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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선이 연회장에서 서신을 돌리던 그 시간.
백기하를 주가의 권역으로 이끌어 가고 있던 주명윤은 참다 참다 결국 곱지 못한 목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또 왜 이렇게 가까이 오는 겁니까.”
그도 그럴 것이, 주명윤과 사단윤은 말의 어깨가 스칠 정도로 바짝 붙어 오는 백기하를 피해 계속해서 옆으로 비켜서다 이제는 숫제 길의 가장자리로만 걷는 형편이었다.
“일행이니까요.”
“어차피 여기엔 우리뿐이고, 반대편에서 누가 온다 한들 길이 넓어 비켜 줄 일도 없으니 좀 떨어지시지요.”
인간계로 향하는 통로가 있는 초소는 주가가 전쟁에서 패하며 이제는 영지 경계선이 된 곳이었다.
예전의 경계선에서는 한참을 가야 영지의 가장 중심인 주가의 권역이 나왔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주명윤이 백기하를 주가의 권역에 데리고 가려 했을 때,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빠르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초소에서 말을 받은 주명윤과 제 흑마를 탄 백가 가주는 나란히 길을 달렸다.
부지런히 달리면 이틀이면 되는 여정이었기에 주명윤은 쉬지 않고 가고 싶었다.
헌데 주변에서 지켜보는 이도 없건만 이 백가 가주는 여전히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며 시간을 끄는 것이 아닌가.
어떤 행동이냐 하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원로 어른. 아니, 어르신.”
‘아, 아니. 이자가 또 그런 식으로 부르고.’
“뭡니까.”
“혹시 식사를 하고 가도 되겠습니까.”
“식사요?”
“네.”
“……시장하십니까?”
“네.”
불로불사인 신수는 허기를 느끼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일부러 길을 미적거리는 건가. 혹시 뒤따르는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거야?
주명윤의 눈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으나 그걸 보면서도 백기하가 한 번 더 권했다.
“식사 하고 가시죠. 제게 먹을 만한 게 조금 있습니다.”
“……그러시지요.”
마음 같아서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당장 일어나서 말을 달리라고 재촉하고 싶었지만.
“하하. 준비는 제가 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자기가 먹을 식사를 직접 챙겨서 가지고 다니는 걸 보면 허기를 느낀다는 말이 영 거짓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재빠르게 길 한편의 노상에 자리를 마련하는 솜씨를 보아도 한두 번 해 본 일은 아닌 듯싶었다.
거기다 마음이야 어쨌건 간에 승전 가문의 가주에게 실례를 범할 수는 없었다.
‘신수도 식사를 하나. 뜻밖이긴 하군.’
그렇게 생각한 주명윤이 조용히 사단윤을 따로 불렀다.
“자넨 이대로 먼저 주가 권역으로 가서 주가의 호위들을 좀 불러와. 저자의 행동이 수상해 괜히 우리끼리만 가다가 오해를 살 수도 있을 듯하니.”
“권역까지요?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가는 길에 초소가 있으니, 초소병을 호위로 요청하면 어떠십니까?”
“초소병을 동원하려면 운용권이 있어야 해. 신영께 허가받는 것보다 가문의 호위들을 데려오는 편이 빨라.”
“혼자 계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 어떡하겠나. 자네가 되도록 빨리 와 주게.”
한숨을 쉰 사단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도 자지 않고 다녀올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크게 반응하진 마십시오. 저런 이인 줄 몰랐는데 오늘 보니 속에 제법 꿍꿍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저런 자인 줄 몰랐군. 여기까지 혼자 온 것도 뭔가 수상해. 아무래도 일을 만들어 다시 한번 전쟁을 일으키려는 건 아닌지 염려되니 자네도 주가의 병사들에게 방심하지 말라고 당부해 두고.”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빨리 와야 하네. 알았지?”
“염려 마십시오.”
급히 먼저 떠나는 사단윤을 지켜본 후 주명윤은 백기하의 옆으로 다가가 그가 이미 준비해 둔 돌 위에 앉았다.
말에서 내린 짐을 능수능란하게 펼친 백기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나뭇가지를 쌓고 있었다.
탁, 하고 손가락을 튕긴 것뿐인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꽃이 터지며 나뭇가지에 불이 붙었다.
“무사분은 어디 가시는 겁니까?”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먼저 보내게 되었습니다.”
“아쉽군요. 좋은 것을 드리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좋은 것?’
뜻 모를 말을 듣는 주명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나중에 기회가 또 있을 테니까요. 그나저나 원로 어른.”
백가주가 불꽃 위에 가지고 온 음식들을 걸쳐 놓는 것을 보며 주명윤이 기감을 펼쳤다.
하지만 아무리 예리하게 살펴도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지켜보는 이도 없는데 대체 왜 계속 저런 태도인 거야?’
하지만 물어봤자 제대로 된 대답은 들을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주명윤은 ‘제가 왜 백가주의 어른입니까?’ 하고 묻는 대신 약간 포기한 어투로 그 호칭에 답했다.
“네.”
“음, 그러니까. 환계 일곱 가문의 예법이 대개 비슷하다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여 여쭈어봅니다만.”
“네.”
“주가에서는…… 부모가 자리하지 않고는 혼약할 수 없는 게 맞습니까?”
“?”
“그러니까 제 말은, 예를 들어 원로께서 여기 계시면 자녀분들의 혼사는 진행되다가도 멈추는…….”
“보통 그러지 않습니까? 백가는 아닙니까? 굳이 부모가 없을 때 치를 이유가 없지요. 날을 다시 잡으면 되니까요.”
“그렇습니까?”
“네.”
“그렇군요.”
그는 마치 쉬이 진정할 수 없는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더니 갑자기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다시 멈춰 섰다가, 자리에 앉기 전에 한 바퀴를 더 돌았다.
“??”
주명윤이 대체 저게 뭐 하는 짓이지, 하고 보고 있을 때였다.
돌아온 그가 평온한 표정으로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주명윤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구겨졌다.
“……경사요?”
“네. 그러니까 뭐, 풀어 말하자면 좋은 일이 뭔가…….”
백기하가 주명윤의 눈치를 보며 한 번 더 언급했다.
“그러니까 뭔가 좋은 일이 원로 어른께 있을 듯하여…….”
진중한 성격의 노장은 어이가 없다 못해 간만에 진심으로 화가 나는 중이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당신이 요구한 실종 사건의 책임자 자리 때문에 지금 내 딸이 무슨 위기에 놓였는데 경사?
입이 터져 있다고 경사라는 단어를 올려?
결국 주명윤이 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경사 따윈 없습니다!”
“……없다고요?”
“있겠습니까?”
“…….”
백기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그 상태로 주명윤을 가만히 보다가 다시 물었다.
“정말 경사가 없습니까? 지나간 경사라도. 아무튼 근래 경사스러운 소식은 없는 겁니까?”
‘이, 이 작자가. 지금 날 놀리러 온 건가?’
“없습니다!”
그런 주명윤의 얼굴을 진실을 찾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샅샅이 응시하던 백기하가 이내 다시 벌떡 일어났다.
몸을 돌려 멀어지더니 주변의 나무를 퍽퍽 쳤다.
영력은 담지 않은 것 같은데 어찌나 세차게 두들기던지 나무가 쩌억 소리를 내며 뒤로 부러져 넘어갔다.
쿵!!!!
‘……뭐지. 저자가 정말 미친 건가.’
주명윤이 경악한 시선으로 한발 물러섰다는 것은 모르고 백기하는 나무를 다섯 그루는 부러뜨린 후에야 험험, 목을 고르고 다시 곁으로 다가왔다.
상기된 얼굴의 그가 말했다.
“다행입니다, 어르신.”
‘다행? ……경사가 없으니 다행이라고?’
노장의 팔이 덜덜 떨렸다.
주명윤이야말로 불을 고르는 이 나뭇가지라도 부러뜨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니면 이걸 저자의 입에 처넣던가.
‘게다가 왜 계속 어르신이지?’
도무지 대화의 방향도, 이런 호칭의 이유도 찾을 수 없던 주명윤이 몸을 숙였다.
목소리를 낮춘 채 한번 물어나 보았다.
“한데 백가주. 지금은 듣는 이도 없는데. 왜 내게 자꾸 그런 호칭을 쓰는 겁니까?”
“원로 어르신이야말로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어르신은 어르신이지요.”
“…….”
“전장에서도 우리,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 않습니까. 불리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에서도 병사들을 굳건히 다독이시며 어떤 전투에서도 앞장서시고. 패전의 순간에도 퇴로를 책임지시며 결코 적 앞에서 물러서지 않던 그 기백에 큰 감명을 받았었습니다.”
“……?”
“하하하! 그 비루한 꼴을 좀 보라지!”
“향락에 길들여져 이젠 주가에 영수조차 제대로 태어나지 않는다 들었는데 다 틀린 말이 아닌가. 이보시오, 명윤.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그대 병사들의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모두 다 뱀의 씨를 잘 타고난 듯한데 주씨 대신 사씨나 쓰지 그러시오!”
주명윤이 전장에 울려 퍼지던 이 사내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
“어르신?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하시지요.”
“…….”
아끼는 것뿐이지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주명윤이 여전히 침묵을 지키자 백기하가 제가 앉은 돌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왔다.
그러니까 주명윤의 옆으로.
“어르신.”
“가까이 좀 오지 마십시오.”
“어찌 말씀을 그리 섭섭히 하십니까. 자, 이걸 한번 드셔 보시지요.”
그가 아까부터 불에 굽고 있던 무언가를 내밀었다.
전장의 거친 식단에 익숙해진 주명윤조차 처음 보는 식재료였다.
“이것이 뭡니까.”
“드셔 보시면 압니다. 이렇게 따끈따끈하게 데워 드셔야 흡수도 빠르고…….”
“?”
주명윤이 제 손으로 넘어온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불에 구워졌는데도 탄 자국 하나 없이 하얗고 뽀얀 식재료는 몹시 따뜻할 뿐, 뜨겁거나 물컹거리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뭐지?’
혹시 독살을 시도하는 건 아닐까 잠깐 의심이 들었으나 그보다는 궁금증이 더 컸다.
대체 여기까지 뭘 하러 온 건지, 이걸 먹어 보면 알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주명윤이 백기하를 바라보았다.
백기하 역시 어떤 기대감이 넘치는 눈으로 주명윤을 응시한 채였다.
‘……독. 그래. 아무리 그래도 설마 독은 아니겠지. 이 사내가 그렇게까지 할 것 같진 않아.’
호기심을 참지 못한 노장이 결국 들고 있던 것을 입에 가져다 대고 한 입 베어 물었다.
한데 이로 베자마자 물처럼 변하더니 한 번에 꿀떡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
“워허. 어르신 뱉지 마십시오. 뱉으시면 안 됩니다.”
목을 부여잡고 제 몸속으로 들어간 뭔가를 뱉어 내려던 주명윤은 삽시간에 배 속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계속해서 영력을 뽑아내기만 한 탓에 써늘하게 비었던 중심에 따스한 영력이 차올랐다.
영력이 차올라?
“!”
그가 황급히 고개를 들고 백기하를 바라보았다.
“이, 이게 뭡니까. 영력입니까? 아니, 일반적인 형태의 영단이 아닌데. 이거 백, 백가주 그대의 영력입니까? 신수의 영단입니까?”
백기하는 주명윤이 말에 눈을 내리깔고 어쩐지 조금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뜨끈하게 구워진 하얀 무언가를 또 내밀었다.
“많이 가져왔습니다. 조금 더 드시지요, 어르신.”
“조금 더 먹으라니.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참다 참다 폭발한 주명윤이 언성을 높였다.
영단의 형태로 만들면 이질적인 영력은 색으로 바로 알아낼 수 있다.
배상 영력을 아직도 뽑아내야 하는데 이게 무슨 짓인가.
아무리 나와 신영을 이간질하려 해도 그렇지. 이건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내가 내통자로 몰려 목이라도 잘리길 바라고 이런 걸 먹인 겁니까!”
백기하가 손을 저었다.
“원로 어르신. 그 무슨 큰일 날 말씀입니까. 저는 그저 더 이상 영력을 뽑아내실 일이 없으실 테니 그간의 노고에 대해 몸보신이 되셨으면 해서 드린 겁니다.”
“영력을, 뽑아낼 일이 없다고요?”
“네. 더 이상의 배상 영력을 요구하지 않고, 있는 것만 가지고 갈 겁니다. 아, 어르신께서 만드신 내단은 제가 따로 챙겨 돌려드리겠습니다.”
“…….”
“어르신?”
“……왭니까?”
“네?”
“왜 제 내단은 돌려주시겠다는 겁니까.”
“그야 누차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원로 어른의 기백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래서 호의적인 사이가 되고 싶었으니까요.”
“주명윤! 그 질펀한 엉덩이를 걷어차기 전에 이제 그만 그대들의 영토로 썩 꺼지는 게 어떠한가!”
“저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니 원로 어르신 같은 분이 제 아버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늘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직도 버티겠다면 할 수 없지. 그 뱀 같은 머리들을 죄 베어 백가의 제단에 올릴 수밖에!”
“괜찮으시다면 절 아, 아들로 여겨 주시지요, 아, 아버님.”
“…….”
주명윤은 이제 이 사내를 이해하길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