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254)

* * *

“아가씨, 괜찮으시겠어요? 지금이라도 사람을 보내 가마를 부를까요?”

“아냐, 괜찮아.”

창백한 안색으로 걷고 있던 세화가 손을 내저었다.

도성을 이렇게 가로질러 본 적은 없다 보니 크기를 미처 가늠하지 못했다.

도성 안은 구역이 철저히 나뉘어 있었고, 커다란 저택이 있는 곳은 거기서 거기 수준으로 서로들 가깝게 붙어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찾아가려는 곳이 그리 멀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데 이상하네. 대체 내 몸 상태가 왜 이런 거지. 이렇게 아파 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는데.’

몸 상태가 좋지 않다 보니 더욱 힘들게 느껴지는 듯했다.

식은땀이 배어난 얼굴을 하고, 그녀가 한참 만에 도착한 곳은 한 대궐 같은 저택이었다.

입구로 걸어가려는데 문득 다리가 휘청였다.

이를 악문 그녀가 쓰개치마 아래로 제 두 뺨을 찰싹 내리쳤다.

“아가씨!”

최대한 나약한 상태를 감추고 싶었기에 시야를 다잡으려는 의도였다.

어지러움을 털어 낸 그녀가 다시 한번 저택의 대문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갔다.

“……뉘십니까?”

“최덕문 대감을 뵙고 싶어 왔으니 가서 고하게.”

갑자기 나타난 규수의 뜬금없는 말에 대문을 열었던 하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주가 원로 주명윤의 여식 주세화라고 말씀드리면 아실 걸세. 가서 대감께 고하게.”

“…….”

‘가마도 없이 이러고 와 놓고 대감께 고하라고? 누구 호통 맞게 할 일 있나.’

최덕문은 비록 상인이었으나 가진 재산과 혜안으로 도성 안에서 위세가 대단한 인물이었다.

하여 종종 곤궁한 양반들이 친척인 양 찾아와 대감을 뵙고자 했다.

하지만 그런 말에 속아 순순히 안에 고했다가 불벼락이 떨어졌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함부로 내치기엔 걸친 의복이 귀해 보이기도 하고.’

어려 보이는 여자의 고압적인 태도가 고까우면서도 함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뭐, 일단 내 책임만 아니면 되니 다음에 다시 오라 하면 되겠지.’

하인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시선을 내리까는 것으로 감추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대감께선 출타 중이십니다.”

“계실 텐데.”

“네?”

“지금 여기 계신다고.”

“…….”

“내가 여기서 직접 대감을 외쳐 불러야 가서 고할 텐가!”

대화가 길어져 몸의 피로도가 올라갈 것 같자 세화가 한숨과 함께 제 기운을 끌어올렸다.

아무리 탈피하지 못한 어린 나이지만 환족, 그것도 지배자 일족의 기운은 인간이 감히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세화의 동공이 세로로 갈라지던 순간, 하인은 제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 모습으로 벌벌 떨며 냉큼 기별하고 오겠다 달려갔다.

얼마 되지 않아 안으로 들어갔던 하인이 급히 뛰어왔다.

“죄송합니다, 아씨.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녀의 기운도 기운이지만 주인에게 듣게 된 답변이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던지, 하인의 태도는 월등히 공손해져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안쪽으로 안내하는 그를 따라 대문을 넘으며 마당을 가로질렀다.

남빛 도포를 우아하게 걸친 젊은 남자가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부드러운 인상을 하고 곧장 다가온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저를 바라보는 세화를 단번에 눈에 담았다.

“빠르게 안으로 모시지 못해 송구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세화는 이 젊은 남자에게서 일족의 기운이 약하게 느껴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들인가. 나보다 나이는 많지만 역시 탈피는 하지 못한 것 같네.’

어린 종족들의 탈피는 환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고향에서 추방당한 최덕문의 아들이라 하면 탈피를 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를 안내하는 젊은 남자, 최장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역시 그녀를 곁눈으로 눈에 담았다.

‘맙소사. 정말 그녀야!’

최장명은 이미 오래전, 성인식도 치르지 못한 이 여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건 그가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때때로 제 몸에 비늘이 돋아난다는 사실을 겁내고 있었다.

비늘이 돋을 때면 사지가 산산이 갈라지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덮쳐들었던 것이다.

“아버지, 아파요. 너무 아파요.”

그때마다 엉엉 울며 저를 간호해 주는 아버지께 매달렸다.

하지만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 주시는 아버지도 그때만큼은 의원조차 부를 필요가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젓기만 했다.

“강해져야 한다. 평생에 걸쳐 찾아올 고통이니 버텨 내야 해! 견뎌 내려무나.”

그때는 그 말이 원망스러웠지만 자라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탈피만이 이 고통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허나 추방당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는 탈피를 기대할 수조차 없었다.

대신 아버지는 때때로 환계로 통하는 문이라며 일그러진 허공 앞으로 그를 데려가 주곤 했다.

그 근처는 항상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기에, 아버지는 늘 두툼한 전낭을 그들에게 여러 개씩 쥐여 주었다.

그러고 나면 경비병들은 그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여기 들어가면 말씀하신 그 환계가 나오는 건가요?”

“그래. 하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쫓겨날 때 근원이 파괴되었으니 헛된 기대로 이곳에 들어가진 말아라. 영력이 없는 상태에선 문을 통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타 버려 한 줌 재로 변할 터이니.”

“아버지도 돌아가고 싶으세요?”

“…….”

제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 일렁이는 허공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가 짓는 표정에서 최장명은 이미 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그 이후 최장명은 걸핏하면 이곳으로 왔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경비병들에게 전낭을 두둑이 쥐여 주었다.

이곳에 온다 한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으니 헛돈을 쓰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오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때때로 찾아오는 통증은 그의 성장과 함께 더욱 지독해졌다. 견디기 힘든 그 시간이 점점 더 두려워졌던 그는 허공문 앞으로 찾아와 저것을 넘을 방법이 없을까 날이면 날마다 궁리해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소녀를 만났던 것 역시 그런 어느 밤이었다.

만월이 하늘 가득 빛을 뿌리고 있었고, 그에게 전낭을 받은 경비병들은 잠시 자리를 떴다.

평소라면 이미 그를 데려가기 위해 찾아왔을 아버지가 어쩐 일인지 늦도록 오지 않던 그런 밤.

또 언제 고통이 찾아올지 몰라 두려워하다 잠이 들었던 그의 움츠린 어깨를, 어떤 작은 손이 건드렸다.

눈을 떠보니 그의 눈앞에 하얗고 깨끗한 야장의(夜長衣)를 걸친 작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너도 우리 일족이네. 그런데 왜 이런 데서 울고 있어?”

사슴 같은 눈망울을 크게 뜨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는 너무나 귀여웠다.

최장명은 울던 것도 잊고 멍하니 그 여자아이를 바라봤다.

“왜 울었어?”

아이가 구슬이 굴러가기라도 하는 듯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파서.”

“어디가 아픈데?”

“다 아파. 몸이 다 아파.”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쩐지 잔뜩 서러워졌다.

그는 이 아이가 제 몸집보다 작다는 사실도 잊고 이르듯 털어놓았다.

“가엾어라.”

아이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이내 최장명의 이마를 살살 매만졌다.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작은 손에서부터 무언가가 그의 이마로 흘러 들어왔다.

제 몸이 무게를 잊어버리고 떠오르는 것만 같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 최장명을 덮쳐들었다.

“세화야, 어디 있니! 주세화!”

문득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앗. 나 가야 해.”

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조금 덜 아플 거야. 다음에 또 봐.”

그녀는 그렇게 인사하고는 일그러진 허공문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버지, 저 여기 있어요!”

그녀가 사라지고 나자 더 이상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언제 누군가가 있었냐는 듯 사방이 고요해졌다.

허나 최장명은 환상 같던 그 밤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밤 이후 더 이상 온 사지를 찢어 놓는 듯하던 고통이 찾아오지 않게 된 것이다.

밤하늘을 환히 밝히던 만월의 빛 아래에서 그 달빛보다 더 하얗게 빛나던 소녀.

그 소녀가 최장명의 첫 연정이었다.

아마도 영력이 충분한 누군가가 널 도왔던 모양이라며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도 크게 기뻐하셨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그건, 아마 안 될 거다. 아이의 몸으로도 네 고통을 바로잡을 정도의 영력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귀한 신분일 테니.”

“…….”

“그런 아이는 환계를 잘 떠나지 않는단다.”

“그래도.”

“응?”

“그래도 기다려 볼래요.”

“무얼?”

언젠가 그 아이가 한 번 더 이곳으로 오든.

‘언젠가 내가 저 문을 넘어 그 아이를 만나러 갈 방법을 찾든.’

“뭐든지요.”

다시 한번 그 아이를 만난다는 것은 그렇게 최장명의 오랜 꿈이 되었다.

한데 하인이 믿지 못할 이름을 꺼내 든 것이다.

“세화야, 어디 있니! 주세화!”

주명윤의 딸 주세화라는 분이 대감을 찾아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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