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254)

“……약방이라.”

세화의 입에서 실소가 샜다.

“그리고 다시금 두 번이나 변복하며 안가로 돌아왔고요. 꼴을 보아하니 뭘 샀는지는 몰라도 뒤가 구린 약이 아니겠어요?”

“기대를 벗어나질 않네. 얼굴은 어땠대? 돌아다닐 만큼은 좀 나아졌대?”

“가지고 있던 환계의 약을 있는 대로 다 사용했다는 것 같아요. 붓기는 거의 빠졌다네요. 상처는 화장으로 감췄고요.”

“화장? 무슨 이유가 있건 완벽하지 않은 얼굴을 사람들 앞에 내보일 성격이 아닌데. 내가 연회장에 간다는 얘기가 마음을 엄청 급하게 만들었나 보네.”

“오늘 연회를 연 이에 대해 저도 좀 알아봤는데 평소 어울리는 이들을 보니 괜찮다 싶은 혈족이 하나도 없었어요.”

세화가 대답 없이 웃기만 하자 영선이 답답하다는 듯 덧붙였다.

“괜찮으시겠어요? 아가씨를 긁고 공격하려고 많이들 준비하고 있을 거예요.”

“괜찮아. 너희가 나한테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실마리를 알려 줬으니까.”

“네? 실마리요?”

“응. 요컨대 씹고 뜯고 맛볼 다른 안줏거리를 내어 주면 되는 것 아니겠어?”

“안줏거리라니. 대체 어떤 거요?”

영선이 되물었으나 가마에 올라탄 세화는 이미 다른 생각에 잠겨 제때 반응하지 못했다.

그녀가 떠나야 하기까지, 가주가 준 여유 시간은 고작 한 달 뿐이었다.

짧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자연적으로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거기에 그 노인은 넣지 않았었지.’

그녀와 가족들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다급함이 제일 컸었으니까.

물론 신영이 원인을 제공하긴 했지만, 미래에 벌어질 일들의 열쇠가 될, 언제든 그녀 아버지의 뒤를 칠 준비가 된 쥐새끼 같은 이들을 먼저 처리해야 했기에 아직 가주까지는 고려하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녀가 알고 있는 여섯 가문 아이들의 실종 사건에 대한 증거를 모아 공개하면 따로 손을 쓰지 않아도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몰려들어 가주를 처단할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었고.

하지만 그가 제 아버지를 예상한 것보다 일찍 처리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아버지에게 위협이 되는 그 노인을 절대로 이대로 두고 떠날 수 없지.’

눈빛이 서늘히 침잠해 들어가는 그녀의 입매가 미래에 대한 각오로 단단해졌다.

앞으로 그녀의 손에 묻을 피는 범상한 양이 아닐 것이다.

‘나는 명계에도 가지 못하고 분명 연옥에 떨어지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그럴 리가. 절대 아니지.’

그녀가 드러난 제 새까만 치맛자락을 눈에 담았다.

왜 이 색을 선택했던가.

적들의 앞에 처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자리를.

처형장이 부모의 피로 흠뻑 젖었던 그 날의 자신과 함께하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빠르게 움직인 가마가 닿은 곳은 혈족들을 위해 외곽에 준비된 거대한 저택이었다.

가마가 멈추자마자 누군가 늘어진 발을 들어 올렸다. 영선의 것과는 전혀 다른 커다란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열기 어린 눈동자를 그녀에게 향하며 손을 뻗고 있는 것은 젊은 사내였다.

‘최장명? 이자가 와 있었나?’

최덕문은 환계에서 추방당한 이후에도 혈족들과 실낱같은 연이라도 이어져 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여 인계에서 벌어들인 돈을 사용해, 혈족들이 인계에 머물 때 모든 수발을 기꺼이 도맡았다.

아들이 그 일을 이어받아 이곳에 나타났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세화는 최장명의 손과 약간 붉어진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빠르게 사내의 손을 쳐낸 사영선이 세화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가 영선의 손 위에 제 것을 겹친 채 가마에서 빠져나왔다.

그 모습을 본 인간 하인들이 저들끼리 시선을 맞추며 뭐라 눈짓했다.

오전부터 안절부절못한 모습으로 그들과 함께 길가에 서 있던 최장명을, 거대한 저택의 대문을 지키는 하인들은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게 여기던 참이었다.

이 도련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껏 어떤 규수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아 많은 도성 여인들을 상사병으로 쓰러지게 만드셨던 분이 아니시던가.

의례적인 미소조차 없이 누구에게나 늘 냉막한 표정만을 짓던 그런 분 말이다.

어떤 지체 높은 이를 만날 때에도 절도 있고 예의 바른 모습을 잃지 않고, 그들의 기에 눌리거나 초조해하는 모습은 보인 적 없으시건만.

‘오늘 연회에 대체 얼마나 대단한 손님이 오시길래 저분께서 저리 들뜨고 초조해 보이시는 거지?’

예외적인 그의 모습을 하인들이 연신 흘끔거리던 그때.

저 멀리서부터 가마 한 대가 다가왔다.

지금까지 도착한 가마 중 가마꾼이 가장 적었고 가마의 장식도 그리 튀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가마를 발견한 최장명은 누구보다 빠르게 곧장 튀어 나갔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으로 얼굴을 붉히며 늘어진 발을 들어 주고 손을 내밀었으나 가마 안에 타고 있던 이는 그것을 잡지 않았다.

쓴웃음을 지으며 옆으로 한 발짝 물러나는 도련님의 모습을 신기하게 여기는 사이, 가마 안에 타고 있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

한 번도 햇볕을 쬔 적 없는 것처럼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였다.

그 흰색에 눈을 빼앗겼던 하인들은 빛 아래로 나타난 여인의 자태에 눈을 크게 떴다.

입술이 몹시도 붉은 여성이었다.

저고리와 치마를 보통 다른 색상으로 입는 규수들과 달리 아래위를 똑같이 검은색으로 맞춰 입었는데, 그 모습이 희한하게도 몹시도 고혹적이면서도 더없이 단아해 보였다.

진한 색상의 저고리 때문에 그 위로 드러난 희고 가는 목이 더욱 눈부셨고, 긴 소매 아래로 보이는 여린 손가락은 보는 이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고요해진 공간에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선명했다.

계절은 초여름을 향해 가고 있었고, 그녀는 까마귀처럼 새까만 의복을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치 겨울 눈 속에 홀로 핀 동백 같았다.

지극히 붉고 강렬한 아름다움을 드러낸 여인이었다.

그 여인이 정면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내가 여기 오는 건 어찌 알고요.”

멍한 표정으로 세화를 바라보고 있던 최장명이 한발 늦게 대답했다.

“……혈족들의 모임이 있을 때는 아버지께서 직접 관리하시기 때문에 저 역시 명부에 주의하는 편입니다. 특별한 손님이 오실 거라며 오전에 이미 당부를 내리셨습니다.”

“뭘 얼마나 특별하게 대해 주시려고 당부까지.”

“이미 안에 모인 손님들 사이에서 아가씨의 소식이 떠들썩하더군요.”

“그래요? 많이들 도착했나요?”

“지금까지는 늦은 오후나 되어야 연회장이 가득 찼는데, 오늘은 오전부터 발걸음들이 무척 분주합니다.”

걱정된다는 얼굴을 하고 최장명이 조용히 덧붙였다.

“이것을 미리 말씀드리는 게 좋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 기다렸습니다. ……연회장을 미리 돌아보았을 때 아가씨에 대한 좋지 못한 인식들이 팽배한 듯했습니다.”

“…….”

“월권이라 생각하셔도 좋으니 조심하셨으면 합니다. 혈족들의 모임이 있을 때는 엄격하게 선별한 하인들만 연회장에 들여보내니, 무슨 일이 있으면 그들에게 말씀하십시오. 금방 제게 소식을 전할 것입니다.”

세화의 무심하면서도 조금은 의아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아무리 그와 계약을 맺기로 약속했다 하더라도 아직 권속으로 삼은 것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그는 이미 계약을 맺은 듯 행동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알면서도 최장명은 그녀에 대한 제 옛 기억을 설명하지 않은 채 속삭였다.

“그리고 가장 아가씨께 원한을 가진 듯한 여자가 하나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일행인 듯한 이가 그 여자를 사연주라고 불렀습니다.”

“원한을 가진 듯 보였다고요?”

“제가 오전 내내 이곳을 지켰기에 마침 목격하게 된 듯하지만, 아가씨의 존함을 심상치 않은 감정을 담아 되뇌더군요. 마중을 나온 이와 합류했을 때는 표정이 바뀌었지만 말입니다.”

‘그 애가.’

그녀의 눈이 반달로 휘어졌다.

‘제 앞에 붙은 성씨를 바꾸고 싶어 안간힘을 쓰는구나. 그럼 일단 주가의 울타리에서 내보내 볼까.’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을. 연회장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좋아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기대감 어린 눈으로 떠올린 그녀가 건물 안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 * *

한없이 넓은 연회장 안에는 이미 삼삼오오 자리한 혈족들이 각자 술상을 하나씩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흥을 돋우는 거문고의 음률에 맞춰 무희들은 정원에서 투명한 소매를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아름다운 동작에도 불구하고 무희들의 표정은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높은 보수를 제시받고 기꺼운 마음으로 달려왔건만, 오늘따라 제 기세를 감추지 않는 혈족들의 사이에서 이들이 사람이 아님을 직감한 까닭이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대부분 탈피하지 못한 어린 종족들이었으나 그들의 위세조차도 평범한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희들의 안색을 창백하게 만들 정도로 영력을 흩뿌리는 혈족들은 기대와 흥분으로 눈을 빛내는 중이었다.

“그래서 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람.”

누군가가 새로 입장할 때마다 연회장 모든 이의 시선이 잠시 문가에 머물렀다.

그들의 고향인 환계에는 배상 영력을 지불하는 일과 종전 협상으로 인해 침체된 분위기가 영지 전역에 퍼져 있었다.

하여 당장 떠들썩하게 연회를 여는 일은 불가능했다.

전쟁이 끝나든 말든 어린 그들과는 크게 관련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배상 영력의 지불이 아직 남아 있는 이때에 괜히 환계에 있다가 탈피라도 하면 그들 역시 영력을 뱉어 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랬기에 그들은 일찌감치 인간계로 넘어와, 고향에선 누릴 수 없는 즐거움을 매일 찾아 즐기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에게 최고 즐거운 관심사는 원로 여식의 백가행이었다.

원로의 여식과 가까운 사연주의 말에 따르면 주가의 혈족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영력도 형편없는 주제에 도도하기만 하다던데.

물론 사연주가 제 사촌 언니에 대해 이런 식으로 언급하진 않았으나 어떤 부드러운 단어로 포장했건 간에 요약하자면 저런 평가였다.

홀로 고고한 척, 또래들과 자신은 뭔가 다른 척 연회에도 제대로 참가하지 않던 그녀가 한 달 뒤면 떠나갈 지금에 와서 부랴부랴 갑자기 사교 행사에 뛰어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얘기 좀 해 봐. 그래도 넌 알고 있을 것 아냐.”

“그래요, 연주 언니. 뭐 그리 대단한 이야기라고 이런 것까지 감싸 주고 그래요?”

“맞아. 여기서 사씨 아가씨가 자기 사촌 언니 좋아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나? 그렇게 침묵을 지키지 않아도 우리가 그 마음 다 안다고.”

“백가행에 대한 얘기를 듣고 놀라 기절해 실려 갔다던데, 그건 어떻게 된 거야? 그 소문은 진짜야?”

“말이 책임자지 공녀로 바쳐지는 것이나 다름 아니겠어? 가서 무슨 해괴한 짓을 당할지 누가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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