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254)

그녀라고 사연주가 저러는 것이 어찌 기꺼울까.

하지만 저 작태를 필두로 방계의 일원들을 끌어낼 수 있다고 하면 나쁜 거래가 아니다.

잠시 생각하던 세화는 다시 붓을 들었다.

빠르게 서신을 한 장 더 추가했다.

그것을 환계로 통하는 문 출입패와 함께 영무에게 건네자 영무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가씨? 이 출입패는 왜……,”

“영무야. 네가 해 줄 것이 있어.”

날카롭고 단단한 세화의 목소리가 울리자 영무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빠르게 세화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영무가 눈을 빛냈다.

“말씀하세요.”

“넌 이대로 호위들과 함께 바로 환계로 돌아가. 이 출입패의 인장을 가지고 가고. 환계에 도착하는 즉시 방계 원로들을 만나 내가 백가에 가게 된 일로 두려워 제정신이 아니라고 전해. 명윤 원로께선 종전의 후처리로 바쁘시고 두 오라비는 아직 국경에서 돌아오지 못한 데다가 장부인까지 저택을 비우셨다고.”

영무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아주 집중해서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특히 명윤 원로께선 여섯 가문에 배상하기로 한 영력을 뽑아내시다가 원신이 상하셨다고. 그래서 사연주 아가씨께서 고민 끝에 원로들의 조언을 요청한다고, 그렇게 전하도록 해.”

이해되지 않는 명이었으나 영무는 이것이 이해가 필요한 일이 아니라 판단했다.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겠습니다.”

“영채야.”

“예, 아가씨.”

“너 역시 영무와 함께 환계로 돌아가. 주가 안에서 물건을 취급하는 모든 상단을 확인하고 남아 있는 환석이 있다면 단 한 개도 남겨 놓지 말고 모두 사들여.”

“예, 아가씨.”

“거래할 때 반드시 신분패를 사용하여 거래 내역을 문서로 남기고, 영력이나 현금으로는 거래하지 마. 이해했어?”

“그러겠습니다.”

“환계로 돌아간 이후엔 너흰 모든 이에게 그 누구보다 열심인 사연주의 충복처럼 보여야 해. 나와 오랫동안 함께한 너희들이니 지금 나의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너희는 이미 알겠지?”

영채와 영무의 목으로 잠시 마른침이 넘어갔다.

잠시 서로를 마주 본 그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세화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숙인 세화가 그녀들과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나는 사연주, 그 아이를 포함한 방계 혈친들을 거의 다 죽여 없앨 생각이야.”

“!!”

살기 어린 그녀의 목소리에, 방 안은 삽시간에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이 계획을 너희가 미쳤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난 반드시 그리할 거고, 그리해야 해. 너희 모두 나를 믿고 따라와 줄 수 있겠어?”

방계 혈족은 한두 명이 아니다.

아가씨가 말하는 ‘다’가 혈친의 어디까지를 포함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으로 잡아도 기백이다.

그들을 거의 다 죽여 없앤다고?

놀랍고 두려운 목표였다.

하지만 어쩐지 망설임은 없었다. 주인이 저런 결심을 했을 땐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세 자매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합니다.”

“맡겨 주십시오.”

“저희의 목숨은 이미 아가씨의 것인걸요.”

“그래. 나의 것이지.”

세화는 그들의 앞으로 다가와 꿇어앉았다.

“그러니 너희는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살아야 해. 알겠어?”

그리고 세 명의 시녀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그 누구를 희생양으로 삼더라도. 비참하게 구정물을 핥아 먹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반드시 살아서 내 곁으로 돌아와. 내게로 돌아만 온다면 어떤 상황에 휘말려 있든 반드시 내가 해결할 테니.”

“……아가씨.”

“내가 너희들을 잃게 하지 마. 내게 너희를 잃는 그 비참함을 결코 알게 하지 마.”

세화가 세 시녀의 어깨를 한 번에 끌어안았다.

믿어지지 않는 기적.

……그가 준 기적.

결코 고마움을 표시할 수 없는 그 대신 세화는 제게 주어진 이 순간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그 어떤 실수도 없이, 제 소중한 이들과 함께하는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이다.

“실수했다 싶은 일이 생기면 빠르게 달아나.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아도 되니까.”

“…예, 아가씨.”

“명심해. 그 어떤 명도 너희의 목숨과 저울질하지 마.”

“예, 그러겠습니다.”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인 영채와 영무가 주인이 건넨 신분패를 들고 호위 일곱과 함께 저택을 떠났다.

환계로 가는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막상 그녀들이 떠나자 세화는 조금 불안해졌다.

일이 잘못될까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안위와 상관없는 일을 시켰음에도 그조차 그녀들에게 위험으로 작용할까 걱정이 된 것이다.

“잘 해낼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 자매 중 가장 말투가 부드러운 영선이 그런 세화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덧붙였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둘 다 반드시 일을 잘 끝내고 무사히 돌아올 것입니다.”

주세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아가씨께선 내일 연회에 가셔야 하는데 제가 배행해야겠네요. 영채가 엄청 기대했던 일이니 이번만큼은 아주 아쉽겠어요.”

저는 좋지만요. 그렇게 말한 영선이 웃으며 서신들을 집어 들었다.

세화의 답장이 적힌 서신들을 지금 곧 전달하겠다며 방을 나가다 말고 물었다.

“한데 내일 입으실 옷은 어떤 색으로 준비하면 좋을까요? 원하시는 색이나 형태가 있으시다면 비슷한 계열로 여러 벌 준비해 놓겠습니다.”

투지를 불태운 영선이 더없이 완벽하게 꾸며진 주인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았다.

제 아가씨에게는 옅은 적산호 빛깔도, 은은한 노란색이나 달콤한 벚꽃색도 잘 어울릴 것이다.

탈피를 치르지 못한 아가씨들에게 늘 선호되는 유백색이나, 우기가 막 지나는 참이니 풋풋한 황록색, 혹은 연청색도 아름다울 테고.

‘아가씨의 첫 번째 사교 활동이신데, 당연히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선 안 돼.’

반드시 완벽하게 아름다운 색상을 찾아야 한다.

의욕이 넘쳐흐르는 영선의 귓가로 세화의 무심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아주 새까만 색이 좋겠어.”

“네?”

“조금의 바램도 없이 새까만 것으로.”

“헉! 안 돼요! 흑색은 상복에만 쓰이는 색인데요. 어찌 상복을 입고 연회에 가려 하세요.”

“하지만 여긴 인간계잖아? 인간계에선 상복에 쓰이는 색깔 아니잖아.”

“그래도요. 인간들이 뭘 입든 무슨 상관이에요. 환계에서 상복에 쓰이는 색이라는 게 중요하죠. 까만색은 절대 안 돼요.”

“이미 결정했어. 아래위 다 검은색이면 좋을 것 같고.”

주세화가 잠시 허공을 보며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단아, 우아, 음전 같은 단어는 가져다 버릴 수 있는, 관능적인 형태가 좋을 것 같은데. 나 그런 게 있던가?”

영선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관, 관능이요?”

* * *

가장 빠른 연회는 바로 다음 날 오후였다.

참석하겠다는 서신을 당일 오전에 전달했음에도 답신이 매우 빠르게 돌아왔다. 기쁨과 환영의 내용이 현란한 수식어와 함께 서신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간 어떤 연회에도 참석한 적 없던 원로의 독녀가 참석 의사를 전해 오다니!

그것만으로도 연회를 준비하는 주최 측에서 제 감격을 그대로 내보인 것이다.

‘또 얼마나 빠르게 주변 혈족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있을까.’

세 자매에게 그들이 소문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 들은 게 어제라 그런지 절로 냉소가 새어 나왔다.

‘내가 거기 간다고 하니 사연주도 많이 놀랐겠지? 원로 가문의 여주인 노릇을 하려 애써 왔는데 내가 참석한다고 하니,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겠지. 소식이 얼마 만에 귀에 들어가려나.’

아마도 의원의 왕진을 받던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비 맞은 개처럼 놀라 뛰어올 것이다.

그 장면을 상상하니 또다시 그녀의 붉은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어쨌거나 첫인상이 강렬해야 하는 법.

조금의 방심도 할 수 없는 세화는 오전 일찍부터 일어나 단장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에는 사치를 피해 검소하게만 지냈던 그녀였지만 이제부터는 아니었다.

‘전쟁을 한다면서 자금을 아끼겠다고 낡고 부실한 무기를 사용해서야 되겠어?’

차라리 아낌없이 돈을 쏟아붓는 편이 초반 기세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고급 향유를 목욕물에 아낌없이 붓고 오래도록 몸을 담가 향을 입혔다.

치장을 도우러 온 시녀 무리가 손톱과 발톱, 피부를 정리할 동안 다른 시녀들은 한 시진이 넘게 머리를 빗어 결을 매끄럽게 만들었다.

각종 분과 진주 가루 등이 그녀의 얼굴을 살포시 덮었다.

매끄럽고 긴 팔과 다리에 윤기가 더해지도록 다시 향유를 바르고 나서야 그녀는 준비된 의복을 걸쳤다.

세화가 원하는 색상의 연회복은 가진 것이 없었기에 본의 아니게 환계의 연회복이 아닌 인간들의 것을 입게 되었으나.

“아!”

한 시녀가 단장을 마친 세화를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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