따지면 서신의 내용이 바뀌기라도 합니까.”
“……그럼 뭘 원하시는 겁니까. 원하시는 게 있으니 이런 걸 들고 오셨겠지요. 제가 어리석어 아가씨의 의중을 짐작하지 못하겠으니 그냥 쉽게 가르쳐 주시지요.”
“같은 혈족끼리 겁박이니 의중이니 할 게 뭐가 있나요. 피가 얼마나 중요한데. 내가 같은 주씨 성을 달고 있는 혈족분들을 어떻게 하기라도 할 것 같아 그럽니까?”
주수연이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 이런 건 왜 보여 주신 겁니까?”
“그건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이고. 나야말로 궁금한 게 있으니 먼저 묻겠습니다. 대체 당신들이 아는 나는 어떤 자이길래 내 자리를 감히 저딴 곳으로 정해 두었는지 말입니다.”
세화가 시선으로 사연주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침묵이 흐르며 분위기가 점점 더 무거워지자 연회장에 있는 이들이 서로를 곁눈질하다 한마디씩 꺼내 들었다.
몸이 약하신 줄 알고.
타고난 영력이 없으셔서 앞으로를 장담할 수 없으시다길래.
그것을 감추고자 자주 인간계로 내려가셨고.
탈피는 영영 불가능하실 거라기에.
“아하. 그런 말들이 돌았던 겁니까.”
피식 웃음을 흘린 세화가 대수롭지 않게 영력을 끌어올렸다.
“!!”
“허!”
본래 가지고 있던 영력에 백가 신수의 영력이 합쳐진 힘이 그녀의 몸 위로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살아 있는 것처럼 너울대는 그 불은 멀리서도 열기와 기세가 느껴질 만큼 강렬했다.
하나 이 정도 힘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힘의 주인은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이들이 일제히 침음했다.
저 원로 여식이 아직 탈피도 하지 않았다는 걸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탈피도 하지 않은 영력이 저 정도라고?’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가당치 않은 말들에 굳이 심력을 쏟고 싶지 않아 그간 내버려 두고 있었으나 더는 놔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여 본의 아니게 잘난 척을 하게 되었네요.”
세화의 시선이 주수연을 향하자 그녀가 움찔 몸을 떨었다.
“일단 출처를 묻지 않을 수가 없군요. 누굽니까.”
“……네, 네?”
“당신들에게 그런 말을 퍼뜨린 이가 누구냔 말입니다.”
“그건…….”
머뭇거리던 그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한곳으로 모였다.
모두의 눈이 제게로 향하자, 창백한 얼굴로 서서 연회장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연주의 표정에 당황이 들어찼다.
그러나 곧 가련한 표정을 꾸며 내며 주위를 향해 호소했다.
“뭐, 뭐예요. 왜 다들 날 보는 거죠?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요. 난 언니에 대해 나쁜 말 한 번 한 적이 없잖아요.”
“나쁜 말인지 좋은 말인지는 네가 판단할 게 아니고.”
상 위에 놓인 술병에서 술 한 잔을 따라 마신 세화가 웃으며 덧붙였다.
“네 입놀림으로 결국 내 인상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비쳤는지를 생각해야지.”
“……언니, 제게 너무 화내지 마세요. 저는 그저 언니를 걱정했던 것뿐이에요.”
사연주가 울먹이듯 말했다.
“제가 언니를 나쁘게 말했을 리가 없잖아요. 거짓은 하나도 없었고. 아니, 물론 영력이라든가 이런 부분은 제가 착각했지만 저는 정말로 그런 줄 알았고.”
“그건 됐고. 연주야. 내게 미안하다면 그런 말보다 네 옆자리에 놓인 음식들이나 좀 먹어 볼래?”
“……네?”
“네 옆자리에 내 것으로 준비되었던 상이 있잖니. 그 위에 있는 음식들이나 하나씩 먹어 보라고.”
“……음식? 가, 갑자기요?”
“응.”
“왜요?”
“아까부터 네가 내게 그걸 두 번이나 권한 게 이상해서.”
“……그게 대체 왜 이상하단 거죠? 전 그냥 언니를 위해 준비된 주안상이 이미 있으니까-.”
“됐고.”
주세화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걸 먹으면 이번 일은 없었던 걸로 해 줄 테니까. 한번 먹어 봐.”
“절 믿어 주신다는 건가요? ……하지만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으니 조금만 있다가 먹을게요.”
“연주야.”
“네?”
“홀로 되어 우리 집안으로 오게 된 널 내가 친동생처럼 정말 많이 아끼지 않았니. 네가 도박에 빠져 달마다 받는 많은 용돈을 며칠 만에 탕진하고도 모자라 나와 내 어머니의 방을 뒤졌어도 모르는 척해 주었고 말이야.”
“!!!”
“우리가 일찍 돌아와 원하는 걸 얻지 못했던 날에는 전선에 나가 있는 두 오라버니의 방을 뒤졌었지? 그러다가 도둑으로 오해한 하인에게 두들겨 맞아 며칠을 앓아누웠었고 말이야.”
“어, 언니!”
“오라버니의 방에 속을 죄다 게워 내는 바람에 바닥을 다 뜯어내야 했었지. 하지만 그런 널 내가 책망한 적 있었니? 그저 극진히 간호해 주기만 했었지. 내가 널 어떻게 보살폈는데 넌 나를 위해 옆에 놓인 음식 하나 먹어 주지 않고. 정말 슬프구나.”
연회장이 급격히 소란스러워졌다.
‘맙소사. 도둑으로 오해받아 속을 게워 낼 정도로 두들겨 맞았었대요.’
‘오늘 얼굴이 저렇게 부은 것도 설마……?’
‘사실 나도 아까부터 그런 생각을 하긴 했었어요. 왜, 환계의 약이 좋긴 하지만 급히 치료하면 약간 피부가 푸르스름하게 가라앉잖아요. 좀 그런 것 같지 않아요?’
저를 두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사연주가 입만 뻐끔거렸다.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사, 사실이 아니에요! 난 그런 적 없어요! 사실이 아니라고요!”
“…….”
“…….”
그렇지만 이미 주변을 둘러싼 이들의 표정은 조금씩 일그러져 있었다.
입술을 깨문 사연주가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왜들 이러세요. 저 말들을 믿어요? 우리가 그간 나눈 친분이 얼만데, 그 오랜 시간 함께한 나를 못 믿고 오늘 처음 본 제 언니의 말을 믿어요?”
낮은 웃음소리가 그 외침을 뚫고 다시금 흘러들었다.
세화가 웃으며 권했다.
“좋아. 그럼 네 옆에 놓인 상 위의 음식들을 일단 비워 보렴. 그러면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공개적으로 사과할게. 이곳 분들에게 넌 그런 애가 아니라며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 거고. 어때?”
그녀가 턱 끝으로 상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그러니 이제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먹어.”
“…….”
“…….”
사연주가 부들부들 떨었다.
대치가 이어지자 누군가 사연주에게 조심히 권했다.
“연주야. 네가 먼저 오해할 만한 얘기를 퍼뜨린 거잖아. 이런 건 고집 세울 일이 아니야.”
그 옆에 있던 이가 거들었다.
“그래, 맞아. 나 같아도 화가 났을 거야. 그래서 아가씨도 아무 말이나 지어낸 것 같지만, 네가 음식을 먹으면 자기 이름을 걸고 네게 사과하겠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뭐가 있어.”
다른 곳에 있던 이도 말을 보탰다.
“그래. 저런 말까지 들었으니 순순히 요청을 들어주고 싶지 않겠지. 그렇다고 기 싸움을 하며 버틸 필요는 없잖아. 음식 조금 맛있게 먹고 나면 다 해결될 일인걸.”
자존심이야 상하겠지만 그래도 인과 관계를 따지면 사연주가 먼저 잘못한 것 아닌가.
사과하며 술 한 잔 들이켜면 끝날 일 같은데, 이게 뭐라고 버티는 거지?
모두가 그런 사연주를 의아하게 바라볼 때였다.
조금 웃은 세화가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못 먹겠지? 뭘 탔으니까.”
“……!”
“……!!”
순식간에 장내가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언제 사연주의 곁으로 다가왔는지 모를 영선이 상을 들어 올렸다.
“내놔!”
깜짝 놀란 사연주가 영선에게 달려들었지만 건장한 체구의 영선을 이길 순 없었다.
제게 달려드는 사연주를 발로 차 치워 버린 영선이 세화의 옆에 상을 내려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
“뭐, 뭐예요! 무슨 짓이에요! 그건 왜 가져가요. 거기다 몰래 뭘 타려고 그러는 거죠! 그래서 날 모함하려고!!”
그렇게 소리치다 말고 사연주가 정신을 차렸다.
안 돼. 여기서 더 이상 흥분해선 안 됐다.
이 주씨들은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족속들이었다.
제가 당황하고 무너지면 질수록 그간 이 무리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을 떠올린 그녀가 필사적으로 가장된 슬픔을 얼굴에 내보였다.
노력은 헛되지 않아, 결국 굵은 눈물방울이 가련한 얼굴을 덮으며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