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54)

여섯 가문은 종전선언문과 협의서를 주가 권역의 한복판에서 공표했다.

주가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명백하게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하는 영력의 양과 실종 사건의 책임자라는 명목으로 백가에 가게 될 인질에 대한 이야기가 한동안 온 주가 사람들에게 퍼지며 떠들썩해졌다.

저 사촌 언니의 몸속에 흐르는 신영과 가장 가깝다는 피가 내 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저 피를 타고났다면.

하루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사연주는 피의 정통성에 대해 세화의 생각보다 더 집착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세화 역시 저 인질의 조건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던 것이다.

선선대 신영에게서 갈라져 나온 주가 핵심 원로의 여식이라면 소가주를 대신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하여 흥분한 사연주는 일부러 모임에서 흘리듯 제 사촌 언니를 언급했었다.

“소가주님 다음으로 가장 피가 진한 어린 혈족은 저희 언니뿐인데, 언니가 대신 가게 되면 어떡하죠?”

아주 걱정하는 말투로.

“혹시 언니가 소가주님과 혼약이라도 하게 된다면 더더욱 백가의 요구에 합당한 정통성의 소유자가 되어 버리는데. 그러다 정말 백가에 가게 되실까 봐 너무 염려스러워요.”

“아, 물론 소가주님을 대신해 희생하는 건 주가 혈족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의무이지만 언니는 너무 약하고 여린 분이라서요. 제가 대신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전 자격이 되지 않으니 한스러울 뿐이네요.”

‘물론 내가 그리 말을 하긴 했지만. 그 뒤로는 너도나도 그 일을 떠들어 대고 있는 상황인데, 누군가 출처를 정확히 지목했다는 게 말이 돼? 그럴 리 없어. 분명 너무 직접적이지 않게, 얘기를 잘했는데.’

사연주는 얼굴을 적시며 다급히 부정했다.

“나에 대한 그런 오해가 있었던 거야? 하지만 정말 오해야!”

“맞아. 머리가 식으니 오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뭐야. 백가로 가야 하는 일이 너무나 두렵고 청천벽력 같아서 잠시 내가 어떻게 됐었나 봐. 많이 아팠어? 정말 미안해.”

‘뭐라고? 많이 아팠냐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언니, 이건 그런 말로 수습될 수 있는 일이-.”

“하지만 난 힘든 상황이었잖아. 그러니 오늘 내가 어찌했건 너는 이해해 줄 거지?”

먼저 굽히고 들어오는 주세화의 모습에 기세를 잡으려던 사연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

“이 사실이 알려지면 내 평판이 망가질 것 아냐. 작은 오해일 뿐인데.”

세화가 퉁퉁 붓기 시작한 사연주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덧붙였다.

“이 일을 어쩌나. 얼굴에 흔적이 크게 남아서 감출 수도 없는데. 할 수 없으니 누가 물어보면 대충 네가 덤벙대다 넘어져서 이렇게 됐다고 해 줘. 호위 없이 외출했다가 괴한에게 습격받았다고 해도 되고.”

‘이, 이게 무슨 미친 소리를…….’

다정하게 웃으며 하는 말이 어찌나 기가 막혔는지, 사연주는 입만 뻐끔거렸다.

대충 넘어져서 이렇게 됐다고 해?

호위 없이 나갔다가 괴한에게 습격을 당해?

네 평판 지키자고 내 평판은 망쳐도 된다 이거야?

그리고 오해? 지금 날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서는 오해라며 웃음이 나와?

“그게 무슨 말이야 언니. 지금 언니가 어떻게 나한테.”

“왜. 나도 네가 내 장신구들을 훔쳐 가고 내 이름을 팔아도 지금껏 용서했잖아. 그러니 내가 본의 아니게 널 조금 상처 입혔어도 당연히 이해해 줘야지. 내가 그렇게 해 온 것처럼. 우리는 그만큼 가까운 사이니까.”

“……뭐?”

“그래서 상냥한 동생은 오늘 일이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 너와 나는 서로 모든 걸 용서할 수 있는 사이니까. 그렇지?”

세화가 부어오른 사연주의 볼을 다시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 언니.”

울던 것도 멈추고 소스라치게 놀란 사연주는 얼얼한 제 볼을 감싸 쥘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황급히 입을 열었다.

“나…… 내, 내가 언니의 장신구를 훔쳐 갔다니. 그리고 이름을 팔았다니. 그건 또 무슨 오해를.”

“아니라고 하고 싶은 거야?”

“아니야. 절대 아니야!”

사연주가 비명을 지르듯 부인했다.

“난 절대 아니야. 뭔가가 없어졌다면 분명 그건 내가 아니라 언니한테 고했다는 그 시녀가.”

“총명하다 칭송받는 내 사촌 동생이 지금 무슨 멍청한 소릴 하는 걸까. 이곳에 있는 내 전담 시녀가 몇인지 너도 알잖아. 한 사람에게 귀중품을 맡겨 둘 리가 있어? 넌 내 측근 시녀들을 위시한 스물세 명의 귀금속 담당이 겁도 없이 모두 함께 작당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거니?”

“언, 언니.”

“도둑질을 한 것도, 더러운 곳에 출입하며 내 이름을 사칭하고 다닌 것도 다 걱정하지 마. 내가 아버지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잘 막아 두었거든. 네가 거지꼴로 쫓겨나는 것은 막아 주려고.”

전생의 주세화는 사연주의 일들을 알면서도 그것을 너그러이 넘기고 본인에겐 언급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십 년간의 전쟁 동안 군자금을 지원해 온 데다 배상 영력까지 제일 선두에 앞장서서 내놓았다.

하여 주가에서 가지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매우 검소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릇 연회나 모임을 위해선 수십 벌의 연회복과 남다른 장신구들이 필요한 법.

얹혀사는 처지인 사연주가 매번 새 연회복과 새 장신구를 사 달라고 하긴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도, 주가의 방탕한 아이들이 순진한 사촌 동생을 속여 먹었을 거라고 생각했었으니. 나야말로 아둔하기 짝이 없었지.’

“아무튼 내가 지금껏 이렇게나 네게 친절했으니 너도 내가 뭘 하든 나를 위해 몹시도 헌신적으로 친절을 베풀어 줄 거라 믿어. 그렇게 해 줄 거지? 너는 내 편이니까.”

“…….”

“왜 대답이 없어? 설마 싫으니?”

창백한 얼굴로 대답하지 못하는 사연주를 보며 “싫으면 안 될 텐데.” 하고 세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시 잘 생각해 봐. 아니면 나도 이제까지의 친절에 대해 보상을 받아 내고 싶어질 거니까.”

“……보, 보상?”

“응.”

“뭐, 뭘 하려고…….”

“방법이야 뭐. 일단 네가 저지른 수많은 더러운 일들 중 가볍게 절도부터 시작할까? 감히 주가 원로의 물건에 손을 댔으니 곧장 밀실 지하 감옥부터 가긴 하겠네.”

흉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사촌 동생의 볼을 만지며, 세화가 아주 가까이에서 사연주와 눈을 마주한 채 속삭였다.

‘내가 들어갔던 그 지하 감옥에.’

그녀의 심정으로는 한시라도 빨리 이 동생을 그곳에 처넣고 싶었으나 지금 가진 죄명들만으로는 너무 약했다.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더러운 면면의 밑바닥을 다 드러내고, 모두에게서 철저히 외면당한 채 죽어 가야 하니까.

“그래도 다행이야. 날 인질로 보내자고 한 사람이 네가 아니어서. 만약 너였으면 어떻게 해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 예쁜 얼굴과 몸을 갈가리 찢어서 개 먹이로 던지려고 했거든.”

“…….”

“너만은 내 편인데. 내가 이렇게 널 믿지 못하다니 정말 너한테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하지만 너야말로 앞으론 내가 오해하지 않게 처신을 똑바로 해 줘.”

여전히 제 볼을 적시는 차가운 것들을 닦아 내며 미소지은 세화가 천천히 일어섰다.

“다음번엔 절대 여기서 끝내지 않을 거니까.”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사연주를 내려다보는 진한 눈동자는 마치 타오르는 것처럼 열기를 품고 있었다.

아니, 그 열기는 눈동자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주세화의 온몸을 아우르는 열기에 사연주의 몸이 본능적으로 떨렸다.

미소는 상냥했고 말투도 부드러웠지만, 그것이 어우러진 표정은 사연주를 몸서리치도록 섬뜩하게 했다.

‘뭐, 뭐지. 뭐야. ……얜 누구야. 이런 사람 몰라. 난 몰라.’

“……언, 언니. ……날 때려서 미, 미안해서 운 거 아니었어?”

“미안해서 울어? 내가? 아. 무슨 말인가 했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오해야.”

주세화가 소리 내어 웃었다.

“이건 내게 너무 기쁜 일이 있어서 그래.”

그녀의 원수들이 모두 살아 있는 상태라니.

시간이 되돌아온 거라니.

그저 명계에서 되풀이되는 일이 아니라 다시 한번 삶을 살며 제 손으로 직접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게 되다니.

그 사실이 너무나 기꺼워 주세화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저도 모르게 사연주를 끌어안아 버렸었다.

자신이 이 몸을 나락으로 보내 버릴 수 있다는 게 너무나 기뻐서.

“감정이 주체가 안 돼서 너를 오해하게 했네. 미안해라.”

세화가 젖은 얼굴을 닦아 내며 친절히 설명했다.

하지만 또 눈물이 주르륵 흘러 닦아 낸 자리를 다시 적셨다.

그럼에도 그녀의 얼굴은 희열에 젖어 있었다.

기쁨에 도취되어 저를 응시하는 그 모습을 사연주는 창백해진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이대로 사촌 아가씨를 보내도 될까요?”

세화는 문가에 선 채 사연주가 허겁지겁 중문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영선이 그런 세화의 뒤로 와 함께 사연주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아가씨께 앙심을 품었을 것 같은데요. 말썽을 일으킬 것 같아요.”

“응. 그래야지.”

이미 주세화의 명을 받은 가문의 사람 몇이 비밀리에 사연주를 뒤따랐다.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던 사연주의 눈을 생각하며 세화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마음 같아서야 지금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지.’

제가 당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세화 자신이 가장 사연주를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참는 거야. 시간이 되돌아온 거라잖아. 명계가 아니라잖아. 그럼 더욱 철저히 행동해야 해. 내 한 가지 실수가 우리 가족을 다시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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