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254)

제가 지금 들은 말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지? ……백가의 가주라니. 그가 여기 있다고? 그 백기하가? 신수로 거듭난 그 백기하?’

“도대체 이 시국에 호위도 몸종도 없이 홀로 여길 왜 온 건지 모르겠구나.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나는 또 대관절 이 일을 가주께 어찌 아뢰어야 할지.”

“아, 아버지, 지금, 지금 백기하가 왔다고 하셨어요?”

“그래. 그가 무슨 계책을 세우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홀로 왔다니, 가주께서 그가 신수라는 사실을 잊고 사로잡으려 하시진 않을지 제일 걱정이구나.”

주명윤이 씁쓸히 중얼거렸다.

“오랜 전쟁으로 무사들의 영력도 예전 같지 않은 상태에서, 더 이상 혈족들에게 피해가 가는 일만은 막아야 할 텐데.”

“…….”

“일단 아비는 지금 가주께 가 봐야 할 것 같다. 가서 내막을 더 알아보마.”

깨어났는데 옆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주명윤이 그녀의 머리를 도닥였다.

그런 후 의관을 정제한 주명윤은 사단윤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세화가 멍하니 응시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해 얼떨떨한 상태였다.

백가의 가주가 여기 있다고?

지금?

주가의 영지로 오고 있어?

‘……그가 어떻게 여기 있을 수가 있지?’

사실 그녀는 이곳이 명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명계에 대해서는 그저 죽은 이들이 가는 곳이라는 것 외에는 제대로 된 정보가 조금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녀가 아는 이들이 여기 있어도, 그들 모두가 죽어 이곳에서 새로운 생을 시작하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백가의 가주, 백기하는 아니야.’

누구도 그를 죽일 수 없다.

그는 신수니까. 불로불사라는 신수.

‘그래. 아무도 그를 죽일 수 없어. 죽을 수 없으니 명계에 올 수도 없지.’

그런데 그가 여기 있다니.

그 논리가 알려 주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자신을 포함해 하나같이 어려져있던 사람들.

죽은 사람들이 가는 곳엔 갈 수 없는 백가의 가주.

명계도 아니고 주마등도 아니라면, 이건…….

‘맙소사. 설마 정말로 시간을 거스르기라도 한 거야?’

* * *

맞는 도중 기절했던 사연주는 지극한 고통에 신음을 터뜨렸다.

천천히 눈을 뜨자 방 안은 온통 고요했고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설마 이대로 날 버려두고 간 건가?’

“아윽.”

난생처음 겪어 보는 고통이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만들었다.

잘 정돈된 손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사연주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아 냈다.

‘뭐지? 대체 뭐가 걸려서 이 사달이 난 거야?’

하지만 눈물은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 무서웠으니까.

주세화가 이 방 안에 없다는 사실에 한숨이 나오도록 안도감이 들 정도로.

‘뭐가 문제지? 그년의 장신구들을 꺼내 간 게 들킨 건가? 아니면 장부인의 것을 훔친 게 발각된거야?’

그러면서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속한 연회에 참석할 때마다 저년의 이름을 댄 거? 아니면 도박관에서 가윤 오라버니의 명패를 팔아넘긴 게 걸린 건가?’

사연주는 주명윤의 방계 혈족, 사가의 딸이었다.

사연주의 부모님은 일찍이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을 치를 무렵 마침 주명윤이 그곳을 지나고 있어 그의 눈에 들 수 있었다.

홀로 남은 어린 혈족을 본 주명윤은 자신의 딸을 떠올렸다.

그래서 차마 지나치지 못하고 그녀를 자신의 저택으로 데리고 왔다. 딸의 말동무를 해 달라면서.

전시 중이었기에 주가의 권역은 예년의 화려함을 조금 잃었다.

하지만 처음 이곳에 온 사연주의 눈에는 어떤 곳을 보든 상상 이상으로 호화로울 뿐이었다.

만나게 된 사촌들 역시도 그녀에게 모두 친절했다.

처음 보는 아름다운 의복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반짝이는 장신구들. 맛있는 음식과 매일매일 계속되는 연회.

사연주는 주가의 생활에 순식간에 적응했다.

주세화의 앞으로 도착하는 초대 서신들에 전부 응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 몇 년뿐이었다.

오만한 주씨들은 원로의 비호를 받는 사연주를 감히 무시하지는 않았으나 당연하게도 같은 주씨처럼 존중하지도 않았다.

사연주는 곧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 자상하고 든든한 원로 부처는 제 부모가 아니고, 이 아름다운 저택도 제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걸.

주가의 것을 누리고는 있어도 제 처지는 원로의 식객일 뿐, 결코 진짜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너보다 내가 더 아름답고 내가 더 똑똑한데. 널 밀어내고 내가 그 자리에 앉는 게 더 낫지 않겠어?’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분노는 주세화에게로 향해졌다.

운 좋게 주씨로, 용족의 후손으로 태어난 여자아이.

미모도 지성도 자신이 더욱 뛰어나건만, 단지 자신은 뱀이고 그녀는 용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당연하게 소유한 사촌 언니.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증오스러워지기만 했다.

본래 제 것이었던 것을 이 사촌 언니가 다 빼앗아 누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원로 부처 앞에서는 착하고 사려 깊은 동생을 연기하느라 감히 사치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주세화의 것을 탐할 수밖에 없었다.

시작은 아주 작은 것이었지만 들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행동은 거침없이 변해 갔다.

우둔하진 않지만 태생부터 뭐든 부족함이 없었기에, 주세화는 사연주가 탐내는 걸 아낌없이 나눠 주거나 잘못이 있어도 쉽게 용서해 주곤 했다.

그러니 무슨 일이 발각되었든 지금과 같은 반응은 확실히 과했다.

‘가만. 혹시 장부인께 먹일 독을 산 걸 들킨 건가?’

주세화는 곧 백가로 갈 예정이고, 원로와 두 오라버니도 장수로서 늘 변방을 오가니 장부인만 어떻게 된다면 이곳은 제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 생각을 하자마자 사연주는 기쁜 마음에 서둘러 비밀리에 독을 구해 왔던 것이다.

‘아냐. 독을 산 걸 알아냈다 하더라도 누구한테 먹이려고 산지는 아직 모를 텐데.’

눈물범벅이 된 사연주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니면 다른 뭐가 있나? 너무 많아서 어떤 걸 들킨건지 추측하기도 힘들잖아. 도대체 뭔데?’

고민을 거듭하던 그녀가 이를 악물며 움직였다.

‘언제 그년이 다시 돌아올지 몰라.’

그러니 일단 이곳에서 먼저 빠져나가야 한다고.

그렇게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제 등 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세화의 두 시녀가 서 있었다는 걸.

“……아.”

잠시 정적이 흘렀다.

싸늘하고 날카로운 시선을 보며 사연주는 울던 것도 잊고 당황했다.

‘내가 방금 속으로만 생각한 거 맞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거 맞지?’

그 순간이었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얼굴을 온통 적신 주세화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연주야!”

그러고는 곧장 사연주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미안해. 확인도 해 보지 않고. 내가 어쩌면 이렇게 성급할 수 있었는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잔뜩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조금 전과는 또 달라서 겁먹은 사연주가 주춤 물러섰다.

‘뭐야. 이년이 대체 오늘 나한테 왜 이래?’

아까부터 지금까지 이게 계속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반응을 보니 내가 했던 일들이 들키진 않은 것 같지? 그럼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야?’

마음 같아서야 제가 얻었던 고통을 몇십 배 몇백 배로 되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문을 푸는 일이다.

분노와 혐오보다 앞선 탐욕이 사연주의 이성을 끌어올렸다.

‘아직은 안 돼. 아직은 가져갈 수 있는 게 더 많아. 지금은 아직 참아야 할 때야.’

그래서 사연주는 저를 끌어안는 주세화를 밀쳐 내는 대신, 먼저 눈물로 볼을 적셨다.

“무슨 일이었던 건데. 언니, 대체 나한테 왜 이런 거야.”

고통과 상냥함을 위장하며 가련하게 목소리를 떨었다.

주세화 역시도 눈물을 보이며 감정적으로 대답했다.

“너도 내가 백가로 떠나게 된 얘기를 들었지?”

“그거야…… 응, 들었어.”

“앞으로 나 혼자 그 역도들의 영지에서 지내야 한다니 어찌나 두렵던지. 헌데 궁을 나올 때 누군가 이상한 얘기를 하더라고.”

“……얘기? 어떤?”

“가주께서 날 소가주님 대신 백가에 보내시게 된 게 직접 고심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집안에서 먼저 나온 말이라고. 우리 집안 누군가의 입에서 이야기가 퍼져 나간 것이라고 말이야.”

“뭐?!”

사연주는 다급히 손으로 떨리는 입가를 감췄다.

모임에서 그런 말을 꺼낸 건 제가 맞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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