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254)

* * *

환계엔 인간계로 통하는 문이 여럿 있지만, 생명체를 온전하게 인간계로 보낼 수 있는 것은 주가가 가진 통로 하나뿐이었다.

예전엔 인계로 가는 문을 지키는 초소였으나, 주가가 전쟁에서 패해 영지선이 좁혀든 뒤로는 영지 경계의 초소가 되어 버린.

그 초소에 있는 문 하나뿐.

나머지 통로들은 보통 쓸모없는 취급을 당했다.

하지만 최덕문은 전쟁 중 다른 통로들의 쓰임새를 찾아냈다.

그리하여 추방자의 몸으로, 힘겹게 육가 쪽에 연락을 취한 후, 이렇게 제안한 것이다.

“주가 병사들의 영력이 높다 보니 기감도 뛰어나 번번이 육가 연합군 병사들의 기척을 읽어 낸다지요? 기습이 쉽지 않다고 하던데. 제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란 여섯 가문의 무사들이 가진 영력을 내단의 형태로 토해 내게 하는 것이었다.

영력이 없는 상태로는 주가 병사들에게 접근해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니 몸속의 힘을 구슬의 형태로 바꾸어 외부로 꺼내라고.

그 내단들은 쓸모없다 여겨지는 문들을 통과할 수 있으니 자신이 인간계에서 받아 다음 문까지 옮기겠다고.

그러면 그동안은 주가 병사들의 눈을 피해 전진할 수 있지 않겠냐고.

이 방법은 이번 전쟁에도 사용되었지만, 더 큰 성과를 올린 것은 미래에 벌어질 또 한 번의 전쟁에서였다.

어린 종족들의 실종이 주가의 가주인 신영이 신수가 되고 싶은 욕망으로 인해 벌인 일이라는 것이 밝혀지며 전쟁의 화마가 한 번 더 거세게 불타오른 것이다.

목숨보다 귀중한 영력을 제 몸에서 떼어 놓는다?

이 방법을 환족들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알고 나서도 대단히 꺼렸다.

그랬기에 이전의 전투에서는 혹 최덕문이 내단을 가로챌까 염려하며 말단 무사들만이 그 방법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실종됐던 어린아이들이 주가의 가주에게 영력을 빨린 채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 갔다는 걸 알게 된 뒤, 이들에겐 망설임이 없어졌다.

이후 벌어지는 전투에서는 육가 연합의 거의 모든 이들이 최덕문에게 내단을 맡겼다.

그때 최덕문이 요구한 게 바로 권속 계약이었다.

그 노예 계약을 맺고 있으면 절대 배신할 수 없지 않겠냐며. 그러면 내단을 맡겨도 안심이 되지 않겠냐고.

수명을 떼어다 나눠 주는 일이었으나 여섯 가문에서는 더 많은 힘을 잃어버릴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해야만 했다.

제 영력만 잃기 싫었던 이들은 여럿이 협력하는 형태로 계약하며 최덕문의 목줄을 움켜쥐었다.

그 영력만으로도 최덕문은 제 몸을 괴롭히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최덕문은 그 이후 제 아들의 권속 계약도 요청했으나 그땐 이미 여섯 가문이 주가 가주의 목을 잘라낸 뒤였다. 추방자의 그러한 요구를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마음이 급해진 최덕문은 이번엔 주가에 붙었다.

패전의 책임을 누군가가 져야 한다는 말로 새로 가주에 오른 주경현의 환심을 먼저 샀다.

그리고 아들의 권속 계약을 조건으로 신영이 원하는 이를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그녀, 주세화의 아버지 주명윤이었다.

최덕문은 여섯 가문과 내통했을 때 주고받은 서신을 사용하기로 했다.

주가 가주의 허락 아래, 사촌 동생인 사연주의 도움을 얻어 그녀의 가족을 모두 배신자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 * *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힘주어 움켜쥔 주먹 사이로 손톱이 또다시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왜 이렇게 감정이 잘 조절되지 않는 걸까.’

아마도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제 부모님이 또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 같은 두려움.

또다시 지옥 같던 오 년의 지하 감옥 생활을 반복할 것만 같은 공포 때문에.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들이 그녀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했다.

‘더 침착해야 해. 누구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모두 나보다 더 견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고, 나보다 경험도 많아. 내가 침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걸 명심해.’

그렇게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며 표정을 평온히 관리하던 순간이었다.

피잉-!

핑-!

화살이 쏘아지는 것 같은 어떤 날카로운 파공성이 연이어 들려왔다.

‘뭐지?’

평소라면 흘려듣고 말았을 그 소리가 어쩐지 그녀의 오감을 자극했다.

그것은 눈앞의 중년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긴장한 최덕문이 일어나 커다란 창호 문을 열어 보였다.

세 자매까지 제 아가씨를 따라 밖을 바라보자 최장명의 고개도 바깥으로 향했다.

피잉-!

또다시 소리가 이어졌다.

‘이 소리.’

주세화는 어느 순간 홀린 듯이 문가로 걸어갔다.

“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 위험하실지도 모릅니다.”

이미 모두가 이 소리가 어떠한 영력으로 만들어진 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현상을 불안해하며 측근 시녀들이 그녀를 만류하였으나 주세화는 아랑곳하지않았다.

푸르게 펼쳐진 허공을 가로질러서, 여러 갈래의 붉은 빛줄기가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선을 그리며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저것이 무엇일까 의구심을 가질 때였다.

퍼엉―!

쾅!!!!

날아든 빛줄기들이 시간차를 두고 하나씩 폭발하며 굉음을 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하인들이 소스라치며 일제히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폭발 소리는 여러 차례 계속해서 이어졌다.

놀란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주세화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저 빛줄기를 알고 있었다.

같은 현상을 이전 생에서 본 적이 있었다.

‘반지야. 반지가 갈라졌어.’

“그대를 잃고 싶지 않아.”

‘!’

낮고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오는 듯했다.

절절 끓는 가슴속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뜨거운 열기를 띠고 있던 그 목소리.

“제발 내가 그대를 잃지 않게 해 줘.”

그녀는 이미 마음을 바친 사람이 있었고, 목소리의 주인과는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다른 평행선에 서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그 간곡한 목소리가 때때로 그녀의 마음을 건드렸음에도 응할 수 없었다.

마음의 끌림조차도 오랜 타지 생활로 인한 외로움 때문이라고, 자신에게 주지시키곤 했다.

“손톱만큼만이라도 좋아. 내게 조금만 나눠 주면 좋겠는데. 그대의 영력.”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제법 긴장한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었지.

그리고는 요구하지도 않은 자신의 영력도 내어 주겠다며.

차갑게 돌아서 외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구걸하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뜨거운 입술이, 들어 올려진 그녀의 손등 위에 선명하게 내려앉았었다.

“……!”

그 장면을 기억해 낸 주세화가 번뜩 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맙소사.’

희미하게 주름처럼 남은 선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전혀 알아차릴 수가 없다.

‘왜 이걸 잊고 있었지.’

그의 영력의 흔적이 새겨졌던 이 손등을.

입가가 떨리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그녀는 마른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백, 기하.”

그 이름이 주문인 것처럼, 빛이 모여들었다.

기적처럼 허공을 붉게 물들이던 빛무리들이 허공을 부드럽게 휘저으며 그녀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바람을 타고 노래처럼 날아든 빛은 그녀의 주위에서 별처럼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정돈된 한낮의 방 안에 찬란하고 눈부신 석양이 펼쳐져 장관을 만들었다.

길게 뻗은 노을의 위에 올라선 것처럼 제 주위를 둘러싼 빛무리들을 눈에 담는 동안.

“…….”

그녀의 몸은 마치 벼락에라도 맞은 것처럼 굳어져 있었다.

어째서 바로 떠올리지 못한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당신, 이었어.’

시간을 거슬러 오며 어느새 지워진 손등의 흔적.

신수로 거듭난 환족이 제 모든 것을 걸고 만들 수 있다는 단 한 번의 기적.

그것이 그녀에게 사용된 것이었다.

‘맙소사. 당신이었어.’

신이 아니었다.

신에게 감사를 드렸건만, 이 기회를 그녀에게 돌려준 것은 그녀를 외면했던 신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구애하고, 그녀가 모른 척하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소원을 사용한 신수는 더 이상 온전한 신수가 아니다.

그의 무력은 변함없겠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불로의 몸도 불사의 신체도 가지지 못한 것이다.

“백가의 가주가 이틀 전 오전 영지를 급히 떠났다고…….”

“그가 오늘 영지 경계선의 초소에 나타나 주가의 영지에 방문을 요청했다고 하는구나. 호위도 몸종도 없이 홀로.”

그런 몸으로 그는 적국에 단신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나를 만나러.’

이 빛의 선들은 그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그가 이전에 가르쳐 준 대로.

“나를 기다려 줘.”

‘뭐지. 아, 어떡하지.’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세화는 억지로 그것을 삼켜냈다.

‘하지 마. 내가 싫다고 했잖아. 안 받겠다고, 필요 없다고 했잖아.’

“……아가씨.”

“…….”

“아가씨, 왜 우세요.”

“……아.”

영무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젖어 있었다.

왜 몸이 내도록 좋지 않았던 것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강제로 거대한 영력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손등의 소원을 타고 백기하에게서 넘어온 영력이 그녀의 몸에 자리 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동안 그런 증상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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