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254)

귀를 의심하며 이름을 세 번이나 되묻고 나서야 달려 내려올 수 있었다.

그랬기에 쓰개치마를 벗어 내린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이후, 기실 그는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할 만큼 흥분한 상태였다.

침착을 가장하고는 있었으나 손안엔 땀이 흥건했고 얼굴엔 홧홧하리만큼 열이 올랐다.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 보였다.

‘거기다 어쩐지, 마치 그때와 외모만 같은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뭔가가 다르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는 잠시 당황했다.

‘그때의 상황이 너무나 강렬해 내가 과거를 조금 왜곡해서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분명 이런 느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조금 더 천진하고 부드러웠던 기억이-.’

완연히 달라진 분위기에 최장명이 계속해서 그녀를 곁눈질하던 그때였다.

세화가 일순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잠시 비틀거렸다.

그들의 뒤를 따르던 세 자매가 재빨리 제 아가씨를 부축했다.

‘뭐지? 혹시 무슨 병을 앓기라도 한 건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던 최장명이 머쓱하게 손을 거뒀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주세화 역시도 제 상태에 대단히 당황했다.

‘내가 왜 이러지? 갑자기 크게 앓은 것 하며 지금도 몸이 이렇게나 좋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대체 왜 이렇게 체온이 원래 대로 돌아오지 않는 거지?’

팔과 다리의 근육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한눈에도 정상적인 상태라 볼 수가 없었다.

이런 꼴로 거래 상대를 만나려 하다니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으나.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 오늘 그냥 강행해야 해.’

가주가 그녀에게 준 한 달이란 시간을 그녀는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문 그녀가 세 자매의 부축을 밀어냈다. 오연하게 다시 허리를 세우며 제 표정을 관리했다.

“이곳입니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최장명의 안내를 받아 별채로 들어서자 풍채가 좋은 중년 남자가 뒷짐을 진 채 창가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앉으시지요.”

최덕문은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주세화는 그의 몸을 감싼 짙고 어지러운 기운을 놓치지 않았다.

주세화는 당연한 듯 최덕문이 내어 준 상석에 앉았다.

최장명은 먼 벽 앞에 서 있었고 세 자매는 주세화가 앉은 자리 옆에 시립했다.

노(老)대감이 주세화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명윤 원로님의 여식께서 어찌 저를 만나러 오셨습니까.”

최덕문의 날카로운 눈이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살피고 있었다.

‘아직 탈피도 하지 않은 어린것이 아닌가.’

핵심 원로의 여식이라고는 해도 피도 섞이지 않은 두 오빠에 비해 조금의 명성도 가지지 못했다지.

‘거기다가 저 땀과 안색은.’

그들 종족은 영력을 훼손당한 것이 아닌 이상 웬만해서는 체력적으로 흔들리지 않았다.

하나 어린것의 이마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팔과 다리 역시 조금씩 경련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가지고 태어난 일신의 힘 자체가 그리 대수롭지 않아 보이기도 했고.

‘반편이인가.’

종종 태어나곤 하던 능력없는 환족을 떠올리며 최덕문이 그리 평가하고 있을 때였다.

“반갑습니다, 대감.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투자를 하면서, 나 역시 투자를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낮고 단호하며 위엄 있는 목소리가 날아왔다.

짙은 칠흑의 눈동자가 어느새 최덕문을 직시하고 있었다.

‘……뭐, 뭐지?’

수없이 많은 사람을 상대하고 이끌어 온 최덕문조차 일순 몸을 움찔할 정도로 형형한 기세가 그 안에 있었다.

그녀를 얕보고 있다가 제법 놀란 최덕문은 제 속마음을 애써 감추며 되물었다.

“말씀 놓으시지요, 아가씨. 저는 환계에서 쫓겨난 몸입니다.”

“그건 차후 결정하겠어요. 그런 일엔 신경 쓸 필요 없이, 대감께선 내 요구를 듣고 가부를 결정하시면 됩니다.”

“말씀하십시오. 투자란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사업 자금을 융통해 주신다지요.”

“……네. 그런 일을 종종 하고 있습니다.”

“나도 내 사업에 대한 투자를 받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대감께서 내게 오십만 냥을 융통해 준다면 일 년 후 오백만 냥으로 돌려드리겠어요.”

‘뭐라고?’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하였으나 내용은 몹시도 비정상적이었다.

‘일 년 만에 열 배로 돌려주겠다니. 이 반편이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저 오십만 냥이라는 금액도 굉장히 미묘했다.

환계는 영력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곳이었다.

화폐가 있었으나 그리 중요치는 않아, 그녀가 부른 오십만 냥 정도는 사업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조차 애매한 금액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가장 위치가 높은 주가 원로의 혈족이 아닌가.

‘이 정도의 금액은 자기 가문 내에서 쉽게 가져다 쓸 수 있을 텐데. 어찌 일면식도 없는 날 찾아와 융통 받으려 하는 거지?’

허나 무시하고 대충 달래서 돌려보내기에는 그녀의 신분이 걸렸다.

그녀의 태도가 그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일 년 사이, 오백만 냥으로 돌려주시겠다고요.”

말도 안 되게 허황된 금액이다.

이 어린것이 말하는 오백만 냥이라는 금액이 허황되다는 말은 아니었다.

비록 추방당했으나 최덕문은 환계와의 연결고리를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그래서 대강의 소식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가장 최근에 들었던 것은 연합한 여섯 가문에 의해 주가가 비참하게 물러나야 했다는 것이었다.

굴욕적인 패전 후, 여섯 가문이 전쟁 배상을 요구하며 막대한 영력을 내놓으라 했다는데.

그래서 주가의 핵심 일원들의 영력까지 쥐어짜내야 했었다고.

‘정세가 그리 불안정한 주가의 권역에서, 그 어떤 짓으로도 열 배나 되는 수익을 일 년 만에 올릴 수는 없어.’

“그래요. 내 신분이 충분히 담보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맞습니다. 신분은 담보가 될 수 있지요. 헌데 어찌하여 원로님께 지원받지 않으시고 절 찾아오셨습니까?”

“여기 오는 이들은 모두 대감께 그런 얘기를 시시콜콜 고한 후에야 융통을 받을 수 있었나요?”

최덕문의 질문에 주세화의 날카로운 눈매 사이로 짧은 순간 살의가 들어찼다.

내가 왜 당신을 찾아왔냐니.

‘그야 네가 추방당한 고향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파렴치한에 우리 가족을 그리 만든 배신자 중 한 명이니까.’

“대감. 난 대감께 내 사생활과 계획을 낭독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그저 대감께서 대가 없이 돈을 융통해 준다고 들었기 때문이에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그녀가 대수롭지 않은 듯 제 말의 속도를 조절했다.

“나 역시 다른 이들처럼 잠시간의 지원을 요청하려는 것이고 대감께선 그를 수락할 수도, 거절할 수도 있겠죠. 만약 거절할 거라면 더 이상 시간 뺏지 말고 지금 대답하세요. 나는 곧장 다른 이를 만나러 갈 테니까.”

“그러면 무슨 일을 하시려는 건지는 혹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내게 필요한 물품을 대감께 몇 개 살 예정이에요. 산 김에 팔기도 하고요.”

최덕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게서 뭘 산다고? 대체 뭘?’

“뭐가 필요하십니까. 제가 취급하는 품목이 제법 많습니다.”

“환석이요.”

“……환석.”

“그래요, 환석.”

‘환석을 오십만 냥어치나 사겠다고?’

환석이란 영수가 신수로 거듭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허나 천 년이 넘도록 환계에는 신수가 된 이가 없었다.

예전에는 금처럼 귀했던 환석들도 이제는 쓸모없는 돌덩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 것을 이 어린것이 오십만 냥어치나 사겠다니.’

혹시 뭘 알고 지껄이고 있는 건가.

긴장한 최덕문의 입매가 굳어졌다.

사실 최덕문은 그런 환석을 있는 대로 긁어모으고 있었다.

추방당했기에 알아차린 것이지만 인간계에서 환석은 병을 낫게 하고 몸을 회복시키는 특별한 효과를 보여 주었다.

그가 쌓은 이 모든 부 역시도 인간들에게 비밀리에 환석을 팔아 얻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환석의 쓸모만은 다른 환족들이 알지 못하도록 감출 필요가 있었다.

추방당한 종족들에게 대가 없이 돈을 융통해 주며 돕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동정심도, 자비심 때문도 아니고. 그저 다른 추방자들이 돈을 벌 별다른 궁리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의 밥줄을 나누어 가지게 되면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을 이 어린것이 알 리가 없는데.’

최덕문이 표정을 완벽하게 갈무리한 작은 계집을 응시했다.

인간계에서의 환석의 용도를 알 리 없고, 아직 탈피도 하지 않은. 곱게만 자랐을 귀한 계급의 아가씨.

‘하지만 이 위엄과 위압감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이지.’

노행수는 어린것의 의중을 파악하려 고군분투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만 그 속내 중 하나만큼은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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