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영선이 오늘따라 이상한 그녀를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오늘 사영선은 기절했다 깨어난 사연주의 표정이 얼마나 표독스럽게 변하는지를 보았다.
손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뿌득뿌득 이를 갈던 얼굴은 사연주가 보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껜 저희가 있잖아요!”
영선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영채와 영무도 거들었다.
“맞아요! 무슨 일이 있을 것 같거들랑 저희만 믿으세요. 뭘 시키시든 확실하게 처리할게요.”
“뭘 하면 좋을까요. 원하신다면 저 사촌 아가씨의 머리끄덩이라도 잡겠습니다.”
‘대체 저 사촌 아가씨가 우리 아가씨한테 뭘 한 거지?’
그렇지 않아도 자신들의 아가씨가 저 사촌을 동생이라며 싸고도는 게 마음에 들지 않긴 했었다.
말투와 행동,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사근사근하긴 하지만 지켜보고 있자면 알 수 없는 써늘함이 밀려오는 느낌이랄까.
출입하면 안 되는 곳에 출입하는 등, 몇 가지 일이 있었을 때도 아가씨는 동무들의 말을 거절하지 못해 함께 갔을 거라며 두둔했지만.
‘오늘 달라진 모습을 보면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말이야.’
공통된 생각인지 세 자매의 시선이 서로 비슷했다.
웅변과도 같은 그녀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주세화도 조금 웃었다.
“내가 이틀이나 잤다며?”
“네, 아가씨. 시장하실 텐데 요깃거리를 준비할까요?”
“아니야. 외출할 거니까 준비해.”
“예? 나가신다고요?”
얼핏 보기에도 오늘 제 아가씨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가신다니.’
영선이 깜짝 놀라 제 아가씨를 만류했다.
“아가씨. 이틀이나 정신을 잃고 앓으셨어요. 오늘은-.”
“아냐. 반드시 오늘 나가 봐야 해. 소셋물과 갈아입을 옷을 좀 가져와.”
“그래도 너무 걱정되는데. 오늘 하루만 더 쉬시고 내일 가시는 건 어떠세요. 급한 일이시면 저희에게 시키셔도,”
“영선아.”
“네, 아가씨.”
“내겐 시간이 없어. 반드시 지금 가 봐야 하니 걱정되면 너희들이 따라와. 내가 쓰러지지 않게 도와.”
“…….”
“어서. 의복을 가져와. 머리도 다시 빗어야겠어.”
평소라면 세 자매가 걱정하고 신경 쓸 거라는 걸 알고 한 번 더 생각해 보실 아가씨였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바늘 하나 들어갈 구멍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체 자신의 아가씨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백가로 가는 일은 물론 영선도 걱정이었다.
하나 지금 제 아가씨의 모습을 달라지게 한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투명하도록 맑았던 눈동자가 지금은 어떤 불신과 고통으로 얼룩져 보였다.
‘분명 뭔가 있어. 그게 아니라면 지금껏 사촌 아가씨의 만행을 다 이해하고 넘어가시던 아가씨가 이렇게까지 하실 리가 없어.’
아가씨를 가장 측근에서 모시고 있었건만. 그런 아가씨가 이렇듯 무언가에 마음을 다치실 때까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이건 모두 아가씨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우리 잘못이야.’
만류해선 안 될 것이다.
영선이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 자매들과 아가씨의 외출 준비를 도왔다.
* * *
대문을 나서자 뜨거운 태양이 세화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이런. 너무 눈부시지 않아?”
누군가의 목소리가 익숙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커다란 손이 눈 위로 펼쳐지는 것만 같은 환상.
그녀가 비스듬히 시선을 올렸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남자가 그녀를 다정하게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꾸 왜 이러지. 꿈에서도 이 남자를 보지 않나. 쓸데없이 이런 환영은 대체 왜…….’
“……가씨.”
“내가 가려 줄 테니 옆에 있어.”
또 멋대로 그런 말을 하며 제 옆에 붙어 있으라고 종용할 것 같았다.
“아가씨!”
어깨를 잡는 손길에 깜짝 놀란 세화가 몸을 돌렸다.
영선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여전히 몸이 좋지 않으신 것 아닌가요? 가마라도 준비할까요?”
귀를 울리는 목소리도, 키가 큰 남자의 환영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당황한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럴 거면 오히려 사내 복식을 하고 말을 타자고 했겠지.”
쓰개치마를 눈썹 끝까지 눌러쓰고 햇살 가득한 거리 위로 먼저 걸음을 내디뎠다.
“거창하게 갈 필요 없으니 이대로 걷자꾸나.”
처형장으로 끌려 나오기 전까지, 그녀는 밀실 감옥에 갇혀 있었다.
끔찍한 고문으로 인해 정신이 없었기에, 시간을 제대로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한데 붉게 일렁이는 횃불의 음산함과는 전혀 다른, 이런 밝은 태양빛 아래로 다시 나가게 되다니.
“…….”
그녀는 잠시 말을 잊은 채 거리를 둘러보았다.
하늘은 마냥 푸르렀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엿보였다.
환한 햇살이 제가 걷는 길 앞을 그늘 한 점 없이 밝히고 있었다.
안온하고 평화로운 그 광경이 믿어지지 않아 세화의 눈시울이 조금 젖어 들었다.
‘이게 말이 되나? 이렇게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다니.’
이런 건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세 자매를 이끈 그녀가 따사로운 길의 한중간을 밟으며 걸었다.
그녀가 입술을 꾹 물었다. 눈을 적신 것이 볼을 타고 조금 흘렀다.
시간이 되돌아왔다.
시간이, 되돌아왔다.
* * *
가을이 머지않은 강변엔 마른 바람이 거세었다.
곧 건기가 가까워져 오기 때문일까. 온 평원 위에 뜨끈한 열기가 가득했다.
한때 백가가 가장 열망했던 평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백기하의 두 눈은 주변 경관을 조금도 품고 있지 않았다.
푸르르-.
거대한 전마가 투레질을 하며 무른 흙 위에 거칠게 발자국을 찍었다.
그랬다. 이 환계 중강의 강변에서는 지금 기묘한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한시가 급한 때인데 여기서 발이 묶이다니.’
인계로 가는 통로가 코앞이건만.
강제로 멈춰 서야 했던 백기하가 차가운 얼굴로 나직이 호흡을 뱉었다.
‘혼인식이 언제 거행되었는지를 모르는데. 설마 벌써 인간계를 떠나 주가로 돌아간 건 아니겠지?’
그의 마음이 불편해질수록 그를 태운 전마 역시 불안하게 움직였다.
전마의 거친 발길질이 반복적으로 땅을 찼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는 것으로 제 초조함을 드러낸 백기하가 결국 참지 못하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전마를 그대로 기다리게 한 채 통로를 지키는 주가의 초소를 향해 걸어갔다.
“부탁이 있는데, 서신을 적고 싶으니 활과 지필을 내어 줄 수 있겠는가?”
“……활, 말씀입니까?”
초소병들은 이미 그를 향해 활을 조준한 채였다.
하지만 그는 신수가 아닌가.
그건 어떤 무력도, 무기도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었기에 활을 쏜다 해도 명중하리라는 기대는 전혀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뭐라도 들지 않을 수 없었건만.
‘그런 우리에게 이것마저 내놓으라고? 맹수 앞에서 맨몸으로 버텨 보라 이건가?’
서신을 적는다고 하니 지필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활은 왜?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요구에 초소장이 초소 벽 위에서 바짝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송구하오나 사안이 사안인지라, 가문에서 명령서가 도착할 때까지 어떤 행동도 함부로 할 수 없음을 부디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지필과 활 정도는 괜찮지 않나.”
“그렇다면 가주, 지필 외에 활은 어째서 필요하신지요?”
백기하는 그제야 제가 마음이 급해 활이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잠시 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바람을 다스리는 백가의 특성상 활은 가장 뛰어난 무력을 보일 수 있는 무기이건만.
‘……아.’
그가 제법 머쓱하게 마른 목을 문질렀다.
조준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전혀 위기감이 없었기에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수가 된 그에겐 힘의 제약이 없었다.
발에 채는 작은 돌멩이마저 살인 무기로 이용할 수 있는 영력이 몸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니.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무기로 만들 수 있는 그에게 딱히 활이 유별나게 무기로 생각되진 않을 수밖에.
‘아무리 급해도 활은 미리 챙겨 왔어야지. 이런 등신을 보았나.’
그는 잠시 제가 끼고 있는 반지를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빼 들었다.
‘빌려주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럼 어떡한다.’
망설이던 백기하가 나름 예의를 갖춰 초소 벽 위로 먼저 통보했다.
“그냥은 내어 주지 않을 것 같으니 그럼 잠시 실례하겠다.”
“?”
병사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한 건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그가 거대한 초소 벽을 밟고 그대로 뛰어올랐다.
사색이 된 병사들의 앞에 사뿐히 내려앉은 건 눈 깜빡할 사이였다.
“백가주!”
많은 움직임도 필요치 않았다.
그의 팔이 물 흐르듯 잠시 흔들렸을 뿐이건만 가장 가까이에 있던 무사 하나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물론 무사의 손에 들려 있던 활 역시 백기하의 손으로 넘어간 후였다.
백기하는 겁에 질려 제게 활을 겨누는 이들의 모습은 아랑곳없이 높은 성벽 위에 그대로 섰다.
머리카락을 이용해 살 끝에 영력을 담은 반지를 끼워 넣고 고정했다. 그런 뒤 화살 끝을 어딘가를 향해 단단히 조준했다.
자세가 완벽한 백기하의 몸이 창처럼 곧게 멈춰 섰다.
‘나 대신 네가 먼저 달려가라.’
“부디 내가 늦지 않았기를.”
한계까지 시위를 당기는 힘에, 그의 근육이 팽팽히 부풀어 올랐다.
간절한 기도를 담아 그가 활시위를 놓았다.
핑―!
시위가 튕겨지는 소리는 가벼웠으나 그 안에 담긴 힘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영력을 담은 화살이 일그러진 허공의 문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갔다.
그녀가 있는, 인간계로 가는 통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