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54)

‘내가 담보 없이도 지원을 해 주기에 나를 택했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녀가 제시하는 금액과 구매하고자 하는 물품의 종류를 듣고 보면 그녀의 말은 진실이 아니었다.

“제가, 환석을 취급하기 때문에 오셨군요.”

환석의 가치가 낮아질수록 오히려 많은 양을 구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가치가 없으니 그것을 모아 둔 이가 없는 것이다.

하여 오십만 냥만큼의 환석을 갑작스레 구할 수 있는 것은 최덕문 뿐이었다.

“그 이유도 한몫했지요.”

낮고 단호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제 동요를 감추려 고민하는 척 시선을 내렸다.

‘헌데 이것을 사는 이유가 대체 뭐지?’

가장 비참한 위치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가 저 조그만 계집애의 머릿속조차 읽어 내지 못하다니.

‘혹 저 어린것을 포함해 주명윤 일가가 곧 추방당하기라도 하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주가가 패배했으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니까. 그것이 주가 원로 주명윤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그래서 미리 인계에서의 생활을 염려하던 중 환석의 용도를 발견해 냈다든가.

“걱정하지 않으셔도 인계에 환석을 풀지는 않을 것입니다.”

“!”

고민하는 체하며 입을 다물고 있던 최덕문의 몸이 단번에 굳어졌다.

“대감께서 어떤 방식으로 지금의 부를 쌓은 것인지 이미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다른 용도로 그것이 필요한 것이니.”

“아, 아시고 계셨다고요? 누가 더…… 부친께서도 아십니까? 가, 가주께선, 신영께서도 아십니까?”

“그것은 대감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대감께선 그저 내 제안이 마음에 들면 승낙하면 그뿐입니다. 그러니 이젠 대답을 하세요. 내게 오십만 냥어치의 환석을 내어 줄 것입니까, 말 것입니까. 어떻게 하실 겁니까!”

“!”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시간이 아까운지 여자가 호통을 치듯 대답을 종용했다.

그 어린것의 눈빛과 기백이 최덕문마저 굳어지게 했다.

‘……이 어린것은 아직 탈피도 하지 못한 것이 맞는데, 대체 어떻게 이런 기세를…….’

여러 가지 계산을 복잡하게 끝낸 그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요구하신 만큼 환석을 융통해 드리지요.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최덕문이 덧붙였다.

“……아가씨께서 환석을 가지고 단 한 냥이라도 수익을 내신다면 말씀하신 오백만 냥의 상환을 요청드리겠습니다. 다만 일 년의 기한은 지키지 않으셔도 되니 편하실 때 돌려주십시오.”

최덕문이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 냥의 수익도 내지 못하신다면 제 투자는 실패한 것으로 보고 투자금은 회수치 않겠습니다. 투자처를 제대로 골라내지 못한 제 잘못도 있으니까요.”

상식적으로 영기가 고갈되어 신수가 나오지 않게 된 환계에서, 환석으로 수익을 낼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니 최덕문의 이 말은 돈을 받을 생각이 없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그래. 뭐가 됐든 주가 원로의 혈육과 연을 맺는 데 오십만 냥이면 결코 비싼 금액은 아니니까.’

이 어린것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돌려 말했을 뿐.

그는 이 일을 투자가 아니라 원로와의 연을 사는 자금으로 분류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어린것은 그 말이 제 말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것처럼 쉽게 대답했다.

하도 태연한 어조라 최덕문은 그가 내보인 호의를 눈앞의 어린것이 제대로 이해는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결국 한숨과 함께 계약서가 작성되었다.

서로의 피로 서명을 나눈 뒤, 노행수는 그녀가 지정하는 곳으로 오십만 냥어치의 환석을 가져다주기 위해 인부와 수레가 각각 얼마나 필요할지를 빠르게 계산했다.

“눈에 띄지 않도록 노력해 주세요. 내가 인간계에서의 환석의 효능을 털어놓고 싶어지지 않게.”

“…….”

붓을 움켜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절 협박하시는-.”

“하지만 맡은 역할을 잘 해 준다면, 추가로 아드님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

“그 정도면 충분한 보상이 되겠지요?”

“…….”

언제 미간을 찌푸렸냐는 듯 최덕문이 숨이 막힌 표정으로 굳어졌다.

“왜. 아닌가요?”

“아, 뇨. 아뇨.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상체를 잠시 숙이며 필사적으로 제 흥분을 진정시키는 최덕문의 울대가 위아래로 두어 번 움직였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가씨.”

방금 들은 말은 그의 평정심을 완전히 깨부수고 있었다.

동요를 감추지도 못한 채 저려 오는 손끝을 몇 번 마주 잡아 풀면서 최덕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당연히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제 권속으로 삼으면요.”

“……권속이요.”

“왜요. 그건 싫은가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권속이라는 말에 최덕문의 요동치던 속이 조금 진정됐다.

권속이라니.

그것은 영력을 나누어 받는 것을 대가로 목숨을 바칠 주인을 맞이하는 영원불변의 노예 계약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 환계의 누가 권속 계약을 맺겠어.’

환계에 온갖 신수들이 새로 태어나던 시절에는 권속 계약이 성행했다.

영력이 없는 것들은 방대한 영력을 지닌 신수에게서 힘을 넘겨받아 저 역시 영수나 신수로 거듭날 기회를 노렸다.

신수들 또한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은 영력을 나눠 제 무리를 만듦으로써 많은 신수들 속에서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신수가 태어나지 않게 된 것과 같은 이유로, 대기 중의 영력이 고갈되어 가는 환계에선 더 이상 아무도 제 힘을 다른 이와 나누려 하지 않았다.

환족들은 지닌 영력에 따라 수명이 정해졌다.

힘이 곧 생명인데 제 목숨을 누구와 나누려 하겠는가.

‘헌데 이 어린것에게 내 아들을 권속으로 삼을 만한 영력이 있다고? 지금도 저리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데?’

어떤 이유로건 환족은 환계를 떠나서는 오래 살 수 없다.

최덕문도 그러했다. 인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속의 혈맥이 뒤엉키며 수명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괜찮았다. 영수인 만큼 오래 살았으니.

‘허나 내 아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환계의 어중이떠중이 잡종들도 탈피는 하는데.

탈피조차 하지 못한 그의 아들은 영원히 영수가 되지 못한 채로 살다가 인간들만큼의 수명도 누리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러니 사실 그에겐 선택권이 없는 문제이긴 했다.

권속으로 삼아 주겠다는 말은 영력을 나눠 주겠다는 말이었으니까.

‘힘을 나눠 준다는 환족을 만난 것만으로도 감읍할 일이긴 하지. ……물론 정말로 권속 계약을 맺어 줄 때의 얘기지만.’

“계약서를 남겨도 되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만 대감께서 준비하는 환석의 질을 확인한 후에 결정해야겠는데요.”

“권속 계약을 맺어 주신다는 약조만 확실히 남겨 주신다면 그건 걱정하시지 마십시오. 제 성심을 다할 것은 물론이고, 그 이외에도 시키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상환 같은 것도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될뿐더러 오십만 냥이 아니라 오백만 냥어치의 환석도 구해 드릴 수 있고요. ……허나.”

최덕문이 눈을 부릅뜨며 위협하듯 말했다.

“제 아들을 반드시 권속으로 삼아 주셔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아시겠습니까?”

최덕문의 말을 들은 세화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반드시 권속으로 삼아 줘야 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람?’

당연하지 않은가.

‘당신의 아들은 당신이 내게 완벽히 복종하게 할 중요한 목줄이 되어 줄 예정인데.’

소중한 아들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는 게 아니고서야 당신 같은 배신자를 어떻게 믿고 일을 맡길까.

“죽여라!”

“가문의 반역자를 참수하라! 참수하라!”

문득 환청처럼 아찔한 소리가 들려와 그녀의 손이 굳어졌다.

“참수하라! 참수하라!”

내려놓았던 손을 거둬들여 무릎 위에서 맞잡았다.

몸이 떨렸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집행관의 발에 걷어차여 굴러떨어지던 어머니의 머리가 그녀의 눈앞에 다시금 선명히 들어차는 듯했다.

그 장면이 떠오르자 주세화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절대로.’

“그냥 죽어. 이제 그만 내게 모두 주고 떠나. 좋은 곳으로 가라고.”

‘…절대로 그 일을 되풀이할 순 없어.’

그녀는 몸을 웅크리며 분노와 증오를 참아 냈다.

최덕문은 이전 생에서 주가가 패배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자였다.

“이번 전쟁에서 백가는 인간계와 연결된 통로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저희를 기습하고 타격을 입히지 않았습니까.”

“생명체가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우리 주가의 손에만 있는 것을. 내통자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들이 어떻게 통로를 사용해 우리 군을 급습한 걸까요?”

“저는 그것이 계속 궁금하였습니다.”

답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가주에게 의문인 척 꺼내 놓았던 말의 정답이 이것이었다.

육가 연합의 무사들은 통로를 통해 인계와 환계를 오가며 주가군을 공격한 것이 아니었다.

영력을 꺼내면 기척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영력만을 꺼내어 옮긴 것이다.

눈앞에 앉은 배신자는 인간계를 통해서라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영력을 옮길 수 있다는 걸 제일 먼저 알아낸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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