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254)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사이 손님이 천천히 문지방을 넘었다.

멍한 시선들이 그런 손님의 행적을 따라 움직였다.

손님의 몸을 감싼 새까만 의복은 밝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에서도 제 색을 전혀 잃지 않았다.

오래된 핏자국처럼, 혹은 까마귀의 날개처럼.

“이상하군요.”

어둡고 불길해 보이지만 그녀에게 더 없이 완벽하게 어울린다는 사실만큼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연회의 손님 대접이 원래 이러한가요? 이렇듯 세워 놓고 다들 구경만 하시니 민망하고 어색하여 그만 돌아서고 싶어집니다만.”

차갑게 꼬리를 끌어 올린 붉은 입술 사이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오자 오늘 연회를 개최한 이가 정신을 차렸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연주야, 뭐 하니? 네 사촌 언니분을 챙겨야지!”

그제야 멍하니 세화를 바라보던 사연주도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언니, 이쪽이에요! 제 옆으로 오시면 돼요.”

“…….”

세화는 미동도 없이 제자리에선 채 연회의 주최자만 가만히 응시했다.

‘뭐지? 혹, 안내를 바라는 건가?’

그렇게 추측한 주최자가 상석에서 내려왔을 때였다.

세화의 버선이 움직였다.

모두가 자리한 연회장의 한가운데를 걸어간 그녀는 지금껏 주최자가 앉아 있던 상석에 당연한 듯 앉았다.

“……!”

깜짝 놀란 시선들이 일제히 세화와 주최자를 번갈아 살폈다.

시선을 느낀 주최자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끌어올렸다.

“원로 여식께서 뭔가를 혼동는가 본데 그 자리는-.”

“이미 술도 따라 드신 것 같고. 안주도 헤집어 놓았고.”

제 앞에 놓인 술상을 확인한 세화가 의례적 미소조차 보이지 않으며 냉소했다.

“혼동이라는 단어는 좀 우습군요. 여기가 내 자리가 아니라면 날 대체 어디에 앉히려 했던 것인가요?”

“…….”

세화의 싸늘한 시선이 연회장 한 자리씩을 차지한 혈족들의 눈을 훑고 지나갔다.

주최자가 어색한 웃음을 띄우며 망설이다 사연주를 바라봤다.

사연주는 주씨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연회에서 좋은 자리를 받을 수 없었다.

원로의 여식이 함께 앉을 만한 자리는 아니지만, 이제껏 사연주의 입으로 듣던 주세화의 인상이 더없이 나약하고 의존적이었기에, 당연히 사연주의 곁에 자리를 마련해 주면 되겠지 싶었던 것이다.

주최자의 눈치를 받은 사연주가 입술을 깨물다가 압박에 못 이겨 입을 열었다.

“어, 언니. 그 자리는 연회의 주최자이신 수연 언니의 자리이니 이쪽으로 와야.”

“연주야. 그렇게 많은 연회에 참석하고도 아직 뭘 잘 모르는구나. 이런 때엔 네가 그런 식으로 끼어들어선 안 되는 거야. 예법이 그래.”

“응?”

이게 무슨 말이지?

지금까지 연회에서 할 말을 못 했던 적은 없는데. 갑자기 무슨 예법 타령?

“예, 예법? ……무슨 예법?”

“무슨 예법이냐니. 신영께서 본가의 피와 분가의 피를 엄히 구분하셨지 않니.”

세화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여 사씨인 넌 이런 연회에서 본가의 피가 허가할 경우에만 발언할 수 있단다. 그러니 입을 열기 전 꼭 손을 들어 허락을 받으렴.”

“!”

“지금까지야 네가 밖에서 어찌 행동하는지 몰라 가만히 있었지만, 이런 자리에서까지 그리 뭣도 모르듯 굴면 안 되지. 다른 이들이 너뿐만 아니라 널 가르친 날 어찌 보겠어.”

“…….”

허나 목소리가 대수롭지 않게 들린다고 말의 내용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주씨와 사씨의 간극.

사연주가 가장 아프게 느끼는 곳을 찌르는 말이었으니.

사촌 동생의 눈동자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흔들리는 것을 보며 세화가 여상하게 덧붙였다.

“게다가 내가 누군가와 대화 중이었잖니. 그럴 땐 네가 입을 열고 싶어 한다는 걸 누군가 알아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야 하는 거고. 알겠니?”

여러 사람 앞에서 갑자기 치부를 공격당한 사연주의 주먹이 소매 속에서 말려들었다.

감히 본가 혈족들의 대화에 함부로 끼어들어 입을 열지 말라는 그 엄포보다도.

“사씨인 넌-…….”

그 말이 너무 분해서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으니까.

‘……지가 뭔데.’

그저 운 좋게 좋은 부모를 두고 태어났을 뿐인 주제에. 고작 그뿐이면서 나한테 그따위로 잘난 척을 해?

다행히 누군가 제 동요를 눈치채기 전에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는 이성은 남아 있었다.

“어, 어떻게.”

사연주의 얼굴이 서글프게 일그러졌다.

“어떻게 그런 말을……. 난 그저 언니가 이런 연회에 잘 참석해 보지 않아 자리 배치를 모를 듯해 순수하게 가르쳐 주려 했을 뿐인데.”

원래 이런 때는 상대보다 한술 더 떠야 하는 법.

“손을 드는 것만으로는 잘 안 보일 것 같은데, 이리 서있는 건 어때?”

휘청이며 몸을 일으킨 사연주가 젖지도 않은 눈가를 쓸며 목소리를 떨었다.

“내 자리가 언니가 있는 곳과 이리도 멀리 떨어져 있으니, 발언을 허락해 주겠다고 날 신경 쓰느라 언니가 더 힘들 것 같으니까 말이야. 아니면 차라리 날 언니 곁으로-.”

“힘들 게 뭐가 있겠어. 네가 그렇게 서 있겠다는데. 그거 잘 보이고 괜찮구나. 앞으로는 그렇게 하렴.”

“……뭐?”

당황한 사연주가 우는 척하던 것도 잊고 잠시 멍하니 굳어졌다.

“왜? 뭔가 문제 있니?”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뭐지. 저년은 평판이 나빠지는 게 두렵지도 않나? 아무도 지키지 않는 예법을 강요하며 다른 이들 앞에서 동생을 괴롭히더라고, 온 사방에 알리고 싶기라도 한 거야?’

하도 황당해 눈을 깜빡거리다가 주위의 시선을 깨닫고 사연주가 황급히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몹시 서러운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울먹이는 목소리를 꾸며 내며 한 번 더 물었다.

“그럼 앞으로는 계속 이렇게 서서 언니의 허락을 기다리면 될까? 일일이 허락을 받다 보면 연회 내내 서 있게 될 것 같은데, 언니가 원하는 게 그거야?”

“응.”

“…….”

“그렇게 하렴. 너와 내가 아무리 격의 없는 사이라 해도 다른 이들의 앞에서까지 관례와 예법을 무시하고 행동하면 되겠니. 다행히 총명한 네가 자신의 위치를 빠르게 깨우쳤구나.”

이 말엔 도무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지금.”

사연주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 나보고 연회 내내 이리 서 있으라고?”

“할 말이 있을 땐 그리해야지. 그래야 누군가 널 눈치채고 발언을 허락하지 않겠니?”

“…….”

“확실히 서 있으니 더 잘 보이긴 하는구나.”

기가 막혀서 입만 뻐끔거리는 사연주와 그런 당연한 사실까지 내가 깨우쳐줘야 하냐는 것처럼 지루해 보이는 세화 사이를 흥미에 찬 시선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그런 연회장 내부의 분위기를 읽으며 세화가 불쑥 물었다.

“그리고 일어난 김에 한번 말해 보렴. 내가 자리 배치를 모를 듯해 알려 주려고 했다니 궁금해지는데, 네 생각엔 내 자리가 어디일 성싶으니?”

“그건…….”

사연주는 제 옆에 준비된 주세화의 자리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신영의 피에 가장 가까운 원로의 여식이 제일 구석진 이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의 자리를 가리키자니 그 자리를 주세화에게 내어 주고 비키란 것이나 다름없어, 섣불리 대답할 수도 없고.

사연주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사씨가 제대로 일을 할 것 같지 않자, 주최자가 완벽한 웃음을 만면에 떠올리며 대신 대답했다.

“그야, 명윤 원로님의 따님께서 당연히 그 자리에 앉으셔야지요.”

“…….”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씀은 그저 본의 아니게 제가 자리를 더럽혀 놓았으니 조금만 양해해 주시면 금방 정돈하고 새 상을 바로 올릴 거라는 것이었답니다.”

“그렇군요. 난 또 날 초대해 놓고 먹다 남긴 음식을 주려는 건가 오해를 했지 뭔가요.”

“아유. 무슨 그런 말씀을요.”

“정말 다행이에요. 하마터면 내 여린 가슴이 충격으로 뭉개져 신영께 가서 몸이 좋지 않아 감히 내게 맡겨 주신 임무를 수행치 못할 것 같다고 간언 드릴 뻔했으니까요.”

“…….”

“한데 상을 준비하는데 오래 걸리나요? 나만 술도 없이 멀뚱히 있으려니 꽤나 민망하고 어색하군요.”

그때 사연주가 불쑥 끼어들었다.

“수연 언니, 새로 준비하실 필요 없어요. 여기 언니 몫으로 준비된 상이 있으니 이걸 옮기시면 돼요.”

그 말을 듣고도 세화는 여전히 주최자만을 응시한 채 가만히 물었다.

“그러실 건가요?”

“……그럴 리가요.”

주수연이 신호를 보내자 시녀들이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빠르게 세화의 앞에 놓여 있던 상을 내가고 자리를 정돈했다.

오래지 않아 다른 이들의 것보다 월등히 큰 상이 서둘러 세화의 앞에 놓여졌다.

결국 주최자는 세화의 옆에 조그마하게 술상을 놓고 억지 자리를 만들어 불편하게 앉게 되었지만, 그걸 보면서도 세화는 조금도 만류하는 기색 없이 웃기만 했다.

“예를 아는 분이군요.”

‘……이 원로 여식은 대체 왜 이리 한마디가 많은 거지?’

주최자인 주수연은 도무지 뭐라 대꾸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원로 여식의 이런 고압적인 태도가 백가행으로 인한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본디 이런 성격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보았을 때는 이런 성격이 분명 아니었던 것 같은데. 사연주의 말에도 늘 일관성 있었고.’

하지만 태도도 태도이거니와 하는 행동이 전혀 이런 연회에 처음 참석하는 이 같지가 않았다.

아무리 예법을 달달 외우고 있다 한들, 먼저 참석한 이들이 관례가 그렇다고 말하면 그런가 보다 하는 법인데 이 여자는 그런 게 없었던 것이다.

마치 그런 일 따윈 이미 많이 당해 보기라도 한 양 말이다.

가까이 앉은 김에 주세화의 반응을 살피던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헌데 그 백가행 말입니다.”

“예,”

“정말 가시는 겁니까?”

“그럼요. 가문의 은혜를 입은 몸으로 어찌 그런 중대사를 마다할 수 있을까요. 신영께서 큰 임무를 주셨으니 마땅히 따라야지요.”

“하지만 그 역도들의 소굴에 혼자 가셔야 하거늘, 두렵진 않으시고요?”

“두렵지요. 그래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대답과 함께 주세화가 제 뒤에 시립한 이에게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영선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빠르게 꺼내 들었다. 그런 뒤 그것을 연회장을 쭉 돌며 자리한 이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밀봉된 서신이었다.

받아 든 이가 의아하게 돌아보며 물었다.

“이것이 뭡니까?”

“내 입으로 그걸 여기서 말하라 하다니. 내가 그 정도 자비도 없는 이는 아닙니다. 다들 조용한 곳에서 읽어 보도록 하세요.”

자비? 조용한 곳?

그 말에 오히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몇몇 이들이 그 자리에서 서신을 열었다.

“……!!”

안에서 나온 얇은 종이 하나를 읽어 낸 눈들이 크게 뜨였다.

“이, 이걸 어떻게.”

누군가 그렇게 침음하자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뒤늦게 그 시선들을 자각한 이가 창백한 낯빛을 한 채 서둘러 서신을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대체 이런 일들을 저 여자가 어찌 알고…….’

그곳엔 그들이 제어 없이 벌여 왔던 갖가지 향락과 배덕의 증거들이 적혀 있었다.

마치 바로 옆에서 관찰하기라도 한 양 자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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