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254)

아귀 떼처럼 몰려들어 주세화에 대한 소문을 캐내려 혈안이 된 종족들 사이에서 사연주는 난감하게 웃는 중이었다.

‘그걸 알았으면 내가 이렇게 몸이 아픈 상태로 달려왔겠어? 멍청한 것들이.’

제 사촌 언니가 연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껴 뒀던 환계의 약을 피부 위로 폭포처럼 들이부었다.

그것뿐이랴.

배가 부르도록 마시고 나서야 간신히 화장으로 가려질 정도가 돼 부랴부랴 준비해 이제 연회장에 도착한 참인데 뭐라고들 하는 건지.

사연주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내게 달려들던 그 날의 모습 하며. 갑자기 이런 대외 활동은 또 왜 하겠다는 거야?’

지금껏 원로 가문의 안주인 노릇은 제가 다 해 왔건만 이제 와 주세화가 나서는 꼴을 봐야 한다니.

십여 년에 걸친 그녀의 노력을 빼앗아 간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오늘따라 네 얼굴은 왜 이렇게 부어 보여? 어쩐지 피부도 푸석푸석하고.”

“맞아. 게다가 얼굴의 흐린 자국들, 혹시 상처니?”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나오자 사연주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저희 언니가 삼 일 밤낮 동안 꼬박 기절한 채 앓아누웠었잖아요.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마음이 너무 아파 계속 울었더니 아직 조금 부었지 뭐예요.”

“사흘 밤낮을? 백가행에 놀라 기절해 실려 갔다더니 그 이후로 쭉 앓아누웠던 거야?”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지 마세요.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그랬겠어요. 홀로 떠나야 하니 무섭기도 했겠죠.”

“그래도 그건 좀 우습다.”

“우습다뇨. 워낙 지닌 영력이 약한 분이라 항상 걱정스러웠었는데.”

사연주가 젖지도 않은 눈가를 쓸며 목소리를 떨었다.

“백가행 소식을 듣고 그리 아프기까지 한 걸 보니 다른 가문의 영지에 가서는 얼마나 힘든 일을 많이 겪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랍니다.”

그 안타까운 토로에 듣고 있던 종족들의 시선이 흥미롭게 마주쳤다.

‘대체 지니고 태어난 본신의 영력이 얼마나 적길래 정신까지 잃고 앓아누울 정도람?’

그 정도로 쓸모없는 혈족이라면 공녀로 쓰이기라도 하는 편이 낫긴 할 것이다.

어쨌거나 그런 약해빠진 몸을 하고선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곳에 나타나겠다고 답신을 했다는 건데.

‘대체 이유가 뭐지?’

자기 대신 공녀가 되어 줄 혈족이라도 찾아보겠다는 건가?

그들은 주세화의 목적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추측하며 새로운 사건의 주인공이 대체 언제 당도할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오늘 연회 주최자의 귀에 주세화의 도착을 알렸다.

주최자가 그 소식을 좌중에 공표하자 높은 기대감과 흥분이 연회장 안에 가득 찼다.

대화조차 잊은 채 그녀를 기다리던 수십 명의 혈족들에게는 그들의 앞에 주인공이 나타나기까지의 시간이 억겁 같기만 했다.

* * *

그 시간, 환계로 넘어간 주명윤은 통로를 빠져나오자마자 깜짝 놀랐다.

“오셨군요!”

누군가 그에게 존대를 하며 격한 환대와 함께 손을 덥석 잡아 온 것이다.

심지어 그 누군가는 주가의 병사도 아니었다.

“백, ……가주?”

바로 그를 여기까지 달려오게 만든 백기하였다.

“기다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주명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원로께서 오셨으니 저는 이제 통로를 통과할 수 있는 겁니까.”

주명윤의 눈썹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뭐지? 이자의 말투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원로께서? 저는? 겁니까?’

갑자기 웬 존댓말?

주명윤의 분주한 시선이 사단윤을 찾았지만, 멀찍이 서 있다가 눈이 마주친 사단윤은 그저 어깨만 들썩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이자가 사단윤에게도 이런 이상한 태도를 보였나 보다.

주명윤은 얼마 전까지의 제 기억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전장에서의 기억을.

그때는 분명.

“그대가 주가 원로 주명윤인가? 드디어 염치없는 그 낯짝을 보는군!”

“환계를 어지럽히는 사건 하나 제대로 처리를 못 하면서 지배자라 으쓱대는 꼴이 낯부끄럽진 않나. 어찌 뻔뻔히 고개를 들고 다니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는데.”

“육가가 실종 사건으로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알면서, 이런 힘을 가지고도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이건가? 그러면서 전장엔 기어 나와? 수치를 알아야지!”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백기하가 전장에서 그에게 퍼부었던 말들이었다.

헌데 눈앞에 보이는 이자는 누구인가. 눈을 홀릴 듯 미려하게 생긴 이 사내는 분명 백가의 가주가 맞긴 한데.

“원로 어른.”

‘……원, 원로 어른????’

대체 자신에 대한 태도가 왜 이렇게 바뀌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린 주명윤은 주변을 둘러싼 주가의 병사들이 그와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거구나.’

깨달음이 왔다.

‘……이거였어. 나와 백가가 친밀하다고 여겨지게 해 신영과 내 사이를 이간질할 계획인 거다!’

고작 이런 심계를 심으러 종전을 하고도 허겁지겁 이곳으로 달려온 건가?

어쩐지 배신감이 느껴졌다.

애초에 그와 자신은 같은 편도 아니니 이런 감정은 말이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런 계략 같은 것은 모르는 사내인 줄 알았건만.’

딸에게 나이는 어리지만 존경할 만한 사내였다느니 칭찬을 쏟아 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이를 악문 주명윤이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손아귀에서 제 것을 빼냈다.

……빼려고 했다.

“백가주, 이게 무슨…….”

상대가 영력까지 사용하여 제 손을 잡지만 않았어도, 벌써 이 사내에게서 세 걸음은 물러났을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지. 손을 왜 안 놓는 거야?’

대체 영력을 얼마나 쓰고 있는 건지 아무리 힘을 줘도 도무지 빠지지가 않았다.

현재 주명윤의 몸에는 영력이 많지 않았다.

패전 가문으로서 육가 연합에 배상하게 될 영력을 모을 때 가장 앞장서서 제 영력을 상당량 내놓았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이 신수를 진심으로 상대할 수도 없고.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순간이었다.

영력까지 사용해 잡고 있던 주제에 백기하는 마치 그 상황을 이제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깜짝 놀라며 손에서 힘을 풀었다.

“죄송합니다. 그럼 가시지요. 원로 어르신.”

‘죄송? 아니 잠깐. 어, 어르신? 이번엔 어르신이라고까지 한 건가? 이 사내가?’

아무리 그의 계략을 이미 알아챘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놀랍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거기다 이 사내, 걸음도 당당하게 인간계로 가는 통로를 멋대로 통과하려 한다.

“백가주!”

“왜 그러십니까?”

“거기는 왜 들어가는 겁니까.”

“그야 인간계로 가야 하니까요. 당연히 인간계로 향하는 문을 넘어서.”

“인간계요? 당신은 신영께 가야지요.”

“신영이요?”

생각지도 못했던 호칭을 듣는다는 듯, 왜 일이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다는 듯.

백기하의 멍한 눈이 주명윤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을 마주하는 주명윤은 더욱 황당했다.

‘아니, 남의 영지에 왔으면 그곳의 수장부터 만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지금 승전 가문의 가주라고 주가를 이리 무시하고 제 식대로 움직이려는 건가.

“아닙니다. 뭐든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또 순순하다.

그는 마치 자신이 대단히 호의적이라는 것을 보이고 싶기라도 한 양 손목을 붙여 내밀기까지 했다.

“혹시 포승줄로 묶으셔야 합니까? 그럼 묶으십시오.”

“…….”

신수의 영력이라면 뭘 채워 놔도 지푸라기처럼 아무 소용이 없을 텐데 대체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괜찮으시다면 주가의 영지에 머무르는 동안은 꼭 원로 어르신의 안내를 받고 싶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하고 수줍게 덧붙이는 말은 마치 양해를 구하는 듯했으나 주명윤은 그 부드러운 말투에 속지 않았다.

그의 미려한 얼굴과 단단한 시선 속에는 ‘반드시 네 안내를 받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끝까지 ‘원로 어르신’이라고 존대를 하는 모습에선 주가의 영지 안에 있는 동안 계속 이렇게 존댓말을 사용하고 호의를 가장하겠다는 각오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이, 이자가 혹시 내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건가. 뭐지?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초소병들의 이상스러운 시선을 의식하며 마른침을 삼킨 노장의 눈빛이 또다시 잔뜩 흔들렸다.

* * *

연회장 안에 자리한 모든 이들은 목이 빠질 듯 대청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악공들이 연주하는 악기 소리 외엔 모든 소리가 잦아들었다.

억겁 같은 기다림이 힘겨워질 무렵, 드디어 그들이 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입니다. 아가씨.”

연회장을 책임지는 최장명의 목소리였다. 상대의 목소리는 들려오는 것이 없었다.

디딤돌 위에 올라선 듯했으나 당혜를 벗는 듯한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뭐야. 오긴 온 거야?’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사분합문 너머를 부지런히 훑었다.

누군가의 형체가 아른거렸다.

들고 있던 쓰개치마를 제 옆을 따르는 이에게 넘기고, 우아한 모습으로 치마를 들고 마루로 올라오는 모습이.

그녀는 환계의 의복이 아닌 인계의 것을 걸치고 있었는데, 자신들이 입은 것과는 전혀 다른 새까만 그 음영이 제일 먼저 눈을 사로잡았다.

이윽고 한발 앞서 문이 열렸다.

막 마루에 올라선 손님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

그리고 그곳을 바라보고 있던 모두가 일제히 숨을 들이마셨다.

‘저이가.’

누구도 먼저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제 눈앞에 나타난 이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연신 눈을 깜빡일 뿐.

‘……주세화라고?’

영력조차 하찮은, 약하디약한 개체.

원로의 여식이라는 지위가 아니었다면 쓸모가 없어 일찍이 인간계로 버려졌을 거라던 그 주세화?

백가행에 대해 듣고 놀라 울다가 기절해 며칠이나 깨어나지 못했다는 그 주세화?

사연주의 입을 통해 들은 정보가 주세화에 대해 아는 것의 전부였던 이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연회장을 둘러보는 오만한 시선은 조금도 연약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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