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모두가 말을 잊었다.
그 사이, 영선이 장신구를 가지고 빠르게 다가왔다.
“와! 아가씨께서 흑색을 말씀하실 때는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지금 보니 괜한 염려였나 봐요.”
흑색은 환계에선 상복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보통의 연회에선 누구도 입지 않았다.
그랬기에 얼마나 걱정이 많았던가.
아주 오랜만에 또래들을 마주하는 제 아가씨의 인상에 흠집이 나기라도 할까 봐 염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화의 목에 장신구를 채워 주는 영선의 목소리에도 지극한 탄성이 섞여 있었다.
‘세상에. 검은색이 이렇게 화려해 보일 수도 있나.’
평범한 의상인데도, 아가씨의 미모가 곁들여지니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워 보였다.
역시 제 아가씨의 결정은 어떤 것이든 절대 틀릴 리가 없다.
“시간이 됐어요. 아가씨.”
여러 번 거울을 확인하며 제 모습을 점검한 세화였지만 이런 색상의 옷을 입고 나가다가 아버지를 마주하기라도 한다면 깜짝 놀라실 게 분명했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그녀가 쓰개치마를 어깨에 걸쳐 차림새를 가렸다.
“가자.”
완성도는 몇 번이고 살펴도 부족하지 않았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세세하게 살펴 조금의 흠조차 남기지 않고 모두 수정한 세화가 영선을 필두로 한 배행 시녀들을 이끌고 별채를 나섰다.
그대로 대문을 나서려는데 그녀의 외출 소식을 들은 주명윤이 딸을 보러 나왔다.
“세화야!”
“아버지.”
“연회에 참석한다면서. 지금 가는 길이더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명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조금 더 쉴 것이지, 갑자기 무슨 일로. 몸도 성치 않으면서 어찌 외출을 하려고 해.”
이틀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앓아누웠던 딸이었다.
그런 딸이 쉬지도 못하고 외출을 한다는 말을 들으니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네 몸이 이런데 연주는 대체 어디에 갔고.”
‘이런 중요한 때에 사연주 그 아이는 대체.’
주명윤도 지금까지의 사연주의 행태를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에겐 신경 써야 할, 더 큰 일이 있었을 뿐이다.
자신과 아들들은 전장에 나가야 했고, 부인은 자신 대신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하다가 결국 함께 전장에 나오기까지 했으니 도무지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사연주가 하는 기막힌 짓거리들을 알면서도 눈감아 줬었다.
성인도 아닌 어린 딸이 늘 홀로 저택을 지키는 것이 안쓰러웠고, 딸에게만큼은 헌신적으로 보였으니까.
그러나 이미 세화의 백가행 소식을 알고 있음이 분명한 사연주는 안가에 머물고 있었다.
세화의 아픈 모습도 확인만 한 후 바로 외출해 이제까지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마음대로 저택을 비우고 오늘 홀로 연회에 참석하게까지 하자 실망감이 무겁게 파고들었다.
“아버지, 연주를 너무 탓하지 마세요. 동생에게도 동생의 일이 있을 테니까요. 제 일에만 신경 쓸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네가 아플 땐 옆에 있어 줘야 하는 것 아니냐. 너도 늘 그래 왔잖니.”
“괜찮아요. 늘 이랬어도 전 괜찮았는걸요. 제 곁엔 항상 영선과 영채, 영무가 함께 있었고요.”
‘이런 딱한 것. 그걸 말이라고.’
사연주를 비호하는 딸의 목소리에 주명윤의 눈가가 서글프게 가라앉았다.
“그나저나 백가 가주의 일은 어떻게 결정 났나요? 가주께서는 뭐라고 하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아비가 그에 관해 네게 용서를 구해야 할 일이 있다.”
“용서요? 뭘 말씀이세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주명윤이 잠시 머뭇거렸다.
미안함을 가득 담아 딸의 어깨를 조금 토닥였다.
“아비는 환계로 넘어가 백기하를 만나 볼 생각이다. 신영께서 그를 내게 맡기셨거든. 하여 잠시 환계에 머물러야 할 것 같구나.”
“아버지께 맡기다니. 설마 가주께서는 아무런 지원도 하시지 않는 건가요?”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세화는 단번에 깨우쳤다.
그녀의 눈이 삽시간에 차갑게 식어 내렸다.
‘온 혈족의 공적(公敵)을 내 아버지에게만 맡겨 놓다니.’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딱 좋은 임무를 떠맡긴 것이 아닌가.
실제로 이 기회를 빌려 그와 아버지를 한꺼번에 처리하려 손을 쓸 수도 있고.
‘그 늙은이가 또 내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준비하기라도 하는 건가?’
“아비는 괜찮다. 그를 전장에서 많이 마주쳐 조금 아는 바가 있는데, 괜찮은 이야. 비록 아비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적이 아니었다면 충분히 존경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 이가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구나.”
“우리 혈족들이 일부러 일을 만들 수도 있잖아요. 가만히 있으려는 그를 억지로 들쑤셔서요.”
“…….”
‘게다가 그는 지금 불사가 아니건만 주가의 영지 한복판으로 들어오다니. 누군가 그가 죽을 수 있다는 걸 알아내기라도 한다면…….’
그 가정만으로도 몸속의 피가 완전히 식어 버리는 것 같았다.
“정말로 그가, 호위도 시종도 없이 주가의 영지에 들어오는 건가요?”
“그래. 신영께서 그를 위한 연회도 여신다고 하니. 생각보다 오래 머물지도 모를 듯해 이 아비도 걱정이구나.”
무장의 단단한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랜 전쟁으로 혈육을 잃고 슬퍼하는 이들이 많으니. 네 말마따나 괜한 분란이 야기되기라도 한다면. 하여 간신히 종전한 이 잠깐의 평화가 금세 깨어져 버리는 것은 아닐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나요? 굳이 영지 안에 들일 필요는 없잖아요. 신영도 소가주도 모두 인계에 있으니 여기서 보면 되지, 신영께선 왜 굳이 영지 한복판으로 그를 끌어들이시는 걸까요?”
“나도 인계가 회담에 더 적합할 것 같다, 그렇게 진언 드렸으나 가주께서 결정하신 일을 어찌하겠느냐.”
주명윤은 여기서 잠시 그를 위한 연회에는 너도 참석하라 하셨다고 딸에게 언질을 줄까 하다가 말을 삼켰다.
딸과의 혼사 동맹이 언급되었던 그 백가 가주가 제게 일임된 것도 그렇고.
백가행의 일도 그렇고.
‘가주께서 내 딸을 장기말로 사용하기로 마음먹으신 거라면.’
해서 어떻게든 백가와 엮으려 한다면 아비 된 입장에서 어떻게든 그것을 막아설 수밖에.
이런 일은 굳이 딸에게 알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럼 저는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혹시 저도 함께 가야 하는 거라면 말씀해 주세요.”
“아니다. 신영께서 일을 일임하신 이상 그가 주가 영지로 오면 우리 저택에 머물 듯하구나.”
주명윤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허니 너는 인계에서 내가 소식을 보낼 때까지 넘어오지 말고 기다리거라. 가주의 별실에서 나눴던 대화를 기억하지? 네가 그와 마주쳐서 좋을 것이 없을 듯하구나.”
부녀의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에 대한 예상 대처만이 정답을 모른 채 쌓여 갔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은 일들이었으나 이미 가주의 명이 떨어졌다고 하면 지금 당장은 따르지 않을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아낸 그녀가 애써 차분하게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많이 걱정돼요. 부디 조심하셔야 해요.”
“그래. 아비가 많이 조심하마.”
“단윤 아저씨는요? 아저씨와 같이 계실 거죠?”
“그럼. 그는 이미 이른 아침에 백기하를 맞이하러 문을 넘었다. 함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초소에는 주가 병사들도 가득하니 염려하지 않아도 돼.”
“…….”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너야말로…….”
“…….”
“너야말로…….”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끝말을 반복하던 주명윤은 남은 말들을 그대로 삼켜 버렸다.
그에게 있어 이 딸은 지극히 아픈 손가락이었다.
전쟁터까지 데려가야 했던 두 양아들도 물론 마찬가지였긴 하지만.
이 딸은 처음 몇 년은 여섯 가문의 실종 사건을 조사하느라, 그 이후에는 십 년 넘게 계속된 전쟁을 지휘하느라.
제대로 함께 식사를 하지도, 놀아 주지도, 성장을 지켜봐 주지도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대견한 아이는 얼마나 잘 커 주었는지.
다른 여타 혈족들과 다르게 연회에 빠져 사치를 즐기지도 않았다.
생과 사가 뒤섞인 전장에 나가 있는 가족을 걱정하며 몸가짐을 자중한 채 동무도 없는 집에만 머무르곤 했다.
부인마저 자리를 비우게 된 이후부턴 어린 나이로 하지 않아도 될 여러 집안 대소사를 처리하며 외로이 지내 왔고 말이다.
‘말동무로 데려왔던 방계의 사씨 아이와 비교해도 내 딸이 얼마나 남다른지 모를 수가 없지.’
그런 딸이었다.
그런 딸이었기에 더욱 솔직히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평생을 가주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 와 놓고 이제 와 딸에게 신영을 경계하라고 해야 하는가.’
목숨 바쳐 싸워 온 전공도 무시한 채 가주가 너를 어떤 계획의 도구로 이용하려 하고 있다고. 그가 내리는 명에는 독이 숨어 있을 테니 경계하고 조심하라 일러야만 하는 것인가.
주명윤은 딸에게 다가오는 소가주에 대해서도 경계심이 들었다.
소가주 주경현은 늘 부드럽게 웃고 있어 제 아버지인 신영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 듯 보이긴 했다.
하지만 때때로 표정에 드러나는 이기적인 성격과 높은 자존심, 빙산 같은 냉정함이 주명윤의 마음을 써늘하게 했던 것이다.
그 모든 염려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어떤 말도 더 꺼내지 못한 채 이렇게만 덧붙였다.
“조심하거라.”
딸의 곁을 비우지 않는 것만이 이 아이가 가장 안전해질 수 있는 일일 터.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백가 가주의 일을 처리한 후 얼른 인계로 돌아와야겠다. 내가 곁에 있는 상태에선 가주께서도 섣불리 일을 진행하지 않으시겠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이야 어쨌건 간에 세화는 아버지가 인간계를 떠나 계시는 편이 한결 마음 편했다.
지금부터 그녀가 할 많은 일들을 제 아버지는 몰랐으면 한 것이다.
아버지가 백기하를 만나러 허공문을 넘기 위해 떠나가는 모습을 배웅한 주세화는 곧장 목적지로 출발했다.
“아가씨.”
“응?”
“지켜보던 자에게 서신이 왔는데 사촌 아가씨가 안가를 나와 연회장으로 먼저 출발했다고 하네요.”
“그래?”
“네. 그리고.”
가마 옆에 대기하고 있던 영선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속삭였다.
“그간 사촌 아가씨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던 인간 사내 하나가 어제 두 번이나 변복하고 천민촌까지 나가 약방에서 무언가를 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